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전. 59년 동안 남원 광한루원에 걸려 있다가 이당의 친일 논란 끝에 최근 철거됐다.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전. 59년 동안 남원 광한루원에 걸려 있다가 이당의 친일 논란 끝에 최근 철거됐다.

“광한루와 춘향전으로 먹고사는 동네예요. 이제 어디서 춘향을 만납니까.”(노문주 남원신문 발행인)

그렇게 서둘러야 했나. 전북 남원 광한루원에서 최근 ‘춘향’이 사라졌다. 남원시가 이곳 춘향사당의 영정을 떼어냈다. 59년 동안 걸려 있던 춘향이었다. 기품 있는 자태에 엷은 미소가 신비로웠다. 한국 대표 미인도였다. ‘한국의 모나리자’로도 불렸다. 그런 초상을 급히 철거한 것은 ‘친일 화가’가 그렸다는 오래된 이유에서였다.

이당 김은호(1892~1979). 순종을 그린 조선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였다. 화사한 채색, 유려한 필선에 묘사가 치밀했다. 신선, 화조(花鳥)와 함께 논개, 신사임당, 이율곡, 안중근도 그렸다. 춘향 영정은 애초 1939년 그림이었다. 서울 장안 기생조합의 어린 기녀(김명애)가 모델이었다. 그 초상이 6·25전쟁 때 훼손됐다. 이당이 똑같이 다시 그렸고 1961년 송요찬 내각수반이 남원에 기증했다.

이당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돼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김기창·이유태·장우성·한유동 등은 그로부터 그림을 배워 한국 화단을 이어갔다. 친일 논란은 이당이 1937년 총독부 ‘조선미전’에서 조선인 첫 ‘심사 참여작가’로 위촉된 뒤 시작된다. 그해 귀족·관료 부인들이 금비녀를 모아 군(軍)에 헌납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후 여러 국방기금 마련을 위한 작품전에 심사위원 등으로 참여, 전쟁에 협조했다는 게 그의 ‘친일 반민족행위’다.

춘향 그린 이당을 향한 오랜 비판

이당이 ‘친일 잔재 청산’ 회오리에 휩싸인 것은 노무현 정권 때였다. 2005년 5월 시민단체 회원 네 사람이 경남 진주의 논개 영정을 뜯어냈다. 사당 유리함을 망치로 깼다. 이당 그림이란 이유였다. 진주와 장수의 논개 영정은 2008년 교체됐다. 춘향 초상 철거 주장도 15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남원의 몇몇 시민단체가 재결속한 올여름 집회에서 이슈는 ‘왜색 춘향’이었다. ‘일본 기생 하루카(春香의 일본어 발음)’로 불렸다. 남원시는 지난 9월 제90회 춘향제를 열며 춘향 영정 없이 광한루에서 제향을 진행했다. 사당 영정은 그달 24일 철거됐다. 시민단체 간부는 “이번에 영정을 쉽게 떼낸 것은 문재인 정부의 친일청산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안을 세우고 철거하자는 의견은 집회 구호에 파묻혔다. 이당 그림 이전 1931년 봉안됐던 초상을 걸자고 시민단체가 주장했으나 작품 내력이 불분명하고 낙관도 없었다. 시는 “전문 용역 후 시민 의견을 들어 빠른 시일 내 새 영정을 봉안하겠다”고 했다. 남원신문 노 발행인은 그러나 “용역과 화가 공모, 새 그림 완성까지 2년은 걸릴 것”이라며 “철거를 미루고 국민 이벤트로 교체를 진행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당의 춘향 초상은 일제강점기 이후 3세대에 걸쳐 70년간 걸려 있었다. 남원의 얼굴이었다. 이 초상이 6·25 때 훼손됐다가 시민들의 청원을 받아 다시 그려진 점도 일부 장년들을 탄식게 했다. 이당은 “사정이 생겨 그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남원 읍민과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위촉해왔다”고 회고했었다. 그 유지들이 생존해 있다면 철거가 가능했을까.

‘지(智)는 수양의 깊이에 있고, 의(義)는 주고받는 일에서 드러난다(修身者智之符 取予者義之表)’(‘사기’)고 한다. 2005년 4월 전북 전주에서 있었던 ‘수당문(秀堂門)’ 현판 철거는 사마천의 편지를 떠올리게 했다. ‘수당’은 일제 때 경성방직 사장으로 삼양사를 창업한 김연수(1896~1979)의 호다. 수당문은 전주 종합경기장 정문이었다. 수당은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일제 때 국방헌금 기부와 학병지원 격려는 사후(死後) ‘친일 반민족행위’로 낙인찍혔다. 시민단체와 전주시장의 현판 철거 현장에서 삼양사 사람들은 눈물을 훔쳤다.

수당의 고마움을 잊은 수당문 현판 철거

신의는 고마움을 잊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수당문 현판은 그의 고향 전북이 그에게 감사를 표시한 정표였다. 전북은 1963년 첫 전국체전을 전주에 유치하며 메인스타디움과 여러 경기장을 세워야 했다. 덕진의 들판 16만5000㎡(5만평)를 매입해 종합경기장을 짓기까지 총 8600만원이 필요했으나 예산이 모자랐다. 극장 입장료 20원에서 2원씩 떼면서까지 성금을 모았으나 모두 240만원이었다. 그때 수당이 3000만원을 보냈다. 그는 종합경기장 정문에 호를 새기는 걸 사양했으나 지역에서 청했다고 전북일보는 전한다.

전북은 수당에게 한 번 더 고민을 안겼다. 도지사와 전주시장, 상공인들이 삼양사를 전주에 유치하기 위해 1960년대 중반 그를 또 찾았다. 그는 폴리에스터공장을 짓기 위해 원료 수입이 쉬운 울산에 부지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6·25전쟁 직후 울산 바닷가 갯벌과 갈대숲을 메워 설탕공장과 한천공장을 세운 터였다.(박정희의 울산공단은 수당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새 공장을 전주에 세우면 2억원이 더 든다. 그는 고향의 염원을 외면하지 못했다.(삼양사·‘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

일제 때 경성방직은 조선인의 첫 대기업으로, 오늘날 삼성과 같은 존재였다. 수당은 기업을 만주(남만방적)까지 진출시켜 조선인 1300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여공들은 근무 후 일터에서 매일 4시간씩 초·중등 수업을 받았다. 공장은 근로시간을 12시간에서 10시간으로 줄여줬다. 산업체 부설학교의 선구자 격이었고, 책임자가 건국 후 제5대 서울교육감을 지낸 최복현(1906~1979)이었다. 공장엔 병원도 두었다. 그곳 의사 김두종(1896~1988)은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장과 숙명여대 총장으로 일했다.

남만방적 노무과 교육담당 최복현은 애초 중앙고보 지리교사였다. 제자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우다가 1년 반 옥고를 치렀던 그를 수당이 거뒀다. 최복현에겐 1990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시아버지로 지난 11월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고 이기을 연세대 교수가 최 교사의 제자였다. 이기을 교수는 최 교사가 지도한 ‘5인 독서회’ 회원으로 50여일 수감됐었다. 이기을 교수는 독립유공자 기준(옥고 3개월 이상)이 완화돼 생전에 받지 못한 포상을 받았다. 그는 연희전문 입학 후 일본군 학병에 지원하기도 했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엔 수당의 ‘친일 행적’이 3쪽에 걸쳐 실렸다. 그의 고난과 성취, 굴욕과 헌신은 적혀 있지 않다. 말기에 일제는 광란의 군국(軍國)이었다. 수당의 형으로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고려대를 세운 인촌 김성수(1889~1955)도 사후 수모를 겪고 있다. 3·1운동은 인촌의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준비됐다. 인촌이 후원했다. 인촌은 도산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첫 헌법은 인촌의 계동 사랑방에서 고려대 교수 유진오가 초안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은 “인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헌신하며 공사가 뚜렷해 당대 존경받던 지도자”라고 증언했고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는 “인촌은 친일파로 불려도 무덤 안에서 ‘나라만 잘되면 난 괜찮아’라고 할 것”이라고 돌이켰다.

과거는 기록과 기억으로 구성된다. 권력은 기록뿐 아니라 생각까지 조작, 원하는 과거를 만든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조지 오웰·‘1984’) 인촌이 보성전문 교장으로 기고와 강연 등을 통해 징병과 학병 지원을 격려했다는 사실이 들춰졌다. 정부는 2대 부통령이었던 그의 사후 추서한 건국공로훈장을 2018년 박탈했다. 고려대 앞 ‘인촌로’는 작년 초 ‘고려대로’로 바뀌었다. 보성전문 학생이던 이철승(1922~2016)은 생전 “인촌은 ‘학부형으로부터 교육을 부탁받았지, 전장에 나가 싸우라는 부탁은 받지 않았다’며 학병 지원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미당 서정주(왼쪽)와 우리나라 첫 신소설을 쓴 이인직. 경기도 이천에 있던 두 사람의 문학비도 지난 11월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됐고 그 자리에 ‘친일 행적’ 표지석이 들어섰다.
미당 서정주(왼쪽)와 우리나라 첫 신소설을 쓴 이인직. 경기도 이천에 있던 두 사람의 문학비도 지난 11월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됐고 그 자리에 ‘친일 행적’ 표지석이 들어섰다.

건국공로훈장 박탈당한 인촌의 진실

편에 따라 진실이 다른 게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1860년대 ‘자본론’을 저술하며 20~60년이나 지난 산업혁명 초반 자료들을 당대의 것처럼 인용했고, 노동조건이 갈수록 나빠진다고 설명하기 위해 열악한 구식 공장에 집중했다. 또 불법으로 적발된 사례들을 일반화해 착취가 자본가의 기본 속성이라고 호도했다. 수십 년 동안 개선된 환경·인권·복지 데이터는 외면했다. 마르크스는 당대 영국 총리 연설까지 왜곡해 계급 갈등을 부추겼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도덕의 계시’를 ‘과학’이라고 우겼다.(폴 존슨·‘지식인의 두 얼굴’)

대통령이 ‘친일 청산’의 의지를 가다듬은 지난해 3·1절 몇 달 뒤 ‘한·일 경제전쟁’이 선포됐다. ‘일본 제품 NO’라는 현수막이 전국 거리에 나붙었다. ‘의병’과 ‘이순신 열두 척’으로 싸우겠다며 ‘죽창가’를 불렀다.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다짐했다. 그 전선이 몇 달 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동 뒤 묘연해졌다. 집권세력은 올가을 화해의 악수를 내밀었다. 도쿄올림픽에 맞춘 남북·미·일 정상회동 시나리오가 나왔다. 그럼에도 ‘친일 잔재 청산’은 유효한 국내 이벤트다. 권력자는 불만을 돌리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적’을 찍어주며 대중이 맘껏 증오케 한다.

지난 11월 경기 이천의 한 문학공원에선 첫 신소설을 쓴 이인직과 미당 서정주 문학비가 철거됐다. 세운 지 불과 17년 만이었다. 이인직 문학비엔 그가 이천 사람이란 긍지가, 서정주 문학비엔 국민 애송시 ‘국화 옆에서’가 새겨져 있었다. 풍물 공연을 곁들인 철거 첫날 퍼포먼스에선 ‘악질 문인’ ‘간악한 친일 행위’ ‘토착왜구 몰아내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문학비를 부수고 묻은 자리엔 두 사람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됐다. 한국 문학사 주역들이 한 달 새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바뀐 것이다. 이천시 담당자는 “문학비 건립 때도 두 문인의 친일 논란이 있었으나 깊은 생각 없이 세운 것 같다”며 “시민단체가 나서면서 철거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천시장은 “깨어 있는 이천 시민의식에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천에서 사라진 이인직과 서정주 문학비

시군 중심으로 벌이던 ‘친일 청산’은 최근 시도 단위로 광역화됐다. 지난해 광주광역시, 올해 경기도가 마스터플랜을 세웠고 전북도도 관련 용역을 진행 중이다. 경기도가 정리한 청산 대상의 경우 △친일 인물 257명 △친일 기념물(기념비 및 송덕비)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으로 ‘일제 잔재’를 망라했다. “생활 주변과 문화예술 분야 일제 잔재를 먼저 청산하겠다”며 올해 첫 사업으로 14개 단체에 7억4500만원을 지원했다.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포털서비스를 구축하고 교재를 만들며 지속적인 실천으로 일제를 청산한다는 것이다.

친일 인물로 어디서나 문화예술인이 쉽게 꼽힌다. 음악가 이흥렬, 현제명과 언론인 이광수가 경기의 대표적 친일 인사였다. 현제명의 ‘고향 생각’ ‘그 집 앞’ ‘희망의 나라’는 국민가곡이었다. 그는 초대 서울대 음대 학장으로 많은 후진을 길렀다. 이흥렬은 ‘봄이 오면’ ‘바위고개’와 “나실 제 괴로움”으로 시작하는 ‘어머니 마음’, “엄마가 섬그늘에”로 시작하는 ‘섬집 아기’를 지었다. 그가 지은 광주일고 교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의 곡으로 지난해 교체됐다. 광주일고는 지난 10월 말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치렀으나 동창회(회장 김상곤·전 교육부 장관)는 그전에 두 동강이 났다.

애국가의 안익태와 홍난파·김동진·김성태·조두남 등 음악인, 김은호·김기창·장우성 등 화가, 그리고 서정주를 비롯한 숱한 문인에게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그들은 근현대 한국 문화예술의 주역이었다. ‘친일행위자’로 문화예술인이 두드러진 것은 작품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작가 복거일은 이를 두고 “뼈가 있어 화석을 남긴 생물을 중심으로 고대 생태를 재구성하는 오류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김원웅 광복회장은 반일 ‘흑백 잣대’로 현대사 인물들을 재단하면서 자신의 보수우파 정당 이력에 대해서는 “생계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친일 문화예술인 대다수도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가난과 실패는 지금도 그 후배들이 이를 악물고 동반해야 할 운명이자 작품 활동 밑천이다.

좌파들은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헐뜯으며 북한과 프랑스를 과거 청산 귀감으로 내세운다. 북한은 공산혁명으로 지주와 관료를 숙청했다. 김형석 교수는 “일제 때 음악가 안익태와 무용가 최승희는 세계로 나간 최고 예술인이었다. 안익태는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로 불렸고, 최승희는 월북해 그런 평가를 받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불과 4년간 점령됐다가 자유프랑스군이 연합군으로 조국을 해방하면서 레지스탕스에 의해 많은 독일 부역자가 즉결 처분됐다. 프랑스와 독일은 수세기 서로를 향해 ‘복수심(revanche)’과 ‘원한(Ressentiment)’을 쌓아왔다. 나치 청산은 끝없는 혼란이었다. 1차 대전 영웅으로 나치 괴뢰정부 수반이 된 필리프 페탱에게 고등법원이 14 대 13, 한 표 차로 사형을 선고할 만큼 부역 행위는 격론에 올려졌다.(페탱은 종신형으로 감형돼 1951년 사망했다.) 파리가 해방된 1944년 9월부터 1958년 5월까지 13년 9개월 사이 정부 수반이 25명이나 바뀌었다. 살인, 고문, 간첩 행위 등 중범죄자를 제외하고 부역자 대부분은 1953년 사면됐다.

미국은 일본제국을 패망시킨 뒤 제국 일부였던 한국을 점령했다. 조선총독부 통치를 인수해 대한민국에 물려줬다. 대한민국은 걸음마 때부터 4·3사건, 여순반란 등으로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맞서야 했다. 반공은 이승만의 도그마가 아니라 대한민국 존립 근거였다.

‘친일파’엔 친일 말고 다른 과오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과 세계는 안팎으로 부조리한 다면체다. 사는 일을 성취와 좌절, 기쁨과 슬픔, 밝음과 어둠, 정의와 불의로만 나눌 수 없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정안기 전 고려대 연구교수는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육군에 지원한 조선인 통계를 보여준 바 있다.<표 참조> 1938년 7.4 대 1에서 1943년 60.9 대 1로 지원 경쟁률이 치솟았다. 지원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일본 신민이었다.

증오를 부추기는 선전물로 전락한 역사

아일랜드인은 700여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영국인들로부터 ‘하얀 검둥이’라고도 불렸다. 아일랜드는 국민총생산(GNP) 7만달러로 영국(4만달러)을 앞지르며 반영 감정을 극복해냈다. 실용주의로 민족주의 피눈물 장벽을 걷어내고 자존감과 품위를 세웠다. 한국인은 한 울타리 안에서 222만 외국인과 함께 살며 세계와 소통, 협력, 경쟁하고 있다. 미국은 다인종 국가로 세계를 이끌어왔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한 민족이지만 불편이 없다. 민족은 서구에서 근대 시민국가를 탄생시킨 뒤 상상 속 공동체로 물러났다. 그 민족주의가 이 땅에선 반일 감정, 그리고 ‘백두산’을 신전으로 모시는 종북 이념과 어울려 끝없는 적개심의 원천이 되고 있다.

1910년 한·일병합을 건의한 일진회원 대부분은 한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던 동학교도였다. 만해 한용운은 한·일병합 직후인 2010년 9월 조선통감 데라우치에게 경칭을 쓰며 조선에서도 대처승을 허용해달라고 건의했다. 나중에 딸까지 둔 만해를 왜색 불교를 불러들인 친일파라고 지탄할 수 있을까.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의 윤문(潤文)으로 후대에 널리 읽히고 있다. 역사가 증오를 부추기는 선전물에서 차가운 성찰의 거울로 돌아오고, 한국 사회가 민족주의 짓눌림에서 벗어나는 날 친일은 청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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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곤 군장대 석좌교수·전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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