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이면 항구. 위키피디아 CC
카르타고의 이면 항구. 위키피디아 CC

우한, 그리고 김해. 하나는 중국 대륙 양쯔강 중류에, 하나는 한반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다. 얼핏 보아선 두 도시 사이에 특별한 관련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직선거리로 2000 km 이상 떨어져 있고, 하나는 내륙에 하나는 해안에 위치해 있어 경관도 상당히 다르다. 도시 규모도, 그 배후지인 평야지대 면적도 우한 쪽이 압도적으로 크다.

김해시(오른쪽)와 우한시(왼쪽)의 위치와 경관 제공: 이진아
김해시(오른쪽)와 우한시(왼쪽)의 위치와 경관 제공: 이진아

이 두 도시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고(古)천문학의 세계적 권위자 박창범 한국고등교육원 교수가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한 한 장의 지도다. 이 지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201년까지의 일식 기록을 분석한 결과 그 일식 현상들이 예외 없이 우한 일대에서 관측된 것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당시 신라와 가야의 해양활동 수준과 신라본기의 서술 구조로 볼 때, 그 일식 관측 기록은 신라가 아니라 가야가 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가야인이 적어도 그 260년간 우한에서 활동했던 게 아닐까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 가지 정황들이 맞아 떨어진다. 일단 김해와 우한은 둘 다 고대 온난기에 해양국가로 크게 발전할 만한 지형적 특성을 갖고 있다. 육지를 통한 길은 다른 지역과 적절히 차단되어 있고, 바다로 가는 길은 큰 강으로 열려 있으며, 비옥한 평야가 존재했다. 평야에 영양물질을 대주고, 그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에게 배를 만들 목재를 대주는 울창한 삼림이 테를 두르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천문관측이 행해져 기록에 남겨진 장소는 주로 도성(都城) 등 국가 중심지였다는 점을 감안해보자. 가야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우한에서의 천체 관측 기록이 일관된 것으로 보아, 가야는 그 260년동안 그곳을 거의 도성에 맞먹는 중심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고대 해양국가에는 그런 식으로 국가의 무게 중심이 옮겨지는 예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고대 사회의 대표 해양국가 페니키아의 경우가 그렇다. 페니키아 연맹국 중 하나인 레바논 해안의 작은 도시 ‘티레’는 기원전 9세기 경, 역시 본토에서 약 2000km 떨어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에 새로운 영토를 구축했다. 700년 정도 그곳을 중심으로 교역활동을 전개했다. 본토인 티레는 작은 항구도시였지만 카르타고는 한창 때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며, 로마보다도 더 넓은 해외 영토를 갖고 있었다.

전설이 있으면 과거 인간 집단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왼쪽은 전설 속 카르타고 건국주, 페니키아 연맹국 티레에서 온 디도 여왕이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독일 화가의 그림. 오른쪽은 제우스 신의 아내 헤라 여신의 보복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쳐 온 그리스 공주 이오와 그를 받아들이는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표현한 기원전 1세기 폼페이 벽화. 둘 다 본토와 새 영토 사이의 관계가 긍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출처: 퍼블릭 도메인
전설이 있으면 과거 인간 집단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왼쪽은 전설 속 카르타고 건국주, 페니키아 연맹국 티레에서 온 디도 여왕이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독일 화가의 그림. 오른쪽은 제우스 신의 아내 헤라 여신의 보복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쳐 온 그리스 공주 이오와 그를 받아들이는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표현한 기원전 1세기 폼페이 벽화. 둘 다 본토와 새 영토 사이의 관계가 긍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리스 역시 본토에서 약 1000km 떨어진 이집트 나일 강 하류에 ‘다프나에’라는 그들의 도시를 갖고 있었는데, 이집트와의 교역이 활발했을 때는 본토보다 훨씬 번성하던 경제중심이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중해 국가들에 결코 밀리지 않는 해양 활동 수준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면, 가야가 좁은 국토에서 출발, 더 너른 터전인 우한까지 가서 활동의 주무대로 삼았다 해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 더 구체적인 팩트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확인할 도리가 없다. 예를 들면 ‘가야와 우한의 원주민 집단은 어떤 관계였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고대 온난기 해양국가들의 관계 맺음은 근대기 유럽 등의 무력 정복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온건하고 다양한 패턴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페니키아 연맹국 티레는 카르타고를 무력 정복하지 않았다. 엄청난 경제력으로 땅을 사고 계획도시를 건설해서 자신들의 교역 기지로 만들었다. 그 과정은 다양한 문건에서 티레의 공주 디도가 카르타고에서 멋진 신세계를 건립해서 여왕으로 군림하는 전설로 남아 있다. 원주민들도 요즘 개념으로 치면, 고용기회가 증대되고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을지 모른다.

이집트 안의 그리스 도시 다프나에는 기원전 7세기 이집트 프사메티쿠스 왕이 자신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나일강 삼각주 위의 땅 한 자락을 떼어 주어 그리스인들의 자치지역으로 삼게 했던 곳이다. 그 이전에 이미 이집트 땅 이곳저곳에 그리스인 교역 공동체가 있었다. 이집트로서는 이들을 한 군데 모아놓는 편이 관리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물론 기원전 2세기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했을 때처럼, 그 너른 땅을 초토화하고, 풀 한 포기 자라나지 못하도록 소금을 흠뻑 뿌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 온난기 해양국가들의 관계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패턴에 속한다. 해양국가들은 대체로 기반 육지가 협소하고, 긴 해로를 항해할 때 쉬어갈 곳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슷한 조건의 다른 해양국가들과 평화적인 파트너쉽을 맺었을 거라는 게 유럽 해양사가들의 견해다. 동아시아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지형 국가들이 인접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특히 기후변화 한랭기에 접어들면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생산성이 높은 땅을 노린 영토 분쟁이 잦아지게 된다. 이럴 때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는 것은 대체로 그 땅에 원래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거나 노예로 삼아 농사를 지어 바치게 하는 강압적 정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가야인이 우한에 터전을 잡았던 방식도 호혜적 공존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 우한 자체가 오랜 역사를 지닌 인구 밀집지대여서, 강압적 정복이 있었다면 저항도 만만치 않았을 테다. 먼 곳에서 온 가야가 그렇게 무력으로만 다스렸을까.

가야와 우한은 철의 생산과 교역 활성화를 위해 서로 손잡은 게 아닐까? 가야가 이 시대 동아시아에서 선도적 철기 제작 집단이었던 것은 여러 가지 유물과 기록으로 명확해 보인다. 우한 일대 역시 중국에서 가장 앞서 가는 제철 지역의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선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중국 대륙 최고 품질의 철을 만들고 있었다는 근거가 있다.

17세기 명나라 제철 작업장의 모습. 왼쪽 그림은 산화칼슘을 철광석과 섞어주는 작업. 철의 강도와 탄력성을 높이는 이런 공정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로 봐서는 가야가 가장 먼저 이용한 제철 노하우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17세기 명나라 제철 작업장의 모습. 왼쪽 그림은 산화칼슘을 철광석과 섞어주는 작업. 철의 강도와 탄력성을 높이는 이런 공정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로 봐서는 가야가 가장 먼저 이용한 제철 노하우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고대사회로서는 강도 높은 삼림 벌채와 노동력 착취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강제적 점령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 일본은 중국에 조공으로 ‘생구(生口)’, 즉 노예를 바치기도 했었다. 이렇게 지배 집단끼리 이해관계가 맞아 손을 잡고, 평민 이하 계급은 그 이해관계를 위해 노동력을 착취당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한까지 가는 양쯔강 물길을 따라 다른 파트너 도시나 식민지가 있었을까? 여기 대해서도 정황상 그랬을 거라고 짐작될 뿐, 확실한 것은 없다. 양쯔강 하구 바닷가에서 우한까지는 거리가 900km 정도다. 바다에서는 해류와 바람을 잘 이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바람 방향이 맞지 않으면 순전히 노를 젓는 인력으로 강 물살을 이겨내야 한다. 육지에서 하룻밤 쉬어가는 곳이 최소 두어 군데는 있어야 그 거리를 주파할 수 있었을 테다. 가야와 우한이 손을 잡고 철 생산과 교역을 하는 상황이었다면, 양쯔강 중하류에서 파트너 도시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우한 일대를 마치 제2의 도성처럼 쓰고 있는 동안에, 김해와 우한 사이에는 왕래가 꽤 빈번했을 것이며 그 규모도 컸을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주목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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