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족’의 성지 ‘플레이스 캠프 제주’를 만든 놀이족장 김대우 총괄매니저.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놀이족’의 성지 ‘플레이스 캠프 제주’를 만든 놀이족장 김대우 총괄매니저.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빌라선샤인(villasunshine)’에는 특별한 부족이 산다. ‘뉴먼(Newomen)족’이다. New와 Women의 합성어로 ‘적극적’이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두려움이 없고’ ‘외롭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 출생)의 ‘일하는 여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뉴먼족’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자격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자신의 일과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내 영향력을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 미래를 조금 먼저 사는 사람,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고 나누며 동료의 참조점이 되는 사람, 그동안 ‘여성들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일컬어지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뉴먼족이 모여서 고민을 나누고 서로 배우는 곳이 ‘빌라선샤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서로에게 배운다’이다. 이들은 다른 종족들의 성공 방식보다 동족의 문제해결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롤모델’을 찾기보다 동족들의 고민과 경험을 공유하고 그를 통해 함께 성장하기를 원한다. ‘일하는 나에게 필요한 포트폴리오’ ‘작은 조직에서 행사를 기록하는 법’ 등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도 하고 ‘나만의 유튜브 성장공식 찾기’ ‘조식처럼 가볍게 주식’ 같은 모임을 제안해 함께 답을 찾아나서기도 한다.

이들의 연대는 끈끈하지 않지만 단단하다. 각자의 사생활은 모르지만 일로는 언제든 연결되고 협업이 가능하다. 이들은 서로를 ‘일터 밖 동료’라고 부른다. 이들을 이끄는 뉴먼족장은 홍진아 대표이다. 홍 대표는 글로벌 비영리조직, 공공기관, 스타트업을 거치면서 남자 직원들은 의사결정권자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에 비해 여자 선배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미래도 마찬가지일까. 지속가능하게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끝에 홍 대표가 찾은 결론은 혼자서 유리천장을 깰 것이 아니라 함께 운동장의 기울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서로 선배가 되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이다.

제주 성산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호텔 같지 않은 호텔이 있다. ‘플레이스 캠프 제주’이다. 이곳은 생기자마자 제주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특히 좀 놀 줄 아는 사람은 꼭 가봐야 하는 ‘놀이족’의 성지가 됐다. 건물이 특별한 것도, 객실이 넓고 화려한 것도 아니다. 학교 같은 건물에다 객실은 노출 콘크리트 벽의 좁은 공간에 철제 프레임 침대가 전부이다. 냉장고도 TV도 없다. 호텔이 아니라 감옥 같다는 사람도 있다.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당신은 ‘놀이족’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곳을 찾는 ‘놀이족’ 중에는 한 번 왔다 반해 수십 번을 온 사람도 있고, 놀러 왔다 아예 직원으로 눌러앉은 사람도 있다.

플레이스 캠프는 호텔이라기보다 플랫폼 같은 곳이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영화, 공연, 전시, 토크 콘서트가 이어지고 맥주 페스티벌, 자전거 페스티벌, 플리마켓이 열리는 등 이곳에서는 매일이 축제였다. 요가, 커피, 쿠킹 등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할 수도 있고, 제주 지역의 업체와 연계해 액티비티를 즐길 수도 있다. 숙박을 중심으로 먹고, 마시고, 놀고, 액티비티를 즐기고,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인 셈이다.

이곳을 만든 ‘놀이족장’은 김대우 GM(총괄매니저)이다. 그는 40대가 되기 전 이직을 8번이나 했다. 더 늦기 전에 내 사업을 하자고 생각한 그의 눈에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똑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하는 ‘런(run)’의 시대가 아니라 재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플레이’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놀고먹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2017년 ‘플레이스 캠프 제주’를 만들고 놀이족장을 자처했다.

개인의 시대를 지나 다시 부족의 시대로

새로운 부족의 시대이다. ‘뉴먼족’ ‘놀이족’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신(新)부족들이 탄생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일찍부터 개인주의의 종언을 고하고 인류는 부족의 시대로 돌아간다고 전망했다. 근대 이전이 공동체사회, 근대가 개인의 시대였다면 현대의 대중사회는 소집단들로 뭉치며 다시 부족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담론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그의 이론은 30여년이 지나 2020년 한국에 가장 유효한 예언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마케팅 구루로 꼽히는 세스 고딘의 주장은 더 명쾌하다. 올해 초 국내에 출간된 ‘Tribes(부족)’라는 책을 통해 세스 고딘은 이제 세상의 새로운 단위는 ‘부족’이라고 단언한다. 새로운 부족의 탄생은 성공의 기회로 연결되고, 부족을 이끄는 리더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마페졸리, 고딘이 말하는 부족은 혈연, 지연으로 묶인 부족이 아니다. 취향, 취미 등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연대하는 소집단을 이른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했던 생존 메커니즘은 부족에 소속되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인간의 DNA에는 마음 맞는 사람끼리 부족을 이루려는 욕구가 새겨져 있다. 그 본능이 현대에 와서 인터넷을 도구로 폭발한 것이다. 세스 고딘은 부족이 되기 위한 두 가지 필수요건으로 공통의 관심사와 소통 방법을 꼽는다. 한 사람이 한 부족에만 속하지는 않는다. 디지털화된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쪼개 다양한 부족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가능해졌다. 세스 고딘은 이들 부족은 족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부족을 찾아내거나 부족을 만들고 이끌려고 한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말한다. 직원이나 매니저처럼 습관에 붙들려 있지 말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기회를 찾아나서라고 부추긴다. 족장이 되려는 의지만 있다면 시장은 널려 있다는 것이다. 세스 고딘은 하나의 부족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부족원은 1000명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1명의 열성 부족이 최소한 3명의 부족을 데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이 과거에는 광고와 동의어로 사용됐지만, 오늘날의 마케팅은 부족과 관계를 맺고 스토리텔링에 상품과 서비스를 얹어 부족들에게 퍼뜨리는 것이다.

‘뉴먼족장’ 홍진아 빌라선샤인 대표. 뉴먼족은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여성들이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뉴먼족장’ 홍진아 빌라선샤인 대표. 뉴먼족은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여성들이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플렉스족, 애슬레저족, 운동족, 취미족…

무명 래퍼에서 한순간에 수십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힙합 유튜버가 된 ‘염따’는 ‘플렉스족’의 족장이다. 돈 자랑을 뜻하는 ‘플렉스’를 염따는 일종의 놀이로 만들고, 이를 따르는 부족을 만들어냈다. 염따는 “돈은 모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쓰라고 있는 것”이라고 외친다. 라면에 금가루를 뿌리고, 돈뭉치를 들고 가 명품시계를 사고, 자신의 생일선물로 수억원짜리 자동차 선물을 하는 것을 유튜브로 방송하면서 무심하게 “플렉스 해버렸지 모얌”을 외치는 그를 보고 부족들은 환호한다. “돈 걱정 없이 펑펑 쓰고 싶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대리만족시킨 것이다. 그의 ‘플렉스’는 부족들의 ‘플렉스’로 이어졌다. ‘Flex’ 글자를 새긴 염따의 후드티는 3일 만에 20억원어치가 팔렸다. 택배 포장에 지친 염따가 “제발 그만 사라”고 호소를 해야 할 정도였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 광고에까지 ‘플렉스’를 등장시킬 만큼 그는 ‘플렉스’ 부족의 영역을 넓혔다.

이처럼 부족은 팬덤과 일정 부분 겹치기도 한다. BTS를 키운 아미는 강력한 팬덤이 만든 거대한 글로벌 부족이다. 애슬레저(운동+여가)족을 잡은 요가복 브랜드 ‘안다르’ ‘젝시미스’는 팬덤이 만들어지며 수백억원대 매출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인플루언서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 브랜드를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

온라인 커뮤니티, 취향 공동체도 부족사회의 한 단면이다. 멤버십 커뮤니티 ‘넷플연가’는 넷플릭스 영화를 함께 보고 영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거나 영화 속 장면을 따라 해 보는 소모임이다. ‘버핏서울’은 ‘운동족’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운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그룹으로 묶어 함께 모여서 운동할 수 있도록 한다. ‘클래스 101’은 비대면 시대 집콕하는 ‘취미족’에게 준비물까지 챙겨 집으로 보내주는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이다. 이런 부족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부족들은 점점 세분화하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19는 다양한 언택트 부족을 낳았다. 홈트족(집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홈바족(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 홈밥족(외식 대신 집에서 식사하는 사람들), 집꾸족(집 꾸미는 사람들), 집콕족 등이다. 홈트족을 위해 온라인으로 트레이닝을 해주고, 홈밥족을 위해 반찬 정기구독 서비스를 내놓는 등 이들 부족을 잡기 위한 전투도 치열하다.

신부족의 출현을 진화가 아닌 사회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홍진아 빌라선샤인 대표는 “부족은 문제해결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안전과 자급자족을 위해 부족이 만들어졌다면, 현재는 개인이 혼자 문제를 풀 수도 없고, 가족이 풀어줄 수도 없다 보니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가족, 사회변화 때문에 더 많은 부족이 필요해진 시대”라는 것이 홍 대표의 생각이다. 뉴먼족의 소통도구인 메신저 ‘슬랙’의 게시판에는 부족들이 올린 정보성 메시지가 일주일에 수천 개씩 올라온다. 다양한 분야의 정보들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다.

김대우 GM은 부족의 출현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외로움’을 꼽았다. 김 대표는 “가족도, 회사도, 학교도 커뮤니티로서 충족을 시켜주지 못한다. 회사 가면 위아래 눈치봐야 하고, 신모계사회에서 남자들은 설 자리가 없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못 해준 것을 찾아나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족장의 조건

스마트폰을 신체처럼 사용하는 신인류를 분석한 책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를 쓴 최재붕 성균관대 교수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인류는 10만년 이상을 부족사회로 살아왔다. 뜻 맞는 사람끼리 만났을 때 즐거운 끼리끼리 문화를 DNA가 알고 있다. 과거에는 동네 부족이 그 역할을 했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인 다양성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새로운 부족사회를 만들어 문화를 즐기고 소비를 즐기면서 그 다양성이 폭발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다양성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이 사회를 바로 바라볼 수 있다. 거기에 맞춰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부족을 이끌 족장의 조건은 뭘까. 김대우 GM은 “족장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홍진아 대표는 “부족의 확장과 부족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이 크다”면서 “이걸 꼭 내가 해야 하는 이유”가 중요한 질문의 지점이라고 말했다.

세스 고딘은 족장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단 두 가지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힘이 커졌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산업 전체를 바꿀 수도 있고 과학, 정치, 기술을 재창조할 수 있는 시대이다. 두 번째는 변화에 대한 가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기준은 사람들이 현재 상황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되었고 그 시스템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몰아 매장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이니 이단자가 되라는 것이 세스 고딘의 말이다. 다시 말해 ‘성실한 모범생’보다 ‘혁신적인 또라이’가 돼야 한다. “이메일, 페이스북, 밋업, 줌, 슬랙, 인스타그램 등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새로운 도구와 수많은 부족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안정성과 빨리 작별할수록 커다란 기회가 온다”는 그의 조언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있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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