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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620호]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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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인류사]손권의 오나라 이전 양쯔강에 한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중국의 삼국시대는 지구 기후변화의 역사 속에서 수백 년의 주기로 찾아왔던 온난기, 그 중에서도 정점 부분에 해당하는 시기에 있었다. 이렇게 따뜻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더 따뜻하고 토질도 비옥했던 양쯔강 유역에 자리잡은 오나라에 목재가 궁했다? 그래서 기온이 더 낮은 편인 고구려와 요동에 저자세 외교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지난 회 이야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 중국 삼국시대의 위·촉·오와 한반도 국가들. 출처 이진아 제공

   이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지난 연재 ‘목재의 권력 소국 비블로스가 이집트를 우습게 여긴 이유’ 편에서부터 제기헀던 두 번째 질문과 연동돼 있다. ‘오나라가 한반도로 가기 위해선 배를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지리적으로 고구려보다 가까운 가야를 패스해서 갔을까’란 질문이다. 손권이 목재를 필요로 했던 거라면 따뜻한 남쪽 지역에서 구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해 바다 바로 맞은 편에 있는 가야는 건너뛰고, 굳이 멀리 있는 요동과 고구려를 찾아 어렵사리 관계맺음을 시도했다는 게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반 역사의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환경사(史)적 관점으로 해석하면 명쾌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시 한 번 한반도의 사국시대 및 중국의 삼국시대를 들여다보자.
   
   한 가지 설득력 있는 스토리가 떠오른다. 우리 고대사에서 큰 구멍인 가야,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손권의 외교 전략, 이 두 그림 모두 명확해질 하나의 중요한 퍼즐 조각이다. 한반도 역사를 되찾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얘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서기 50년대부터 200년 무렵까지 약 150년 간 양쯔강 중류 노른자 땅의 지배자가 한반도에서 진출한 가야였다는 것이다. (가야의 지배가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시작됐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역사에서 후한(後漢), 혹은 동한(東漢) 시대에 해당되는 기간으로, 삼국시대 바로 전 시기다. 그 중심지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보유했지만 현재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갑작스럽게 악명 높아진 우한 일대다.
   
   가야는 한반도 동남부 낙동강 수계를 따라 존립했던 변한의 소국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연맹체였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하구에 있어 바다로 진출하기 쉬웠던 금관가야가 맹주였다. 금관가야의 설립자 김수로왕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해를 건너 중국 대륙의 양쯔강 유역까지 진출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수로왕은 서기 42년부터 157년간 재위하고 199년 서거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는데, 양쯔강 가야는 서기 40년대 말 50년대 초부터 수로왕이 서거한 직후인 201년까지, 약 150년 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쯔강 가야인들은 양질의 철과 철 제품을 생산했다. 온난기를 맞아 더욱 무성해진 이 지역의 삼림과 지구상 어디에서나 대체로 풍부했던 철광석, 거기에 철기 제작 노하우까지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양쯔강 가야인들의 철 제품은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핫 아이템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철괴인 ‘덩이쇠(철정)’은 동아시아 일대에서 거의 화폐처럼 통용되곤 했다.
   
   
▲ 철광석을 제련해 다양한 철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중간 원료인 덩이쇠 (왼쪽)과 가야의 철로 만든 판갑옷과 투구(고령 지산동 고분군 32호 무덤, 가야, 5세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철 생산은 엄청나게 환경파괴적인 산업이다. 양질의 철을 동아시아 일대에 공급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목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양쯔강 유역에서 경제적 타산에 맞는 삼림은 그 150년간 다 소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는 새로운 목재 공급처를 찾아야 했다. 양쯔강 유역 원주민들의 반발도 이들이 여기서 떠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가야는 서기 200년 대 초기부터 일본 열도에 눈을 돌렸다. 쓰시마 섬을 거쳐 규슈 서쪽으로 흐르는 강들의 하류로 진출해서 육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야와 일본에 관한 상세한 얘기는 이어지는 가야 편에서 계속할 예정이다.)
   
   가야가 떠난 양쯔강엔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나 시간이 지나면 강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양쯔강 유역 집단의 경우, 북쪽에서 조조의 무리가, 서쪽에서 유비의 무리가 위협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빠르게 안정했을 테다. 가야가 양쯔강을 떠난 지 약 20년 후 손권이 상당한 범위의 국가를 설립한다. 이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갖는 이름인 ‘오(吳)’라는 국명을 내걸고 중국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 중 하나인 삼국시대에 동참한다.
   
   오나라는 양쯔강 중하류에 터를 잡고, 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뱃길을 활용해 살아왔던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생존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뱃길로 이어지는 국가와의 협력을 시도할 만했다. 오나라가 처음 요동의 문을 두드릴 때는 함께 위나라에 대해 협공을 펼칠 상대로서 접근했을지 몰라도, 고구려까지 반기며 다가갔을 때는 분명 비즈니스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자원 문제다. 그 자원 중 중요한 부분이 목재였을 것이다. 앞서 같은 지역에서 번성한 가야가 쓸만한 삼림은 모두 파괴해버렸을 테니 말이다.
   
   협력의 파트너로서 가야를 선택할 수는 없었을 테다. 이전 시대의 정복자로 적대 관계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 로마기후최적 온난기의 동아시아 각국 존속 기간 출처. 이진아 제공

   구체적인 사료에 빈 부분이 너무 많아 상당히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든 얘기다. 그 상상을 엮어내는 데는 일반적으로 사료로 간주되는 기록이나 유물 외에도 과거 기후변화와 지리, 천문 상태, 기타 생태적 특성을 말해주는 자료까지 필요했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일단 이 얘기를 놓고 보면, 지난 '고대 천문지도에 한반도 역사가 새겨져 있다' 편에 나왔던 박창범 교수의 천문 관측지도 중 상대 신라 부분에 대한 설명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여지가 생긴다. 상대 신라의 천문관측지는 중국 양쯔강 중류 우한 일대에 있었다는 부분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역사물의 독자는 항상 역사 기록의 속성에 대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 스토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왜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 중심지가 가야가 지배했던 땅이었는지, 그 연결고리부터 찾아야 한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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