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법원이 공개한 판결문 전문.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호주 법원이 공개한 판결문 전문.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전력이 호주 남동부 뉴사우스웨일스(NSW)주 바이롱 석탄 광산에 투자했던 8000억원을 대부분 잃는 것이 호주 법원 판결로 사실상 확정됐다. 재판 과정에서 호주 현지 법원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탈석탄 정책기조와는 맞지 않은 대규모 석탄개발을 한전이 해외에서 추진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한전은 2010년 7월 다국적 광산기업 앵글로아메리칸으로부터 바이롱광산 지분 100%를 4억호주달러(약 3400억원)에 단독 인수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발 관련 비용까지 합치면 총 8000억원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바이롱광산의 지분은 한전이 90%, 한전의 5개 발전자회사가 각각 2%씩 보유하고 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토지환경법원은 지난해 12월 18일(현지시각) 재판 신청인인 한전이 제기한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독립계획위원회(IPC)가 내린 부동의(不同意) 결정을 뒤집어 달라”는 요청을 기각했다. 이 소송은 2019년 9월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의 IPC가 한전 호주법인의 바이롱광산 개발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 계기가 됐다. IPC는 대규모 개발 계획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 뒤 개발을 최종 승인하는 주정부 기구다. IPC는 2019년 당시 “바이롱광산 사업에 따른 농지 파괴와 지하수 감소가 우려된다”며 한전의 광산 개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당시 IPC 측은 “광산 개발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 환경오염, 소음 등 장기적으로 환경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며 “광산 개발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인정하나,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원칙에 반하기 때문에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한전 호주법인은 지난해 6월에 IPC의 부동의 결정을 뒤집는 행정소송을 뉴사우스웨일스주 토지환경법원에 제기했다. 소송을 통해 IPC의 부동의 결정을 뒤집고 바이롱광산 개발을 계속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한전의 소송 상대방에는 지역 환경단체인 바이롱계곡보호동맹(BVPA)도 포함됐다.

하지만 뉴사우스웨일스주 토지환경법원은 IPC와 BVPA의 손을 들어줬다. 주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뉴사우스웨일스주 토지환경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BVPA 측이 내세운 “한국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의 분명한 변화(The clear change in direction on energy policy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는 시장에 투입할 수 있는 석탄의 양과 그 기간 측면에서 바이롱 석탄 프로젝트의 장기적인 경제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라는 주장을 채택했다. 또 법원은 “신청인은 국제 정책과 온실가스 배출의 영향도 언급했는데, 이는 파리기후협정에 따른 한국의 약속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탄소중립’을 외치며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밝혀온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를 감안할 때 바이롱광산에서 캐낸 석탄의 경제성이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BVPA의 주장이 훨씬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BVPA가 제출한 수많은 증거 중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를 재판부가 가장 서두에 언급했다는 점을 보면 결국 문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석탄 광산 개발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와 한전 측의 석탄개발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한전 주장, 한국 정부의 약속과 양립할 수 없다”

한전이 바이롱광산 투자에 실패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한전이 해외 자원 개발 사업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전은 2010년 바이롱광산 투자에 뛰어들 당시 지역 노천과 지하 탄광을 개발해 2020년부터 40년간 연간 350만t의 석탄을 생산하겠다고 밝혔었다. 그간의 해외 광물자원 개발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광물자원공사가 주로 나섰다. 하지만 바이롱광산 프로젝트의 경우 한전이 “석탄 광산을 직접 개발해 발전자회사들이 운영하는 석탄발전소에 안정적으로 석탄을 공급하겠다”며 나섰다가 사달이 난 것이다.

호주는 국가 특성상 광산 개발을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나 주민동의 등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수천억원대의 투자를 실행한 것이다. 광산 프로젝트가 벽에 부딪히자 한전은 한때 한국광물자원공사 임원 출신의 인사를 현지 법인장으로 앉히기도 했지만 상황을 진척시키는 실질적 성과는 올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정부 부처 간 몰이해와 비협조 역시 문제를 악화시킨 원인으로 꼽힌다. 1조원 가까운 규모의 금액이 들어간 대형 사업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면 외교부 등 정부 부처가 어떻게든 사업을 살리는 쪽으로 힘을 보탰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수천억원의 국민 혈세를 앉아서 그냥 날려버린 것이다. 바이롱광산 사안은 2019년 산자위 국정감사에서 이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질의해 도마에 오른 바 있다.

한전의 기업 규모가 지나치게 큰 나머지 8000억원 상당의 투자금 손실이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은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바이롱광산을 둘러싼 한전과 IPC, BVPA의 법정 공방을 보도한 현지 언론사 시드니모닝헤럴드가 기사 제목에 한전을 ‘에너지 거인(Energy Giant)’이라고 소개할 만큼 한전은 호주 현지에서도 거대 규모의 기업으로 여겨진다. 실제 한전은 자본금 규모가 3조원이 넘고 한 분기 영업이익 규모(연결기준)만 2조원대를 오간다.

한전은 이번 판결로 인해 남은 카드가 얼마 없는 상황이다. 사업을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한전 관계자는 “이번 재판은 1심이었고 우리가 패소했기 때문에 2심 재판부의 판단을 다시 구할 예정”이라며 “항소의향서는 이미 제출했고 3월 중으로 소장을 다시 접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에 문의하자 대변인은 “한전에 물어봤는데 판결문에 우리 정부 정책 관련 이야기는 없다고 했었다”고 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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