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지난 12월 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지난 12월 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7일 천주교 신부·사제·수녀 3900여명의 이름이 들어간 ‘검찰개혁 촉구 천주교 시국선언’ 명단 작성 과정에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수원교구 주교가 소속 교구 수도원 등에 서명 동참을 강요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천주교 내부에서는 주교회의 의장이 직접 수도원 등에 서명 동참을 요청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종교의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포함한 국내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 3951명은 지난 12월 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수도자 3951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주최 측은 이날 선언문에 국내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 1만7275명 중 3951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선언문에는 윤공희·김희중 대주교 등 전·현직 광주대교구장과 강우일 전 제주교구장, 이성효·김종수·옥현진 보좌주교 등 주교 6명도 이름을 올렸다. 반면 정진석·염수정 추기경 등 전·현직 서울대교구장과 이용훈 주교회의 의장은 명단에서 빠졌다. 하지만 주간조선 취재 결과 이용훈 주교는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소속 교구 수도원들에 서명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같은 교구에선 이용훈 주교 대신 이 주교의 보좌주교인 이성효 주교의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교 숫자는 대주교 포함 총 43명이다.

이번 명단에 포함된 수원교구 소속 수도원은 27곳(남녀 합산), 사제·수녀는 1500명 정도다. 전체 서명자 3900여명 중 38% 정도를 차지한다. 현재 한국 천주교 주소록에 나와 있는 수도원 전체 숫자(750개)를 기준으로 하면 수원교구가 천주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6% 정도이다. 이번 서명에 참여한 수원교구의 사제 및 수녀의 숫자가 수원교구 규모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주교 내부에서는 이번 시국선언이 외부에서 봤을 때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용훈 주교의 수원교구가 주도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주간조선의 취재를 종합하면 이 주교는 시국선언 발표 4일 전인 12월 3일 소속 교구 수도원 여러 곳에 시국선언 서명 참여를 구두로 요구했다고 한다.<14쪽 사진 참조> 이에 요청을 받은 수도원 내부에서는 정치 현안 문제와 관련한 선언문에 서명을 하는 것에 대해 망설이다 일부 성직자들이 이를 신자들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시점으로 보면 이 주교의 이 같은 요청은 이번 시국선언을 주도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정제천 신부가 대검 한동수 감찰부장을 만난 이후다. 조선일보 12월 8일 자 보도에 따르면, 정 신부는 지난 12월 1일 대검으로 한 감찰부장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수도원에 대한 이 주교의 서명 지시를 주간조선에 확인해준 한 신부는 “직접 확인한 A수도원 이외에도 여러 곳에 시국선언문 서명에 동참하라는 이용훈 주교 측의 요청이 있었다”고 말했다. 천주교 사정에 밝은 또 다른 인사는 “다른 종교와 달리 천주교는 상하 위계가 분명한 만큼 주교의 요구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며 “개신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가 상향식 의사결정으로 시국선언이 이뤄졌다면 천주교는 하향식으로 의사가 전달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용훈 주교 ⓒphoto 뉴시스
이용훈 주교 ⓒphoto 뉴시스

지시받은 수도원 망설이다 일부만 서명

따라서 이번 선언문 발표를 천주교 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가까운 신부들이 조직적으로 주도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사들도 있겠지만 선언문 작성과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이나 여권 인사들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도한 정황은 여러 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문 대통령도 천주교 신자이다.

앞서 한 감찰부장과 만난 정제천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에다 여권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 사제로 알려져 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을 두고 검찰 내에서는 “윤석열 총장 비난 성명에 대한 사전 논의를 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정 신부는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한동수 부장과는 신부, 신자의 관계로, 이런저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정말 열심히 사시고 진실한 분”이라며 “내가 대검 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고, 한 부장이 초대를 해주어서 (대검에) 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정 신부는 또 “한동수 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윤 총장 비난) 성명 관련 얘기를 나누지 않았느냐”는 질문엔 “전혀 관련성이 없다” “(성명 관련) 서명운동을 한다는 것을 그(한 부장 만남) 뒤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정 신부는 12월 7일 발표된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다. 정 신부는 이번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성효 주교(이용훈 주교의 보좌주교)와 서울대 동문으로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훈 주교는 김희중 광주대교구 대주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친한 대표적 인사로 꼽힌다. 특히 그는 과거 우리들병원 불법대출 사건에 연관된 사업가 신혜선씨의 신한은행 사문서 위조사건 당시에도 이름이 거론된 바 있다. 이 주교는 2016년 총선 직전 신씨를 통해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소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 주교는 신한은행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박수현 당시 대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신씨는 지난해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16년 20대 총선 직전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와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가 만난 자리에서 신한은행 측 때문에 일어난 문제를 풀어주라는 대화가 오갔다”며 “2017년 마티아(이용훈 주교의 세례명) 주교님이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방문을 받았을 때 동행한 천주교 신자인 박수현 당시 청와대 대변인에게도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친서를 문재인 대통령께 전달토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주교는 해당 언론에 신씨와 관련한 청와대 청원에 대해선 인정하면서도, 총선 직전 신씨의 소개로 문재인 전 대표와의 3자 면담이 이뤄진 것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주교는 “신자들의 탄원서 전달은 종종 있는 일”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2016년 이 주교가 문재인 전 대표를 만난 이후 20대 총선 직전 주말에 수원교구가 주도한 세월호 추모미사가 열렸는데 이 미사에는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김수경 우리들리조트 회장 등이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수원교구 소속 한 사제가 같은 교구 소속 신도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
수원교구 소속 한 사제가 같은 교구 소속 신도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

2016 총선 당시 문재인 도운 주교들

이번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린 김희중 광주대교구 대주교는 이용훈 주교가 올 10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에 뽑히기 전까지 주교회의 의장을 맡아온 인물이다. 김 대주교 역시 2016년 총선 과정에서 신씨의 주선으로 문재인 전 대표를 만나 총선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대주교는 총선을 앞두고 문 전 대표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악화되어 호남 방문 자체를 못 하고 있을 때, 우호적 여론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김 대주교는 2018년 10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교황청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김 대주교는 교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지난달(2018년 9월) 25~28일 바티칸에서 열린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에 참석했다가, 피에트로 파롤린 국무원장을 만나 김 위원장의 의중을 전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 측도 2016년 총선 당시 천주교 측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은 지난해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혜선씨를 언급하며 “종교 관련해 많은 도움을 받은 바 있다” “선거 때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한 바 있다. 신씨는 이에 대해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양 전 원장이 언론에 먼저 종교계와 관련해 말한 부분이 바로 이용훈, 김희중 주교와 관련된 부분”이라며 “양 전 원장이 몇몇 언론에 종교와 관련해 이야기하면서 종교 문제를 정치에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이번 천주교의 시국선언을 진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주도한 것인지 의문을 표시하는 목소리도 있다. 천주교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현 정부 들어서 특정 현안에 성명서를 낸 것은 삼성의 이재용 경영권 승계 문제와 관련된 것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이 교계 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해졌는데 이번 문제에 다시 이름이 등장해 의아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그만큼 이번 명단 작성 과정에서 세 과시를 위해 많은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며 “검찰개혁 문제가 사제들이 나서서 시국선언을 해야 할 만큼 컨센서스가 이뤄진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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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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