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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금 다른 인류사]  가야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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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625호]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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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인류사]가야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가야가 어떤 나라였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역사를 보던 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가야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용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그 존재를 될 수 있는 한 축소하려는 의도로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역사적 관점으로 보려 한다면, 가야는 언제까지나 미스터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어떤 집단이든 ‘루저’가 되는 순간부터 불리한 모습만 후대에 전해지게 되는 게 역사 기록의 속성이다.).
   
   근거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어떤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려면, 비슷한 성격으로 전개됐던 다른 사건을 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선 연재에서 언급한 ‘바다 사람 사건’은 가야를 이해하는 데 큰 시사점을 준다. 비록 1000년 세월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말이다.
   
   이들이 주로 바다를 무대로 움직였다는 것과 철기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집단이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 있다. 인류사에 있어서 모든 커다란 움직임이 그랬듯이, 이들 뒤에는 거시적인 환경 변화라는 추동력이 있었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바다 사람들의 경우도 이들이 직접 기록한 건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집단의 기록만 남아있다.
   
   (바다 사람에 대한 기록은 당시 수준 높은 문자 사회였던 이집트의 문건에 주로 남아있다. 바다 사람들에게 200~300년이나 시달리다가 결국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 인근 국가들에게 정복 당한 이집트가 바다 사람들에 대해 곱게 말할 리 없다. 최근까지도 바다 사람이 ‘사악하고 찌질한 해적’과 비슷한 존재로 알려졌던 이유다.)
   
   선구적 환경역사서 ‘녹색세계사’으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은 인류의 역사를 환경변화와 그에 대응하는 인간 전략의 연속으로 본다. 바다 사람이 실질적 주역이었던 지중해 청동기 붕괴 과정 역시 기후변화의 힘이 무서울 정도로 엄정하게 작용했던 역사적 사례다.
   
   
▲ 두 부류의 바다 사람들을 재현한 미니어처. 왼쪽은 소아시아 출신 철기 제작인들이며, 오른쪽은 당시까지 청동기 수준이었던 지중해 중부의 섬 사르디니아 출신이다. 이들은 철기를 공유하며 거대 청동기 제국들을 쓰러뜨렸다. 고대 전쟁사 연구자이며 관련 조형물 제작 아티스트인 안드레아 살림베티의 작품. 출처: http://www.salimbeti.com/micenei/art1.htm

   기원전 1200년 무렵 급격한 지구온난화 시기를 맞아 지중해 서쪽과 동쪽 해역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환경 난민이 대규모로 발생했다. 이들은 바다를 통해 움직이며 살만한 육지를 계속 공략했기 때문에, 안정된 육지를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에겐 모두 ‘침략자 바다 사람’이었다. 이들 중 지중해 동쪽인 소아시아에서 온 집단은 뛰어난 철기 제작기술을 갖고 있었고, 서쪽인 이베리아 반도 남부나 사르디니아 섬에서 온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서 싸우는 기술에 능했다.
   
   두 집단은 지중해 해안 지역을 장악한 뒤 청동기문명을 쓰러뜨리고 철기 문명의 막을 열었다. 빠른 속도로 확산하면서 세상을 뒤집는 것이 초기 철기 제작 집단의 특성이다. 바다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 속도와 파괴력은 훨씬 커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육지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바다로 움직이는 편이 훨씬 속도가 빠르고 효율적이며, 육지가 서로 경쟁하는 여러 집단의 경계로 나누어져 있을 때는 더욱 더 그렇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철기 사회 가야의 움직임을 보자. 낙동강 하류의 여섯 마을에, “하늘에서 알이 내려와” 6명의 소년이 나와서, 금관가야를 비롯해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각각 왕으로 즉위한다. 고대의 역사 기술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왕들이 외부에서 왔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테다. 어디서 왔을까?
   
   
▲ 가야(대성동)와 부여(라마동 외)의 유물 비교 및 동일한 직사각형의 무덤 구조. 사진 제공: 이진아

   그동안 여러 설이 있었지만, 최근 고분 발굴 성과가 축적되면서 가야 건국자들은 부여에서 온 사람이라는 설명이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됐다. 순장 풍습, 청동 솥이나 마구 등의 유품들, 무덤 형태, 인골의 특징 등으로 볼 때 그렇다.
   
   부여는 한반도 위쪽, 고구려의 북쪽 너머에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700년 이상 건재했던 한민족의 나라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기록 중에도 누구에게도 패한 적이 없는 부유한 나라였다는 얘기가 나온다(따라서 서기 원년부터 통일신라 이전까지의 시기를, 이전의 3국시대에 가야를 더해 4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부여까지 넣어 5국시대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흑요석의 혜택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고구려보다는 부여가 더 일찍부터 철기 제작에 공을 들였을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길이 4500km의 아무르강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오는 철기 제작 기술이 급속히 전파됐을 것이다. 높고 긴 대흥안령 산맥이 북서쪽을 막아주고, 그보다는 낮지만 역시 대규모 산맥인 소흥안령 산맥도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역보다 견실한 삼림생태계를 유지했을 테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었지만 풍요로운 제철 사회가 비교적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던 부여가 왜 김해까지 왔을까? 이 시기 거시적 환경변화를 부여의 지형과 함께 살펴보자.
   
   
▲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거시적 환경변화(왼쪽)와 부여의 지형(오른쪽). 제공: 이진아

   기원전 1세기, 한랭기 국면에서 기온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변화와 함께 화산 폭발이 많아졌다. 지난 ‘지구자기장 과학으로 읽은 고대 중국의 신화’편에서 보았듯이, 화산 폭발이 유달리 많았다는 것은 지구를 보호하는 구조인 지구자기장이 약해졌던 시기라는 얘기다. 지구자기장 약화의 영향은 거의 지구 전체에 미치므로 이 시기 동북아시아에도 비슷한 영향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지구 전체적으로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백두산도 폭발했던 게 아닐까? 확인할 수는없는 일이다. 만주 평원에 부여가 융성하던 기원전 1세기의 한반도 자체 기록으로는 남은 게 없고, 지금 그 지역에 가서 지질학적 흔적을 정밀조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잘 나가던 부여를 일시에 흔들어 유민을 대거 배출할 정도의 환경 변화라면, 지구자기장이 특히 약했던 시기라는 특성을 감안할 때 제일 먼저 백두산 폭발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남동풍이 부는 여름철에 폭발이 있었다면, 부여가 자리잡았던 대흥안령 산맥과 소흥안령 산맥 사이의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지대가 직격탄을 맞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부여인들 중 상당수가 서둘러 백두산 남쪽으로 탈출했을 것이다. 육로가 아니라 아무르강이나 두만강 하구에서 출발, 바닷길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적대국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경쟁국이었고, 백두산 폭발 피해로 예민해져 있었을 고구려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최근 한반도 동해안 지역 유물 발굴로 나오고 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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