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보세창고 컨테이너 속에 있는 상하이 보강리 석고문에 붙어 있던 표지석. ⓒphoto 오광택
인천항 보세창고 컨테이너 속에 있는 상하이 보강리 석고문에 붙어 있던 표지석. ⓒphoto 오광택

상하이 도심재개발로 철거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 활동무대 ‘보강리(寶康里·바오캉리)’가 흔적조차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보강리는 중국 상하이 시내 중심가인 화이하이루(淮海路) 뒤편에 형성된 골목길(里弄) 주택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옛 프랑스 조계(租界·치외법권 지역)에 속했던 곳으로, 1913년 조성한 약 120가구의 주택이 모여 있던 동네다.

과거 보강리는 김구, 안창호 등을 비롯해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곳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보강리는 1990년대 화이하이루 아래를 지나는 상하이지하철 1호선 개통 과정에서 철거됐고, 현재 이곳에는 루이안광장(瑞安廣場)이란 고층빌딩과 신천지광장(옛 태평양백화점)이란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보강리는 철거됐지만 입구를 알리는 ‘석고문(石庫門)’에 붙어 있던 표지석과 건축자재들은 19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 상하이 임정 1호 청사를 찾는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국내로 들여와 아직까지 인천항 남항의 한 보세창고에 보관돼 있다. 보강리 관련 유적을 국내로 반입한 측이 막대한 통관비용 때문에 수십 년째 통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세청 인천본부세관이 최근 이 유적을 들여온 화주(貨主)인 대한민국건국역사관건립기념사업회 측에 해당 물건들을 폐기처분하는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 조짐이다.

인천항 보세창고에 있는 ‘보강리’

세관을 통관하지 못하면 해당 물건은 관세법령에 따라 일단 국고로 귀속된 뒤 폐기처분 수순을 밟게 된다. 이와 별개로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인천항 보세창고 측도 “수십억원대의 밀린 보관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강리’ 표지석이 들어 있는 컨테이너는 과거 동부그룹의 동부익스프레스가 관리하다가, 동부익스프레스가 동원그룹에 인수된 뒤 동원그룹 산하 물류회사인 동원로엑스가 관리 중이다. 화물을 가져가려면 1994년부터 26년 가까이 밀린 수십억원대 보관료부터 내야 하는 탓에 재력을 갖춘 독지가도 선뜻 나서기 힘든 형편이다.

작고한 오성환 청로(淸露)유적사적발굴연구회 회장과 함께 1994년 보강리 관련 폐건축자재들을 국내로 들여온 오광택 대한민국건국역사관건립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임정 1호 청사 고증이 지연되면서 수십 년간 인천항 보세창고에 보강리 유적이 있게 됐고, 수십억원대로 추산되는 창고보관료 등으로 인해 통관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주간조선은 지난해 4월 임정 요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상하이 보강리 입구에 붙어 있던 표지석이 인천항 보세창고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을 발굴해 보도한 바 있다. 보도 이후 컨테이너 속에서 먼지가 켜켜이 쌓인 ‘보강리’ 표지석을 실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세청 인천본부세관 측은 학술적 근거가 없다면 일반적인 폐건축자재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보강리, 임정 요인들의 주 활동무대

‘보강리’가 상하이 임정 요인들의 숙소를 비롯해 임정의 주요 활동지란 근거는 차고도 넘친다. 독립기념관은 한·중 수교 전인 1990년 5월 상하이 시내 현장조사를 벌여 임정 요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보강리 일대의 지번을 직접 확인한 바 있다. 이는 독립기념관이 1990년 작성한 ‘대외비’ 문건에 나온다. 보강리 23호 이동휘(임정 국무총리), 보강리 27호 김구(임정 주석), 보강리 44호 안창호(임정 국무령), 보강리 54호 이유필(임정 내무총장), 보강리 60호 신규식(임정 법무총장), 보강리 65호 김붕준(임시의정원 의장), 보강리 68호 조성환(임정 군무총장) 등이다.

국가보훈처 역시 1994년 6월 작성한 ‘최초 임정청사 현지 조사 보고’란 문건에서 “이 지역(보강리) 일대의 주택은 완전 철거되어 공지(空地) 상태였으며, 철거자재 중 7동분을 한국으로 반입”이라고 적었다.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가 파악한 임정 요인들의 거주지 외에도, 보강리 15호는 천도교(동학의 후신) 지도자였던 최동오(월북한 천도교 교령 최덕신의 부친)가 살았던 곳으로 천도교 본부로 쓰였다. 또 보강리 24호는 조상섭 선생(임시의정원 의장)이 거주했던 곳이다.

특히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장(한인회장 격)을 지낸 이유필의 자택인 보강리 54호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의거(1932년 4월 29일) 직후, 미처 피신하지 못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단재 신채호가 ‘신대한(新大韓)’이란 신문을 발행했고, 임정 재무위원장을 지낸 윤현진이 사망한 곳도 보강리 54호다. 또한 보강리 23호는 상하이대한민국청년단(단장 여운형), 보강리 65호는 대한교육회(단장 박은식)가 있었던 곳이다.

미주 한인들이 발행한 ‘신한민보’에는 “한국 각도 선출 의원은 상하이 법조계(法租界·프랑스 조계) ‘보강리’에서 한국 림시의정원 설립을 협의하얏고, 4월 10일 ‘보강리’에서 림시의정원을 정식 성립하얏다”(당시 표기대로)라는 대목도 나온다. 이 기사가 맞는다면, 보강리는 임시정부의 국회 격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이 밖에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공훈 전자사료관에서 ‘보강리’를 검색하면, 김석황(보강리), 이춘숙(보강리 8호), 김동범(보강리 65호) 등 독립유공자의 주소지로 나온다. 공훈 전자사료관에서 ‘보강리’로 검색되는 자료는 모두 56건으로 임정 수립 초기 청사가 있었던 장안리(長安里) 35건,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보경리(普慶里) 32건보다 월등히 많다. 일제강점기 임정 요인들을 비롯 상하이 거주 한인들의 활동이 이뤄졌다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누차 강조해온 문재인 정부에서 ‘보강리’ 유적이 폐기처분 수순에 들어갔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는 지적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상하이시 외사(外事) 판공실 측의 배려로 해당 폐건축자재들이 국내로 반입된 이후, 과거 정부에서는 ‘만일’을 대비해 해당 물건들을 폐기처분하지 못하고 인천항 보세창고에서 보관해 왔다. ‘보강리’ 표지석이 포함된 컨테이너 28개 분량의 건축자재 속에 임정 1호 청사가 섞여 있을 수도 있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1호 청사는 임정 수립 101주년이 된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나 건물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금의 상하이 임정 청사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청사로, 골목길이 속한 주소(보경리 306롱 4호)에 따라 ‘보경리(普慶里·푸칭리) 청사’로 흔히 통칭된다. 1993년 삼성그룹이 당시 돈으로 3억원을 쾌척해 복원한 곳이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사업까지 본격화한 마당에 한편에서 임정 관련 중요 유적이 폐기처분 수순에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지난 4월 10일 임정 수립기념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원웅 광복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서대문구의 옛 서대문구의회 자리에서 첫 삽을 떴다.

관세청 인천본부세관 통관지원과의 한 관계자는 “오는 9월 21일까지 수입통관을 하거나 반송하라고 반출통고서를 보낸 상태로 아직 폐기처분 절차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라면서 “일반적인 물건의 경우 화주(貨主)가 원해서 폐기신청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가격을 산출한 뒤 공매절차를 거치게 된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