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방영됐던 ‘선덕여왕’이라는 TV 드라마가 있다. 이 작품엔 ‘월천대사’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천문과 책력에 통달한 인물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나중에 첨성대를 설계한다. 천문학적 전문성을 갖춘 그는 가야 출신으로서 신라에 귀화한 사람으로 나온다.

이 캐릭터는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 가야의 인재들이 신라 왕실에서 계속 일정한 역할을 했던 역사적 상황을 시사한다. 천문학은 그 중에서도 중요한 분야였을 것이다.

밤에 별을 관측하면서 길을 찾아가는 배의 모습을 그린 16세기 미국 판화(1575 그래인저 작). ‘스타 내비게이션’은 나침반을 이용한 항법이 도입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해로 탐색에 이용된, 아주 긴 역사를 갖는 기술이었다. 출처: fineartamerica
밤에 별을 관측하면서 길을 찾아가는 배의 모습을 그린 16세기 미국 판화(1575 그래인저 작). ‘스타 내비게이션’은 나침반을 이용한 항법이 도입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해로 탐색에 이용된, 아주 긴 역사를 갖는 기술이었다. 출처: fineartamerica

고대사회에서 천문은 농사일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을 주는 분야였다.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는 ‘항해’였다. 나침반이 없었던 시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낮에는 해, 밤에는 별의 위치를 기준으로 바닷길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 내비게이션(star navigation)’의 필요성 덕분에 고대의 해양족들은 발달한 천문학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야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동남부에 확실한 영토를 가졌던 육지 기반의 국가 신라보다는, 본토는 좁지만 드넓은 해역을 배로 누볐던 해양국가 가야 쪽이 훨씬 더 천문학이 발달했을 수 있다(해양국가로서 가야의 면모는 다음 회부터 좀 더 자세하게 보려 한다.).

가야가 패망한 뒤 신라가 그 중요 분야의 전문 인력을 흡수해서 중용했다는 사실은 역사기록의 속성과 관련해 적지않은 함의를 갖는다. 역사기록을 대할 때는 누가 그걸 썼는지 확인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학을 연구하기 전에 역사학자를 연구하라”는 영국 역사학자 E.H.카의 명언도 바로 그런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일본의 고대 역사기록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점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일본의 동양 고대사 전문가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서기 3~4세기경 백제 도래인이 일본에 와서 한문을 전파한 이래, 일본의 역사기록은 이들 및 그 후손들이 담당했다. 일본 원주민 중에는 한문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그때까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고대사 기록은 이들의 기억과 경험 위주로 되어 있어 실제와는 편차가 있을 수 있다.” 가야와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가야는 이상할 정도로 기록이 안 남아 있는 나라다. 한반도의 고대사 기록이 아주 드문 편이어서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대목으로 우리의 과거를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국 역사서에서 한반도 국가 중 가야에 대한 기록이 특히 드물다. 우리나라의 역사기록 가운데는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중 ‘가락국기’가 짧으나마 유일하게 본격적 기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신라를 침략하거나 신라와 교류한 나라로서 간간히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건 없다. 이건 한동한 번영했으나 후대에 더욱 강력해진 인간 집단에 패배한 모든 인간 집단의 운명이다. 역사시대에 진입한 이래,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정복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정복지의 역사기록을 말살하는 일이었다. 정복자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고쳐 쓴 역사를 편찬해서 배포, 전승시킨다. 그렇게 왜곡된 역사는 ‘역사적 사실’이란 모습으로 오랫동안 전해진다.

신라와 병합될 때 가야의 상황도 그랬을 것이다. 신라의 역사 기록이라고 전해지는 것 중에서, 적어도 가야가 존재했던 시기의 기록에는 가야의 역사와 신라의 역사가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관측지도를 보자. 박 교수는 ‘삼국사기’에 담긴 일식 기록을 컴퓨터로 분석했다. 과연 그 타이밍에 일식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동시에 그 날 그 시간대에 일식이 보이는 곳이 지역적으로 어디였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신라본기’ 일식 기록을 근거로 만든 지도. 일식 현상이 잘 관측될 수 있는 지역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했다. 상대(上代) 신라는 기원전 54년부터 서기 201년까지, 하대 신라는 서기 787년부터 신라가 멸망한 서기 934년까지의 기록을 근거로 관측지를 도출했다. 출처: 박창범(2002),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신라본기’ 일식 기록을 근거로 만든 지도. 일식 현상이 잘 관측될 수 있는 지역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했다. 상대(上代) 신라는 기원전 54년부터 서기 201년까지, 하대 신라는 서기 787년부터 신라가 멸망한 서기 934년까지의 기록을 근거로 관측지를 도출했다. 출처: 박창범(2002),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그 결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담긴 일식 기록이 기원전 54년부터 서기 201년까지의 255년간 중국 대륙의 양쯔강 중류에서 관측된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의 우한 일대다. 박 교수는 이 시기에 ‘상대(上代) 신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선 연재에서 보았듯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우한 일대를 근거로 제철을 기간산업으로 활발한 교역을 펼치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시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천문 현상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과거의 역사를 왜곡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해주는 기록이라고 간주된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몰라도 상대 신라의 천문 현상에 대한 기록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 현상이 중국 양쯔강 중류에서 처음 기록된 것이라고 또렷이 말하고 있다.

역사 기록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그게 신라의 기록이 아니라 가야의 기록일 수도 있다. 가야 출신의 사관들이 신라의 이름으로 역사를 쓰면서, 가야역사에서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남겨둘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까. 혹시 후대의 누군가가 신라 역사에서 망실된 가야의 흔적으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순 없는 일이다. 지금으로선 당시 가야의 본거지는 중국 양쯔강 중류에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이 추정을 전제로 깔고 보면 여러 가지가 설명된다. 컴퓨터가 보여주는 고대 한반도 국가의 중심지 중 하나가 양쯔강 중류에 있었던 이유, 삼국시대 오나라 배가 작았던 이유, 오나라가 가야를 건너 뛴 이유, 그리고 가야가 가까이 있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200년대 초에 가서야 개척한 이유 등등.

박창범 교수의 천문관측지도가 던진 화두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신세계 개척은 언제나 짜릿한 흥분과 동시에 확신하기 힘든 데서 오는 혼란을 동반한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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