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리만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한국 고대사. 그 중에서도 가야는 특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조차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야의 건국신화를 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알에서 6명의 소년이 태어나 각각 가야연맹 소속 국가의 왕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나와 금관가야의 왕이 된 수로왕은 그로부터 6년 후 결혼을 한다. 수로왕의 신부는 뱃길로 2만5000리 떨어진 ‘아유타국’이라는, 이국 냄새 물씬 풍기는 나라에서 온 공주 ‘허황옥’이었다. 이들은 약 150년 간 해로하면서 10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중 4남부터 10남까지 일곱 왕자는 성불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김수로왕은 완하국(혹은 다파나국)에서 왔다는 석탈해와 왕의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는데, 석탈해가 매로 변신하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고, 석탈해가 참새로 둔갑하자 수로왕은 새매가 된다. 결국 탈해는 꼬리를 내리고 중국으로 가는 뱃길로 떠난다. 이를 지켜 보던 수로왕은 석탈해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며, 500척의 배로 뒤를 쫓다가 탈해가 신라 땅으로 들어가자 추적을 멈춘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 공주가 붉은 돛을 단 배를 타고 항해해서 오는 이미지를 담은 종이 판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임을 최초로 고증했던 포운 이종기 선생의 작품이다. 출처=이진아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 공주가 붉은 돛을 단 배를 타고 항해해서 오는 이미지를 담은 종이 판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임을 최초로 고증했던 포운 이종기 선생의 작품이다. 출처=이진아

이상이 가야에 대해 얼마 남지 않는 기록 속 비현실적인 요소다. 역사물을 많이 접했던 독자라면 좀 이상하다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원래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기록엔 신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요소가 많다. 예를 들면, 수로왕만 알에서 나온 게 아니라, 고구려의 시조 주몽,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신라 석씨 왕조의 시조 석탈해가 모두 알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불과 600여 년 전인 조선시대 왕조가 설 때도 ‘용이 하늘로 날았다’는 등 비현실적 기록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국가들의 존재 자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유독 가야가 뭔가 신화 속에 존재했던 나라인 것처럼 여겨진 것은 아마 가야의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실제로 1980년대 이전에는 전해지는 가야의 유물도 거의 없었다. 수로왕의 왕후 허황옥이 시집 올 때 배에 실어왔던 걸로 전해지는 ‘파사석탑’ 정도였다. 이조차도 풍상에 깎인 돌덩이 몇 개 쌓은 게 전부였다.

경남 김해에 있는 파사석탑. 허황옥 아유타국 공주가 해신(海神)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해지는 탑. 원형이 많이 훼손됐지만, 돌의 재질은 한반도에서 나는 것이 아님이 확인됐다. 출처=김해 시청 홈페이지
경남 김해에 있는 파사석탑. 허황옥 아유타국 공주가 해신(海神)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해지는 탑. 원형이 많이 훼손됐지만, 돌의 재질은 한반도에서 나는 것이 아님이 확인됐다. 출처=김해 시청 홈페이지

1990년대부터 가야 고분이 대거 발굴되면서 세상은 가야라는 나라의 존재를 실감하게 됐다. 가야의 흔적들이 오랫동안 어두운 침묵 속에 묻혀 있다가 그때부터 줄줄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마치 가야가 자신의 존재가 충분히 입증될 수 있을 만한 어떤 시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야의 유물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대거 출현한 데는 두 가지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가야의 고분들 중 상당수가 신라나 고구려의 그것과는 달리 별로 눈에 띠지 않는 외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1990년대부터 김해를 비롯한 대도시 이외 지역에서도 대규모 도로나 아파트 건축 등 토건 공사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부산이나 김해처럼 일찍부터 도시화된 지역에 남아 있는 가야의 고분은 전기(前期) 가야의 것으로 ‘나무덧널’ 구조가 많다. 묘실의 외곽이 목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나무가 썩어 주저앉으면서 주변 땅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 평평한 모습이 된다. 후기에 번성했던 가야국의 무덤들은 돌을 좀 더 많이 사용하고 그 위를 흙으로 봉분해서 나지막한 구릉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지역에 있어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위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곳은 농지 사이에 위치한 공터였다. 출처=가야 뉴스 http://gaya.knnews.co.kr/gaya/sub01/01.html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위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곳은 농지 사이에 위치한 공터였다. 출처=가야 뉴스 http://gaya.knnews.co.kr/gaya/sub01/01.html

나무로 만든 묘실 위에 엄청나게 많은 돌을 얹고 흙으로 봉토한 신라의 고분, 기본 구조가 석재로 되어 있는 고구려의 고분들과 달리, 가야의 고분은 나무 부분이 썩으면 흙만 남는다. 전문적 도굴꾼의 눈에 걸리면 털리기 쉽다는 약점도 있지만, 그 덕분에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정복자들의 눈을 피해 땅 속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었다. 1500년 이상 그저 풀이나 자라는 공터로 남아 있거나 그 위에 사람들이 사는 건물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랬던 가야의 고분이 1990년대부터 대형 토건공사 붐이 일며 땅을 깊이 파헤치면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출토된 유물은 사람들에게 ‘가야’라는 나라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동시에 그 존재에 대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있던 미미한 나라였다고 보기에는 부장품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도자기 기타 생활용품과 함께 고품질 철덩이와 철 제품들이 대량 출토됐는데, 당시 이런 것들은 지금으로 치면 첨단 IT제품 이상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갖는 생산물이었다. 이런 유물의 주인이 동아시아 일대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잘 나가는’ 존재였음을 추정될 수 있다.

가야 문화는 상당히 특색 있기도 했다. 종전까지는 한반도에서 보기 드물었던 ‘순장(殉葬)’, 즉 중요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모시던 사람들을 같이 죽여 묻는 풍습이 있었다. 순장을 했다는 점이나 무덤의 형태로 보아, 가야 지배층은 고구려보다도 더 북쪽에 있었던 부여와 더 가까워 보였다. 한편 다른 부분에서의 연구를 보면 가야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 남방에서 온 영향도 뚜렷했다. 가야가 상당 기간 동안 일본에 진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모로 확인되고 있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이곳저곳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소국들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가야, 대체 어떤 나라였기에 이런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걸까? 가야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그 미스터리를 해석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는 거기 덧붙여서, 추정이긴 하지만, 가야가 한동안 중국에서도 가장 비옥하고 문화적 축적이 두터운 곳 중 하나인 양쯔강 중류 우한 일대의 지배자였을 수 있다는 부분을 조명하고자 한다.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상대 신라의 일식 기록을 컴퓨터로 분석, 작성한 관측지 지도가 보여주는 바로 그 지역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일식 기록을 분석해 그것이 관측된 지점을 표시한 박창범 교수의 지도.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가 양쯔강 중류라는 점이 뚜렷이 보인다. 출처=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일식 기록을 분석해 그것이 관측된 지점을 표시한 박창범 교수의 지도.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가 양쯔강 중류라는 점이 뚜렷이 보인다. 출처=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 해석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첫째, 박창범 교수의 일식 관측지 지도의 신뢰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상대 신라 지도의 중심지 양쯔강 중류 유역의 지배자가 왜 신라가 아니라 가야였던 것으로 보는가? 둘째, 상기 지도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201년까지 약 250년간의 일식 관측지를 표시한 것이다. 가야라는 고대국가의 설립이 서기 40년대인데, 그 100년간의 공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설사 가야가 그때 양쯔강 일대의 주인공이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렇다면 가야를 한민족의 나라라기보다는 중국에서 출발한 나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포괄하는 그림을 다음 회부터 그려보자.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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