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탈리아 영토인 시실리에 있는 고대 그리스 타오르미나 신전 유적. 해상 교역으로 부를 쌓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높은 수준의 물질 문명을 구축한 해양형 집단의 존재 양상을 엿볼 수 있다. ⓒphoto 퍼블릭 도메인
현재 이탈리아 영토인 시실리에 있는 고대 그리스 타오르미나 신전 유적. 해상 교역으로 부를 쌓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높은 수준의 물질 문명을 구축한 해양형 집단의 존재 양상을 엿볼 수 있다. ⓒphoto 퍼블릭 도메인

가야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은 속속 발견되는 유물과 일본의 고(古)기록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가야가 상당 기간 중국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자료의 시기를 살펴보면 가야는 건국 후 200년 이상, 일본보다는 중국과의 교류에 에너지를 집중했던 것 같다. 일본과의 교류 역사는 서기 200년대에 들어서면서, 즉 우한 일대에서 가야의 활동이 중단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가야의 대(對)일본 교류에 대해서는 차차 보기로 하고,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가야는 왜 지도상으로 봤을 때 지척에 있는 일본을 놔두고 중국과의 교류에 먼저 힘썼을까?

답은 간단하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렇게 뱃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빙하기 끝부터 지구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해수면이 높아져 동아시아의 육지‧바다 분포가 달라져 왔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 지구환경학부 글렌 밀른 교수 팀의 탐사 자료를 토대로 Proudman Oceanographic Laboratory에서 제작한 지도.
마지막 빙하기 끝부터 지구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해수면이 높아져 동아시아의 육지‧바다 분포가 달라져 왔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 지구환경학부 글렌 밀른 교수 팀의 탐사 자료를 토대로 Proudman Oceanographic Laboratory에서 제작한 지도.

위 지도들은 마지막 빙하기 끝 무렵 지구기온이 급상승하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동아시아 3국의 지형 윤곽이 지금처럼 잡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2만년 전 한반도는 일본과 좁기는 해도 바다로 갈라져 있었지만, 중국대륙과는 하나의 땅덩이였다. 서해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해안가를 따라 걸어서 왕래했을 것이다. 기온이 계속 올라가면서 나무가 충분히 성장해 배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바다를 이용해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왕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작아도 바다에는 조류, 즉 밀물과 썰물이 있고, 해안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엔 해류가 흐른다. 이 흐름들은 인간의 힘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에너지가 아니다. 따라서 바다를 사이에 둔 두 지점을 왕래하고 싶다면 직선거리로 건너가는 게 아니라 조류와 해류의 흐름을 잘 살펴 그것을 이용해서 항해해야 한다. 항해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배가 밀물 썰물을 이용해서 움직였다. 해안선을 따라 배를 타고 쉬엄쉬엄 가는 건데, 그래도 육지에서 이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며 속도도 빨랐을테다.

(왼쪽) 한반도 주변 해류도와 가야, 우한, 구마모토의 위치. 원본 해류도 출처: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 (오른쪽) 한중 고대 항로. 원본 항로도 출처: 한국해양재단 발간 ‘한국해양사’
(왼쪽) 한반도 주변 해류도와 가야, 우한, 구마모토의 위치. 원본 해류도 출처: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 (오른쪽) 한중 고대 항로. 원본 항로도 출처: 한국해양재단 발간 ‘한국해양사’

해류를 이용할 만한 동력을 내게 되면서는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로질러 훨씬 먼 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 역사기록과 해양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양사학자들은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위 오른쪽 지도와 같은 항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산둥반도를 바로 연결하는 서해 북부 연안 항로를 기원전 2000년에 이미 활발하게 이용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 흔적이 있다.

해류도와 동아시아 해안선 형성 과정 지도를 함께 보면, 왜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이 가까운 일본보다 먼 중국 쪽과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 서해 바다에는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해류가 남북 왕복으로 흐른다. 배의 동력 수준이 조금만 더 높아져도 이런 해류를 이용해 쉽게 먼 거리를 갈 수 있다.

반면 일본열도와 한반도는 아주 가까워 보여도, 의외로 배로 왕래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대한 바다 흐름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대마난류가 남동에서 북서로 흐르고 있어, 한반도에서 규슈 쪽으로 가려면 그 흐름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 흐름을 가로지르는 항해술을 정착시킨 것은 동아시아에서 가야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서기 290년, 가야가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고 나서 1세기 정도 지난 후에도 중국에서 일본으로 갈 때는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낙동강 하구의 가야까지 온 뒤 그곳에서 대마난류를 가로질러 갔다. 진수의 ‘삼국지’에 그 항로가 비교적 자세히 실려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상고대나 고대 전기에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움직였다면 그건 일본 쪽이 아니라 중국 쪽이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 해안에 도착하면 거기서 황해, 즉 한반도 서해안으로 흐르는 강들의 하구에서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어갈 수 있다. 전통시대 중국 3대 하천이라면, 황하‧회하‧양쯔강을 말했고, 이 강들은 모두 황해로 흐른다.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한반도 남서 해안에서 해류를 따라 중국 해안에 도착, 거기서 강을 거슬러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고대 사회의 항해술 수준에서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 중심부에서 더 가까운 황하가 아니라 양쯔강 중류까지 갔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역사학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개념을 들어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러 맥락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됐고,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서 계속 나올 터라 이 참에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로 육지 기반 세력과 하천 및 해양 등 수로 기반 세력의 차이다.

육지 기반 세력은 말 그대로, 육지에 주 근거지를 둔 집단을 말한다. 경제활동의 근본이 농사이기 때문에, 곡식이 잘 되는 땅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세력의 주요 기준이 된다. 이런 집단에서 기후변화 및 지구자기장 변화 등 거시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자신의 영토 안에서 황무지를 개간한다든지 산에서 나무를 베어 경지를 넓힌다든지 하는 것이다. 둘째,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이웃 인간 집단을 침략해서 영토와 식량을 뺏는 것이다.

해양 기반 세력은 하천과 바다의 물길을 이용해 주로 교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한다. 따라서 물길로 접근하기 쉽고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충분히 있는 곳에 세력이 발달하며, 얼마나 가치 있는 교역 대상물을 갖고 있고, 또 얼마나 크고 튼튼한 배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세력 확대의 기준이 된다. 이런 집단에서는 거시적 환경 변화로 사정이 어려워지면 더 멀리,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창출할 수 있는 곳으로 진출하는 데 주력한다. 또한 환경 변화로 인해 배를 만들기 어려워지면 좋은 목재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된다. 계속 환경 여건이 어려워지면 육지 세력에 눌려 살게 된다.

기후변화 온난기에서 한랭기로 넘어가는 시점인 기원전 550년 경 지중해에는 육지형 국가와 해양형 국가가 세력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페니키아, 헬라스, 일리리아 등 해양형 국가의 입지가 축소되고, 페르시아, 리디아, 에트루스카 등 육지형 국가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원본 지도 출처: 퍼블릭 도메인
기후변화 온난기에서 한랭기로 넘어가는 시점인 기원전 550년 경 지중해에는 육지형 국가와 해양형 국가가 세력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페니키아, 헬라스, 일리리아 등 해양형 국가의 입지가 축소되고, 페르시아, 리디아, 에트루스카 등 육지형 국가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원본 지도 출처: 퍼블릭 도메인

환경조건에 크게 의존하는 삶을 살았던 고대사회에서, 이 두 가지 특성은 뚜렷이 다른 성격의 집단을 만든다. 두 집단이 한 국가에 공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먹고 사는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집단의 사이가 좋을 수 없다.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살면서 환경 변화 등 거시적 요인 변화에 따라 어느 한 쪽이 더 우세하게 된다. 해양형 집단 같은 경우는 이웃인 육지형 집단보다 멀리 떨어진 해양형 집단과 더 사이가 좋은 것이 보통이었다.

우한에서 관측된 일식기록이 삼국사기에 담겨 있는 기원 직전부터 서기 200년 무렵까지 중국 대륙의 판도를 보자. 3대 하천 중 북쪽 황하 유역에는 육지형 집단 출신인 한족(漢族)이, 남쪽의 양쯔강 유역에는 해양형 집단 속성이 강한, 당시 한족이 ‘남만(南蠻)’, 즉 남쪽 오랑캐라고 부르던 집단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역시 3대 하천 중 가운데인 회하가 이 두 타입 집단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동아시아 해양형 집단의 전형이었던 가야가 황하 유역보다는, 거리가 좀 더 멀어도 양쯔강 유역을 주 활동무대로 삼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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