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촬영한 중국 상하이 보강리의 석고문. 인천항 보세창고에 26년째 방치돼 있다. ⓒphoto 대한민국건국역사관건립기념사업회
1991년 촬영한 중국 상하이 보강리의 석고문. 인천항 보세창고에 26년째 방치돼 있다. ⓒphoto 대한민국건국역사관건립기념사업회

관세청이 인천항 보세창고에 수십 년간 방치돼 왔던 상하이 ‘보강리(寶康里·바오캉리)’ 유적을 인천항에 복원하는 방안을 내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강리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집단거주하던 골목 형태의 주택으로, 1994년 상하이시가 기증하면서 보강리 일대 유적이 폐건축자재 형태로 국내로 반입됐다. 하지만 통관 비용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동안 인천항 컨테이너 속에 방치돼 왔다.

지난해 말 관세청 인천본부세관 측은 1994년 반입된 후 26년째 방치돼 있던 보강리 폐건축자재에 대한 공매절차에 착수했지만 6차례 공고 끝에도 인수자를 찾지 못했다. 오는 1월 말로 예정된 수의계약도 불발될 위기에 처하자 인천시와 협의해 유적지로 복원하는 ‘플랜B’ 마련에 착수한 것이다.

보강리 유적은 당초 매각 불발 시 국고로 귀속 후 폐기처분될 예정이었는데, 지난해 8월 ‘인천항 보세창고 속 임정 역사 폐기처분 위기’라는 주간조선 보도로 방향을 튼 것으로 알려진다. 관세청 인천본부세관 대변인실의 한 관계자는 “보강리 유적을 들여온 화주(貨主) 측에서 1월 말까지 통관을 하겠다고 의사를 전달해 왔다”며 “만약 통관이 안 될 경우 국고귀속 절차에 들어갈 것이고, 처리방안에 대해서는 추후 검토하겠지만 인천시와 협의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고 밝혔다. 인천본부세관 통관지원과의 한 관계자는 “보강리 유적의 인천항 복원은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방안”이라면서도 “인천시와 협의된 것은 아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일단 인천본부세관 측은 “통관이 우선”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화주 측이 통관에 필요한 자금마련에 어려움을 호소 중이고, 20개가 넘는 컨테이너를 둘 마땅한 장소를 찾기도 힘들어 국고귀속은 사실상 불가피한 수순이란 관측이다. 관세청도 화물의 특수성을 감안해 통상 절차대로 발송된 곳으로 돌려보내거나 섣불리 폐기할 수 없어 복원 방안을 고심 중인 것으로 보인다.

당초 임정 1호 청사로 알려졌던 보강리 유적은 1994년 국내로 반입된 직후 옛 지번이 달라진 관계로 임정 1호 청사가 아니란 점은 어느 정도 확인됐지만, 보강리가 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란 사료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폐기처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실제 보강리는 김구, 안창호, 이동휘, 신규식 등의 임정 요인들이 적을 두었던 곳으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보강리’로 검색되는 사료는 모두 56건에 달한다. 삼성의 지원으로 복원된 임정 청사가 있는 ‘보경리(普慶里·푸칭리)’ 32건에 비해 월등히 많다. 국가보훈처는 “상하이 보창로 보강리 일대는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로 활동한 장소”라면서도 “수차례에 걸친 독립기념관의 조사 결과 임시정부 청사나 관련 유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는 과거 독립기념관 조사에 근거한 입장만 되풀이하는 중이다.

임시정부와 인천의 깊은 인연

관세청이 국가보훈처 산하의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이나 현재 건립 중인 서울 서대문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도 아닌 인천항 복원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여기에는 임시정부와 인천과의 깊은 인연도 고려 대상이 된 것으로 알려진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홍진 선생 등 13도 대표자들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한 곳이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이었다. 임시정부 마지막 주석으로 상하이 보강리 27호에 적을 두었던 백범 김구는 중국으로 가기 전 인천에서 두 차례나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다.

백범이 인천에서 첫 수감생활을 한 것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인천감리영에 투옥되면서다. 체포된 백범은 해주감옥에 투옥됐다가 이후 인천으로 이감됐다. ‘감리서’라고도 불린 감리영은 개항장 일대 치안과 재판을 담당하던 곳이다. 백범도 ‘백범일지’에서 “내가 인천으로 이감된 이유는 갑오경장 이후에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천감리영에 투옥된 지 2년 만인 1898년 탈옥한 백범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서울 서대문감옥(경성감옥)에 수감됐다가 재차 인천으로 이감된다. 이때 백범은 죄수번호 55호를 달고 인천항 축항(築港) 노역에 동원됐다고 한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나는 잔기를 2년도 채 못 남기고 서대문감옥을 떠나 인천으로 이감되었다. 원인은 내가 제2과장인 왜놈과 싸운 사실이 있었는데, 그놈이 비교적 고역이 심한 인천 축항 공사를 시키는 곳으로 보낸 것이다”라고 적었다.

백범이 축항 노역에 동원됐던 곳이 인천항 내항(內港) 1부두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축항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10여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여기서 서대문감옥 생활을 회고하면 속담에 ‘누워서 팥떡 먹기’라, 불과 반나절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백범이 첫 번째 지방 순시지로 택한 곳도 인천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제1차로 인천을 순시하였는데,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 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까닭에 인천시는 임시정부 재평가와 기념사업에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옛 개항장에 해당하는 인천 중구는 백범이 두 차례 수감생활을 했던 옛 인천감리서터(신포 스카이타워아파트) 일대와 죄수 신분으로 축항 공사 노역을 했던 인천항 내항 1부두, 백범이 탈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한데 묶어 ‘청년 김구 역사거리’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인천본부세관이 국고귀속 후 인천항 일대에 ‘보강리’ 유적을 복원하는 것을 내부 검토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인천시와 협의가 우선이라지만 ‘보강리’ 유적이 복원될 경우 인천항 내항 1·8부두 일대가 우선 대상지로 꼽힌다. 현재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 갑문(閘門) 안쪽에 있는 내항 1·8부두를 재개발해 인근의 월미도, 차이나타운(옛 청국 조계) 등과 어우러지는 개항역사공원 등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앞서 인천시와 인천본부세관은 지난해 7월 인천항 1부두에 있는 1911년 건립된 옛 세관창고와 부속동을 세관역사공원으로 바꾸는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한편 인천시는 남동구 인천대공원에 있는 백범과 모친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내항 일대로 옮겨오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인천시에서는 1997년 고(故) 이회림 동양제철화학(현 OCI) 회장을 필두로 ‘백범 김구 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추진위’가 결성돼 인천대공원에 백범의 동상을 조성하고, 서울 효창공원에 있던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옮겨와 함께 모신 바 있다. 곽낙원 여사는 백범이 인천에 수감됐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 백범이 탈옥한 직후 본인도 연좌제에 따라 인천감리영에 수감된 적이 있다.

하지만 백범 모자의 동상이 인천 원도심과 거리가 있는 인천대공원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상이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에 인천시는 유정복 전 시장 때부터 백범 모자의 동상을 원도심으로 이전하려 해왔다. 박남춘 현 인천시장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2019년 “김구 동상과 백범 광장 이전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란 입장을 재확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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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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