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 인근 양쯔강 중류. ⓒphoto 위키피디아 CC
우한 인근 양쯔강 중류. ⓒphoto 위키피디아 CC

가야가 기원전 1세기 전반에 건국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네 번째 근거는 가야가 양쯔강 중류에 안정적으로 영토를 확보, 경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이 추정을 정리해보자.

'가야는 서기 42년이 아니라, 그보다 1세기 이전인 기원전 54년보다도 앞서 건국됐으며, 초대 수로왕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것보다 더 오래 전 사람이다. 그는 광활한 범위에 걸쳐 영토를 개척했는데, 거기에 양쯔강 중류, 지금의 우한(武汉) 일대가 포함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가야는 약 250년간 존속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른 내용의 추정이지만, 견고한 근거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에 발굴된 유물, 고(古)지질학적 발견, 고(古)천문학적 분석 등 현대과학의 힘으로 밝혀진 과거의 실제 상황이 토대가 된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여러 사람의 붓끝을 거치면서 옮겨진 것이 아닌, 왜곡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객관적인 자료로 인정받는 근거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추정하면 가야에 관해 그동안 제기됐던 의문점들이 대부분 풀린다.

과학적으로 재구성돼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적 팩트’이지만 얼른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반도 남해안에서도 동쪽에 치우쳐 있는 김해와, 중국 대륙에서도 내륙 깊숙이 들어가 있는 양쯔강 중류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 때문일 테다. ‘그 넓은 범위를 다 포괄하는 게 가야의 영토였다고?’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해상활동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국가들은 육지에서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들과 전혀 다른 영토 구성방식을 갖는다. 다음 지도를 보자.

기원전 550년 경 지중해 판도. 해양국가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영토 모양새는 육지형 국가인 페르시아나 리디아 등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photo 퍼블릭 도메인
기원전 550년 경 지중해 판도. 해양국가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영토 모양새는 육지형 국가인 페르시아나 리디아 등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photo 퍼블릭 도메인

위 지도는 기원전 550년 무렵의 지중해 판도를 표시한 것이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페니키아와 파란색으로 표시된 헬라스에 주목해보자. 페니키아는 세계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해양국가로 꼽히는 나라이며, 헬라스 역시 소문난 해양국가인 그리스 및 그 식민지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들의 영토 모양새는 이집트, 페르시아, 리디아, 트라키아, 에트루스카 등 육지의 영토에 기반을 둔 국가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육지형 국가는 보통 하나의 중심지에서 퍼져나가는 영토의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그 땅에서 농사를 근간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며, 국경 너머 멀리 떨어진 곳에 같은 나라의 땅이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해양국가는 배를 타고 교역을 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해안을 따라 적절한 협력 거점이 있는 곳에 영토를 형성한다. 그러다 보니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게 보통이고 본토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도 한 국가로서 정체성을 공유한다. 심지어는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그리스 도시 다프나에처럼, 남의 나라 가운데 섬처럼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리스보다도 육지 기반이 좁아, 가야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던 해양국가 페니키아의 예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보자. 페니키아는 기원전 25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약 2000년 동안이나 존재했던 국가이다. 본토는 수로왕의 표현을 빌자면 “여뀌잎처럼 좁은” 땅이었다. 지금 레바논 해안가에 위치한, 남한 면적의 4분의 1도 안 되는 지역이었고, 그나마 몇 개의 도시국가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전성기 페니키아는 고대사회 최대의 영토를 누렸던 해양족으로 2000년 이상 이후에 나왔던 로마보다도 훨씬 더 넓은 활동 범위를 가졌다. 문자, 기술, 예술 등 다방면에서 유럽 및 서아시아 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페니키아는 오랜 세월 동안 신화 속 나라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자체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주변 경쟁 집단들의 단편적인 기록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페니키아에 대한 기록 및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그 탁월한 해양제국으로서의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폼페우 파브라 대학교 교수 마리아 유제니아 오비트 박사는 페니키아의 성장 동력을 두 가지로 꼽는다. 하나는 항해술, 또 하나는 상술이다. 페니키아는 전 세계가 탐낼 만한 고부가가치 자원을 막대한 양으로 갖고 있었는데, 배를 타고 이것을 전세계에 팔면서 큰 부자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자원은 바로 페니키아의 동쪽 배후지인 레바논 산맥에서 나오는 유명한 레바논 삼나무였다. 굵고 곧은데다 단단하고 향긋한 이 나무는 잘 썩지 않아 다윗왕의 궁전에서 이집트의 배까지, 고대 사회에서 돈 있고 힘 있는 곳에 빠지지 않았던 고가의 목재다. 또 페니키아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아 목재 외에도 직물, 공예품도 만들어 비싼 가격에 팔았던 것 같다. 알파벳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페니키아 문자를 쓰고 있었고, 부기•계산법 등 상업 경영에 필요한 기술도 발달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왼쪽) 페니키아의 본토와 교역로. 주황색 선이 페니키아의 교역로, 작은 사각형 부분이 본토와 그 인근이다. (가운데) 왼쪽 작은 사각형을 확대한 페니키아 본토의 지형 및 연맹국 위치. 두 줄기의 산맥이 바다에 연해 있는 기슭의 좁은 땅에 도시국가들이 연립해 있다. (오른쪽) 레바논 삼나무로 유명했던 레바논 산맥 전경. 뒤쪽의 헐벗은 거대 산지가 과거에는 모두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다.
(왼쪽) 페니키아의 본토와 교역로. 주황색 선이 페니키아의 교역로, 작은 사각형 부분이 본토와 그 인근이다. (가운데) 왼쪽 작은 사각형을 확대한 페니키아 본토의 지형 및 연맹국 위치. 두 줄기의 산맥이 바다에 연해 있는 기슭의 좁은 땅에 도시국가들이 연립해 있다. (오른쪽) 레바논 삼나무로 유명했던 레바논 산맥 전경. 뒤쪽의 헐벗은 거대 산지가 과거에는 모두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다.

페니키아는 좁은 국토에서 출발해서 해상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가며 대제국으로 성장해갔다. 국토가 좁고, 가치가 높은 자원이 많으며, 배를 만들 나무가 충분하고, 풍부한 항해 및 교역의 경험이 있다면 누구라도 택했을 만한 국가전략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해상 루트 중간중간에 위치한 협력 집단이었다. 고대 동아시아 내에서도 어느 구간에서는 그랬겠지만, 지중해역을 왔다 갔다 하는 배들은 주로 육지가 보이는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다. 밤에 쉬어가며 물, 사람, 물자를 보충하거나 교환할 파트너 항구가 꼭 필요하다. 잔잔한 만에 자리 잡은 조건이 좋은 항구라면, 그리스나 페니키아 같은 해양족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 과정은 비교적 평화적이었던 것으로 요즘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바다를 끼고 생활해야 하는 지중해 국가들 사이에서는 크고 튼튼한 배가 바로 국력을 말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배를 만들게 해주는 목재는 어디서나 환영 받았을 테니 말이다. 기꺼이 페니키아의 파트너 도시가 되려 하는 곳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가야를 돌아보자. 좁은 국토이지만 고대 사회, 특히 흉년과 분쟁이 잦았던 시기에 꼭 필요한 소재인 철과 구리가 인근에서 풍부하게 나고, 그것을 제련할 첨단 노하우를 가진 집단과 결합했다. 그 집단도, 남해안 동부 지역에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었을 토박이 집단도 뛰어난 항해 노하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백두대간 바로 밑에 위치해 배를 만들 수 있는 목재를 대주는 삼림이 무성했다. 또한 농토가 적어 ‘부’를 획득하려면 교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가야도 페니키아와 같은 국가 전략을 택하지 않았을까? 해안가 요충지를 따라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 줄 집단을 찾아 거점을 확보해가며 멀리, 더 멀리 항해하면서 그만큼 더 커지는 교역의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다만 가야의 경우, 페니키아보다는 녹녹치 않은 상황 여건이 있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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