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의 일이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반도 역사 얘기가 대화의 주제가 됐었다. 민요에도 조예가 깊은 전통춤꾼 김경란이 뜬금없이 “동해안을 따라 기마민족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서 비슷하게 전해지고 있다는 구음(口音) 한 가락을 불러주는데, 잠깐 듣기만 해도 보통 우리 민요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수많은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 빠른 박자의 박진감은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말을 키운다면 제주도를 연상한다. 태백산맥 옆 좁은 땅줄기인 동해안에서 그렇게 많은 말들이 달릴 일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합석한 친구들은 모두 웃으며 “그럴 리가”라며 다음 얘기로 넘어갔고 나도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후 가끔씩, 그때 들었던 그 가락과, ‘기마민족이 동해안에?’라는 의문이 떠오르곤 했다.

부여인이 이용했던 아무르강, 넨강, 쑹화강, 우수리강의 큰 줄기 및 부여인이 연해주에서 김해까지 이동했을 걸로 추정되는 해상 루트. 제공: 이진아
부여인이 이용했던 아무르강, 넨강, 쑹화강, 우수리강의 큰 줄기 및 부여인이 연해주에서 김해까지 이동했을 걸로 추정되는 해상 루트. 제공: 이진아

가야인의 기원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자리잡으면서, 그들이 만주 평원의 부여에서 쑹화강, 아무르강을 거쳐 연해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내려왔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말들이 달리는 듯한 박자의 구음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작은 동해안 마을들에서 원래부터 많은 말을 키울 일은 없었을지 몰라도, 기마생활을 했던 평원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큰 배로 말과 함께 도착했던 일은 있지 않았을까.

지난 기사(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625100029)에서 알 수 있었듯이 고구려인이 수백 마리의 말을 배에 싣고 다니는 걸 예사로 생각했는데, 같은 시대에, 광활한 평야를 영토로 했던 부여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일시에 말을 타고 해변을 달려 마을로 향해왔다면, 그 엄청난 인상은 그런 가락으로 남았을 법했다.

그런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어준 것은 2017년 한국상고사학회에서 발표된, 한림대 심재연 교수의 논문이었다. ‘환동해지역 비(非)중원계 철 생산 가능성’, 풀어 말하자면, 연해주에서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경로의 지역에서, 중국의 제철 중심부로 알려졌던 양쯔강이나 황하에서 온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철이 생산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철기시대는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전파되어 시작됐다는 게 통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물 발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설은 이미 낡은 것이 됐다. 2007년 강원도 홍천에서 기원전 7세기에 제작된 철기 단편이 발견된 바도 있다. 그래도 중국 중심부인 양쯔강과 황하 유역에서 먼저 제철이 시작되고 그것이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설명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심교수의 주장은 이런 통설마저 뒤집는 것이다.

선철 상태에서 두드려가며 더 단단하게 하고 모양을 갖추게 하는 제작 방식의 동해안 형 철기들. 좌로부터 동해, 연천, 홍천에서 발굴된 유물. 제공: 이진아
선철 상태에서 두드려가며 더 단단하게 하고 모양을 갖추게 하는 제작 방식의 동해안 형 철기들. 좌로부터 동해, 연천, 홍천에서 발굴된 유물. 제공: 이진아

동해안 지역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기시대 유적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삼척 호산리, 동해 송정동, 동해 망상동, 강릉 안인리, 강릉 병산동, 강릉 교항리, 양양 동호리…. 모두 바닷가 혹은 바로 바다로 연결되는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며, 앞으로도 이런 지역에서 발굴이 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의 제작 특성은 중국 중심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중국에선 거푸집을 만들어 쇳물을 흘려 넣어 굳히는 방법이었는데, 이곳 철기는 선철 덩이를 계속 가열해가며 두드려 모양을 잡는 방식이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괴로의 구조도 다르다.

이는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출발, 아무르강을 따라 만주 평원을 거쳐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 제작 특성이다. 연해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한반도 동해안 지역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특징이 북한강, 남한강, 임진강 및 한강 지천인 안성천과 왕숙천 유역 등 내륙 깊숙한 곳에서까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들의 연대는 동해안에서보다 조금 나중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반도 동해안 지역에서 발굴되는 철기 유물에는 아주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제작 연대가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왜 이런 연대에만 생산됐던 것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궁금해하는 듯하다. 만일 이 시리즈에서 추정하는 것처럼, 기원전 1세기, 백두산 폭발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다수의 부여인이 일시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서 그 중 일부가 중간중간 정착해가며 김해까지 갔다면, 충분한 설명이 된다.

다시 바다 사람의 경우를 상기해보자. 원래 고대 제철 선구자들의 속성이 빠르게, 그리고 끊임없이 외부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바다로 움직인다면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부여인 남하 사태보다 1000년이나 이전인 지중해에서, 바다 사람이 움직이는 스케일은 직선거리로 4000킬로미터가 넘었다. 연해주에서 김해까지 직선거리는 그 절반도 안 된다.

바다사람과 부여인의 해상 이동 경로 비교  제공: 이진아
바다사람과 부여인의 해상 이동 경로 비교 제공: 이진아

또한 부여인들은 아무르강, 쑹화강, 넨강, 우수리강 등의 수계를 따라 길게는 수천 킬로미터 규모로, 연해주로 연결되는 물길을 이용하던 사람들이다. 대흥안령 및 소흥안령 산맥이 주는 넉넉한 목재도 있고 하니, 큰 배로 장거리 이동하는 것도 일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앞선 철기 무기도 갖고 있었고, 좁은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준마의 위용을 이용할 줄도 알았을 테다.

마음만 먹는다면 동해안을 타고 내려가며 이곳저곳 장악하여, 소규모이나마 국가 비슷한 체계를 갖춘 집단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서에 잠깐 등장하는 실직국, 음즙벌국 등의 나라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 동해안 남쪽의 형산강을 따라 지금의 경주 있는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테고, 조금 더 내려와 남해안을 끼고 돌아서 낙동강을 만나면 김해를 비롯, 여러 곳을 장악할 수 있었을 테다.

김해까지 오면, 거기서 남해와 서남해 방향으로 진출할 길이 활짝 열린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금관가야의 설립자 수로왕의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7성이 머물 만한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낙동강 수계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인 김해 일대를 여뀌잎에 비교했던 수로왕, 만주 평야를 주름잡던 부여 출신다운 스케일이다. 그는 어디까지 강토를 개척했을까?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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