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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특집]  소띠해 들어야 할 최고의 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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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645호]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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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특집]소띠해 들어야 할 최고의 운세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64.5㎝. 1954년
견우와 직녀 설화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져 있다가 칠석날(음력 7월 7일)에만 오작교 위에서 만난다는 내용이다. 피 끓는 청춘남녀가 일 년에 단 하루밖에 만날 수 없다니. 가혹한 형벌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이런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받아서였다. 문제는 그들의 만남을 주선한 신이 옥황상제였다는 사실이다. 옥황상제는 보기 드물게 근면성실한 두 남녀를 어여삐 여겨 짝을 맺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젊은이들이 결혼하면 더욱 생산력이 증대되어 모든 신들의 귀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옥황상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남녀는 결혼하자마자 하던 일을 ‘올스톱’하고 뜨거운 밤을 보내기에만 열중했다. 농사짓고 베 짜는 일은 고대사회에서 경제의 근간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늘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옥황상제의 기대를 저버리다니. 옥황상제는 공권력을 투입해 그들을 갈라놓았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괘씸죄에 걸려든 셈이었다.
   
   느닷없는 이별에 견우와 직녀는 목 놓아 울었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으나 잡히지 않는 서로를 보고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들이 흘린 눈물 때문에 지상에서는 홍수가 터졌다. 수많은 사람과 동물이 홍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다급한 쪽은 지상이었다. 일만 저질러놓고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하늘의 신들 대신 지상의 사람과 동물들이 수습에 나섰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칠석날 재회 프로젝트’였다. 두 남녀의 만남에는 까치와 까마귀가 투입되기로 결정 났다. 오작교(烏鵲橋)의 탄생이었다. 그날 이후 하늘은 더없이 맑아졌고 시도 때도 없이 터지던 폭우도 칠석날을 제외하고는 그쳤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견우와 직녀 설화는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벽화에 등장한다. 그만큼 설화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 설화에 등장하는 소에 대해서는 놓치는 수가 많다. 바로 소의 존재감이다. 견우(牽牛)는 그 이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소를 끄는 목동’이다. 농경에서 소의 힘을 빌리는 일은 절대적이었다. 견우가 단순히 소에게 꼴을 먹이는 어린 목동이 아니라 농사짓는 데 충실한 남자였음을 알 수 있다. 직녀(織女)는 또한 ‘베 짜는 여자’라는 뜻이다. 소 끄는 목동과 베 짜는 여자가 보통명사 대신 고유명사로 승격될 정도였으니 아마도 두 남녀가 그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실력자였음에 틀림없다. 남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에 소가 등장한다는 것은 삼국시대에 이미 소가 사람들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 그뿐인가. 신라의 향가 ‘헌화가(獻花歌)’에서 수로부인에게 진달래꽃을 꺾어서 바친 인물도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었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너나 할 것 없이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이동했다는 뜻이다.
   
   소는 고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농경의 근간이었다. 농부들은 소 쟁기질로 농사를 시작했고 소달구지에 볏단을 싣는 것으로 농사를 마무리했다. 그래서 농사와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그린 ‘경직도(耕織圖)’에는 언제나 소가 쟁기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달구지는 짐을 실어 나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타고 가는 교통수단 역할도 했다.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그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림은 가로로 긴 화면이 펼쳐지고 가장이 앞장서서 소를 끌고 있다. 소는 그림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강조되었고 소달구지에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타고 있다. 그들은 지금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떠나는 중이다. 소를 끄는 가장은 한 손을 높이 들어 분위기를 띄우고, 황소도 앞발을 들고 힘차게 내디디려는 찰나다. 신이 난 아이들은 달구지에서 뛰어내릴 듯 흥분된 몸짓이다. 맨 뒷자리에 앉은 아이는 두 팔을 벌려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그들의 소풍을 축하라도 하듯 소 잔등이와 달구지에는 주먹만 한 꽃송이들이 떨어져 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 절로 미소 짓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중섭의 생애에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은 현실에서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을 뿐이다. 이중섭은 전쟁으로 인해 심한 생활고를 겪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는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대신했다. 그리움의 현장에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봐 왔던 든든한 황소가 있었다. 여기에 소가 그려졌으니 이런 정감이 표현되지 만약 말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불교의 ‘십우도’와 도교의 ‘청우출관도’
   
   소와 말을 비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속도다. 말은 달리기 위해 태어난 동물이다. 고대에는 말이 얼마나 더 빨리, 더 오래 달릴 수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따라서 말은 빨리 달릴수록 명마로 취급받았다. 소는 다르다. 소는 느릿느릿 걷는 것이 특징이다. 소의 느린 걸음 속에는 전장을 누비는 승리의 헐떡임이 없다. 대신 여유와 안정감이 있다. 소에게는 ‘더 빨리’만을 다그치는 말의 세계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만약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에서 소 대신에 말을 그렸다면 저 가족이 누리고 있던 행복과 안온함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느릿느릿 굴러가는 소달구지를 탔기에 가족이 대화하고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깊은 사유는 느림 속에서만 탄생할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자신의 본성과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도 느린 걸음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찾아가는 과정을 ‘십우도(十牛圖)’에 비유한다. 흔히 절에 가면 대웅전의 외벽에 그려진 십우도를 발견할 수 있다. 십우도는 소를 찾아나서는 심우(尋牛), 소의 자취를 보는 견적(見跡), 소를 보는 견우(見牛), 소를 얻는 득우(得牛), 소를 기르는 목우(牧牛),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잊고 본래의 자기만 존재하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자기와 소를 다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본디 자리로 되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마지막은 저잣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돕는 입전수수(入纏垂手)로 끝난다. 십우도는 소를 통해 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수행화(修行畵)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호가 목우자(牧牛子)였다. 만해 한용운의 자택 이름은 심우장(尋牛莊)이었다. 목우나 심우 모두 본래면목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느리게 걸으며 차근차근 짚어 보고 점검해 봐야만 찾을 수 있는 세계다. 느림의 세계에 소가 선택된 데는 느리지만 쉼 없이 정진해나가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위해 말 대신 소를 선택한 쪽은 불교만이 아니다.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노자(老子)는 주(周)나라의 주하사(柱下史·도서관장)였는데 세상이 어지러울 것을 알고 사임 후 서역으로 향했다. 노자가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을 지날 때 청우(靑牛)를 타고 있었다고 전한다. 청우는 ‘검은 털을 가진 소’다. 노자가 소 잔등이에 앉아 함곡관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尹喜)에게 도(道)를 전수하는 장면은 정선의 ‘청우출관도’ 등 많은 화가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만약 노자가 소 대신 말을 타고 갔더라면 ‘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가르침을 전할 수는 없었으리라.
   
   김홍도가 그린 ‘목동귀가’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농촌의 풍경임과 동시에 십우도에서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우귀가의 반영이다. 그림은 대각선으로 흐르는 냇물 위로 낮은 흙다리가 놓여 있고 그 위를 소를 탄 목동이 건너는 장면을 그렸다. 화면 전체를 먹의 진하고 옅음으로 적절하게 대비시켜 현장감을 살렸다. 앞쪽의 언덕과 뒤쪽의 논밭 사이에 진한 먹으로 점을 찍어 무게감을 주었다.
   
   반면에 흙다리를 건너는 소와 목동은 몇 가닥 선으로 소략하게 그렸다. 그림 상단에는 ‘짧은 낫 비스듬히 차고 연무 속에 귀가하네(短鎌橫帶穿煙歸)’라는 제시(題詩)가 보인다. 제시 옆에 쓴 ‘단구(丹邱)’는 김홍도가 말년에 주로 쓴 호다. 단구가 적힌 그림은 사소한 기교나 손재주조차 전부 배제된 ‘반본환원’의 단계에 가 닿아 있다. 본래면목을 찾는 불교든, 도를 찾는 도교든, 혹은 인간의 길을 묻는 유교든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그들 모두가 동의하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을 느리게 살아가라는 얘기다. 질주하지 말고 우보(牛步)로 걸어가란 뜻이다. ‘빨리빨리’를 외치다 보면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놓치게 된다. 조선시대 선비를 그린 그림에서 그가 불교신자나 도교신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굳이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이 건성건성 살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귀하지 않은가.
   
   
▲ 김홍도. ‘목동귀가’. 종이에 연한 색. 34×25.3㎝. 개인

   소띠해와 올해의 운세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라면 한마디 하고 싶을 것이다. 좋은 줄은 알겠는데 그런 원론적인 얘기 말고, 올해의 운세처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알려줘야 할 것 아니냐라고 말이다. 정초이니만큼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십이지(十二支)가 만난 육십갑자에서 변화무쌍하게 벌어지는(혹은 앞으로 벌어질) 인생이나 사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십이지의 ‘소띠’에서 말하는 소는 밭을 가는 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십이지는 단지 ‘음양(陰陽)이 쇠(衰)하고 성(盛)하는 이치에 따라 자연 생태계의 태동과 성장 등의 변화’ 등을 설명하는 문자로 된 부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띠니 양띠니 하는 것은 소를 닮고 양을 닮아서가 아니라 그냥 소와 양이라는 부호로 쓰였을 뿐이다. 소띠와 양띠 대신 책띠와 컵띠라고 해도 상관없다. 흔히 사주를 볼 때 소가 고집이 세니까 소띠도 마찬가지라고 풀이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뜻이다.
   
   십이지는 고대 천문학에서 1년 12달을 표시하기 위해 천구(天球)를 12등분한 별자리다. 십이지가 하늘을 상징하는 10개의 천간(天干)과 만나 각각 짝을 지어 구성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우의 수가 육십갑자다. 그중 소로 적힌 ‘축(丑·소)’은 소의 해도 되지만 절기상으로는 음력 12월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소띠의 소는 동물의 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역’의 괘(卦)에서 지택림(地澤臨·)을 상징한다. 지택림은 6효(爻) 중 맨 아래의 초효(初爻)와 2효가 양효(陽爻)이고, 나머지는 모두 음효(陰爻)다. 초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기운이 상승하고 발전한다고 보면 지택림은 아직 음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는 상태다. 허균은 ‘십이지의 문화사’에서 축(丑·소)은 ‘유(紐)’와 같은 뜻을 가진 글자로 ‘맨다’ ‘묶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만물이 음의 기운에 매여 있어 감히 나오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는 의미다. 설날이 되기 전, 음력 12월을 생각해보면 음의 기운에 매여 있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양기가 상승하기에는 누르고 있는 음기가 너무 강해 힘든 상태가 지택림이다. 그러나 2021년 소해는 작년보다 훨씬 좋은 해가 될 것이다.
   
   코로나19는 2019년 돼지해에 발생했다. 돼지해는 괘로 볼 때 음기가 극에 달한 곤위지(坤爲地·)에 해당한다. 6효가 전부 음효이고 양효가 전부 감춰진 상태다. 사람의 체온을 1℃만 높여도 암세포가 죽을 정도로 면역력이 향상된다는 논리가 온열요법이다. 말하자면 곤위지는 체온을 높여줄 불기운이 두꺼운 껍데기 속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 냉기만 감도는 괘다. 자칫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이 극하면 양이 태동하는 법이다. 2020년부터 양효가 하나 살아나는 지뢰복(地雷復·)이 시작되었고, 소띠해인 올해는 양효가 하나 더 늘었다. 미약하지만 양이 기운이 점점 강해지면서 음양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증거다. 2022년이 되면 더욱 좋아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소띠니 양띠니 혹은 재물운이니 승진운이니 하는 것보다 더 깊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괘의 상징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2019년의 괘는 6효가 전부 음효인 곤위지였다. 그런데 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음이 극하면 곧바로 양이 태동한다. 그러니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죽자 살자 달려드는 태도는 괘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소치다. 내 힘이 조금 강하다고 해서 혹은 나의 무리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영화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뜻이다. 곤위지의 반대는 건위천(乾爲天·)이다. 건위천은 6효가 전부 양효로 되어 있다. 양이 극하면 곧바로 음이 태동한다. 양이 충만해서 어떤 음도 스며들 것 같지 않은데 음기는 맨 아래 초효에서부터 시작되어 위로 올라온다. 그래서 양으로 충만한 건위천 자체를 ‘양기가 끝났다’고 해석한다.
   
   영원히 고정된 것은 없다. 그것이 태극(太極)의 세계다. 우리나라 태극기의 중앙에 있는 원이 태극이다. 태극은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표현된 음과 양이 정확히 반반씩 맞물려 있다. 태극을 무극(無極)이라 해도 상관없다. 태극 혹은 무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음양이 결합된 상태다. 음의 꼬리는 양의 머리에 걸쳐 있고, 양의 꼬리는 음의 머리를 덮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니 누가 먼저이고 누가 뒤인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다. 그렇다면 소위 극양으로 된 건위천에서는 왜 음이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까. 관성(慣性)의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루로 치면 사시(巳時·9~11시)가 양이 최고조에 달하는 건위천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는 양기는 오시(午時·11~13시)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양기의 여파는 거의 오후 3시까지 지속된다. 음기가 극에 달한 곤위지는 해시(亥時·21~23시)지만 그 여파는 새벽 4시까지 지속된다. 새벽 4시의 어둠은 영원히 계속될 것같이 절망스럽지만 아침은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중이다.
   
   그러니 지금 곤위지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기뻐해야 한다. 희망이 저 앞에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건위천의 햇볕 아래 있는 사람은 두려워해야 한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어둠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나간다고 목에 힘줄 것이 아니고 힘들다고 주눅 들 필요도 없다.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의미가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이 불교 신자나 도교 신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굳이 소를 타고 깊은 상념에 빠졌던 이유도 그 의미를 궁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소 잔등이에 앉은 듯 여유로운 마음으로 괘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올 한 해도 건강하고, 소처럼 우직하고 건실하게 사는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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