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항해술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뜬금없는 질문 같이 들릴지 몰라도 해양국가 가야의 행보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이해하는 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야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전체를 봐도 고대 항해술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드물다. 배의 규모에 대한 기록들은 있지만 속도에 대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에도 다른 사회의 예에 준해서 보자.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역 해양 강국에서 많이 사용했던, 3단의 노 젓는 파트를 갖춘 트리레메 쾌속선. 출처: Public Domain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역 해양 강국에서 많이 사용했던, 3단의 노 젓는 파트를 갖춘 트리레메 쾌속선. 출처: Public Domain

서기 1세기, 가야가 해양국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바로 그 시기에 활동했던 저술가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 ‘자연의 역사’에서 당시 로마제국의 상선들 속도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 배들은 시속 9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나왔던 듯하다. 노 젓는 부분이 3단이나 되는 쾌속선, 트리레메(trireme)를 타고 로마의 외항이었던 오스티아에서 아프리카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까지 가는 데 단 이틀밖에 안 걸렸다고 흥분해서 쓴 대목도 있다. 계산해보면 시속 12킬로미터가 좀 넘는 정도니까, 요즘 도시에서 안 막히는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속도보다 느리다.

이 책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지금까지도 고대 사회 배의 속도는 시속 8~9킬로미터 정도라고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배는 속도 면에서 내세울 만한 건 아니다. 남의 나라 육지를 거쳐 바다로 나가는 길로서는 서쪽으로 영국, 동쪽으로 인도까지 진출했지만, 기본적으로 로마에서 제작된 배들의 무대는 지중해였다. 지난 기사 “철의 왕국 가야의 전혀 다른 두 얼굴”(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624100030&ctcd=C01&cpage=1)에서 보았듯이,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는 온난기엔 지중해의 유일한 관문인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서양의 물이 세차게 들어오기 때문에, 동력 없이 그 물살을 거스르고 열린 바다로 나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땅으로 둘러싸인 지중해 안에서는 바람도, 바닷물의 움직임도 잔잔한 편이다. 그런 바다를 오갔던 로마제국의 배는 주로 식민지로 군사를 비롯한 사람을 나르고 본토로 식량, 자원, 노예 등을 실어오는 데 쓰였다. 또 노예가 충분해서 동력의 상당 부분을 노 젓는 인력에 의존했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배는 사람과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장거리를 뛰기에 적합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땠을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해류와 바람을 이용, 쉽게 바닷길로 이동하는 노하우를 쌓아왔고 고대의 항해사들은 그걸 활용할 줄 알았었다. 유라시아 및 남 〮북미 대륙 해안가, 그리고 태평양 도서지역의 배는 크기가 작고 허접해보여도, 로마제국의 배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먼 거리를 다녔다. 예를 들면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하와이 원주민의 돛 달린 6인승 카누는 근해에서 시속 5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낸다. 태평양 도서 지역의 카누도 비슷했을 텐데, 근대화 되기 이전, 이들은 한 번 항해에 수천 킬로미터 뛰기가 예사였다.

동아시아는 어땠을까? 유럽이 문명을 주도해왔던 근현대기 끝자락에 사는 우리는 항해술에 있어서도 고대 유럽이 아시아보다 훨씬 선진지역이었을 거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곤 한다. 하지만 근대 후기 이전엔, 적어도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아시아가 유럽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자랑해왔다. 15세기 초엽 명나라 정화의 배와 그보다 60년 뒤인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배를 비교한 그림은 너무나 유명하다.

1420~30년대 명나라 환관 정화가 해양원정을 나설 때 이용했던 배(후면)와 1490년대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가 이용했던 산타마리아 호(전면)의 규모 비교 그림. 미국의 저술가/삽화가 존 애드킨즈John Adkins의 1993년 작. 출처: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Zheng-He-and-Columbus-illustration-by-Jan-Adkins-1993_fig2_48802094
1420~30년대 명나라 환관 정화가 해양원정을 나설 때 이용했던 배(후면)와 1490년대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가 이용했던 산타마리아 호(전면)의 규모 비교 그림. 미국의 저술가/삽화가 존 애드킨즈John Adkins의 1993년 작. 출처: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Zheng-He-and-Columbus-illustration-by-Jan-Adkins-1993_fig2_48802094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는 기후 및 지리적 조건에서도 항해에 유리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연안에 작용하는 대규모 해류 및 그 지류를 이용, 아라비아 반도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연해주도 지나 캄차카 반도에 이르기까지, 양방향으로 수월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 또한 바다와 육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근해에서도 강한 바람이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으로 불고 있다. 기후가 따뜻한 편이어서 대체로 어느 시기에나 연중 바다를 이용할 수 있었을 테다.

동아시아에선 어떤 지역이 항해술에서 앞서 있었을까? 아무래도 일본이 바다로 둘러 싸인 만큼 제일 많이 해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차원, 즉 한 〮중 〮일을 무대로 한 해양 교류라면, 한반도가 단연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갖는다. 장거리 항해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해류의 패턴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양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왼쪽: 동아시아 해류 분포도, 오른쪽: 해류를 이용한 한반도 주변 바닷길 및 거기서 양쯔강으로 이어지는 루트. 검은 원은 산둥반도와 옹진반도 사이의 좁은 바다를 표시. 제공: 이진아
왼쪽: 동아시아 해류 분포도, 오른쪽: 해류를 이용한 한반도 주변 바닷길 및 거기서 양쯔강으로 이어지는 루트. 검은 원은 산둥반도와 옹진반도 사이의 좁은 바다를 표시. 제공: 이진아

위 왼쪽 해류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한반도 연안에서는 쿠로시오 난류와 리만 한류의 지류들이 연해주,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즉 동서남북으로 아주 편리하게 연결해주고 있다. 해류 패턴으로 볼 때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는 연안을 벗어나 동아시아 중심부로 오기 쉽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쿠로시오 난류가 한반도 서해안으로 움직이면서 한국연안 난류가 되고, 그것이 발해만을 돌아 내려오면서 중국연안 한류가 되는 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발해만 아래쪽으로 중국 대륙 쪽에선 산둥반도가, 한반도 쪽에선 황해도의 옹진반도가 돌출해 있어서 바다 폭이 좁아지므로 한국 연안류에서 중국 연안류로 갈아타고 양쯔강 하구 쪽으로 가기가 대단히 용이한 지리적 조건이다. (실제로 이 위치에, 기후변화 온난기였던 고려시대, 수도 개성의 외항이며 중국과의 교역을 기본으로 하는 국제항구였던 벽란도가 있었다.)

위 오른쪽 지도는 부여 중심부에서 출발, 쑹화강과 아무르강을 타고, 연해주에서 가야까지 올 정도의 항해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음 수순으로 어디까지 갔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해류의 방향으로 미루어볼 때 서해안을 따라서 황해도 옹진반도 부근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산둥반도를 거쳐 양쯔강으로 진출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옹진반도에서 산둥반도를 거쳐 양쯔강 하구까지 거리는 해로 약 1000킬로미터 정도다. 가야 배의 속도를 로마 상선과 하와이 카누의 중간 정도 속도인 시속 30킬로미터로 잡는다 하더라도, 33시간, 즉 배타는 시간만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아무르강 하구에서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김해까지 오는 해로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다른 말로 하면, 최첨단 제철 기술을 앞세운 가야가 한반도 남서 해안은 물론 중국 양쯔강 유역의 일부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비현실적이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 그렇게 판단할 다른 근거도 있다.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가야 건국 시점에서 한반도 남쪽에는 강한 국가가 없는 상태였지만, 중국에는 한나라가 이미 기원전 202년에 양쯔강 지역까지 통합한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만하게 이방인에게 노른자 땅을 내주었을까?’ 이 문제와 앞서 말한 다른 근거에 대한 부분, 다음 회에 이어서 보기로 한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