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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7호]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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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인류사]고대 해상왕국 가야 바닷길 통해 일본 열도로 넘어간 이유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2021-03-04 오전 8:50:23

▲ 2019년 11월 창녕 비화 가야의 고분 발굴 현장. photo TV조선 뉴스 캡쳐
‘가야’라는 명칭은 상당히 포괄적이다. 현재 문헌을 통해 이름과 소재지가 확인되고 있는 곳만 해도 32곳이며, 최근 속속 발굴되는 가야 유물들까지 고려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소국들이 ‘가야’라는 우산 개념 안에 속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6세기까지 700년 이상 경남, 경북, 전남, 전북의 해안 및 하천 유역에 존재했던 나라들이다.
   
   역사 기록, 유물, 유적 외에도 구비전승 및 고천문학, 고지리학, 고기후학 분야의 다양한 자료를 통합해서 역사인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에 훨씬 더 많은 가야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만 보더라도 서해안과 거기서 이어지는 강을 따라 충청, 경기, 황해, 평남의 곳곳이 한때 가야의 무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위치 및 그 추정 근거에 대해선 앞으로 필요에 따라 언급하게 될 것이다.
   
   (통상 이 지역은 백제, 혹은 낙랑‧대방 등 한사군(漢四郡)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대사회 해양국가들은 육지에서는 이웃 지역과 단절된 독립적 지형을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바닷길에서는 서로 막지 않았다. 따라서 요즘 볼 때는 ‘거기서 거기’ 같은 좁은 지역에서도 백제 혹은 가야 등 서로 다른 연맹체에 속하는 해양소국들이 엄연히 별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육지 기반 집단은 그들의 활동에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다.)
   
   
▲ 기록, 유물, 유적, 고대 환경 관련 데이터, 현지에 남아 있는 무형 유산들을 통합해서 역사인류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가락국(금관가야)의 경제권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위치. 이 중 16~23번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관해서는 이후 기사에서 다룰 예정이다. 원본 지도 출처: Wikimedia Commons, 지도 구성: 이진아

   존재감으로 본다면 그 가야들 중에서 단연 수로왕이 건립한 금관가야, 즉 가락국이 압도적이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까지 약 300~400년 동안, 가야 특유의 철기 문명을 일구어 찬란하게 빛냈다. 그리고 그 문명을 일으킨 기술과, 아마도 인간적인 친화력을 앞세워 동아시아를 장악했다.
   
   가락국은 그렇게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황하 및 양쯔강 중류까지, 일본의 규슈와 시코쿠, 혼슈의 서쪽 지역까지 진출해 국제적인 경제협력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선구적 행보가 이후 모든 가야 연맹체 국가들의 번영을 이끄는 견인차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대 국가였던 고대 로마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기후온난기 고대 해양국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기록으로 추정컨대, 가락국의 일본 진출 혹은 일본과의 본격적 교류는 2세기 후반 시작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OEM 제철기지 경영이 채산에 맞지 않기 시작했던 시점이다.
   
   가락국이 진출하기 전, 일본은 위치로서는 동아시아에 속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나 중국대륙과 거의 왕래가 없는 고립된 지역이었다. 그 고립은 해수면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해 바닷물이 동아시아 3국을 갈라놓았던 마지막 빙하기 끝 무렵, 즉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부터 시작했다.
   
   거대한 바닷물의 움직임인 쿠로시오 해류가 중국 대륙 및 한반도의 남쪽으로 흐르며, 이 두 지역과 일본 열도를 갈라놓았다. 특히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에서는 대만 난류와 쿠로시오 해류가 상당히 강하게 흐르고 있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장벽이 둘러쳐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한반도의 동남쪽, 즉 낙동강 하구지역이 쿠로시오 해류가 약해지면서 동한난류가 되는 곳이며, 쓰시마라는 중계지와 가까이 있어 일본에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런 이점도 일상적으로 이용하려면 동한난류를 쉽게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의 항해술이 개발되어야 했다. 그걸 해낸 것이 가락국이었다.
   
   
▲ (왼쪽) 한반도 주변 해류도. 검은 선의 큰 타원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의 해류다. 고대 항해술 수준을 고려했을 때 중국과 일본을 직접 왕래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검은 선의 작은 타원은 가락국과 규슈 및 시코쿠 서북부를 연결하는, 상대적으로 훨씬 쉬워 보이는 노선 대역을 보여준다. photo 한국해양조사원. (가운데)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중국↔가락국↔일본 교류의 경로. 일본과 중국은 가락국을 거쳐야 왕래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photo 이종기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오른쪽) 일본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7세기~9세기 당나라에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이용 경로. 서기 3세기 이전에 정착된 가락국의 항로가 7세기까지 그대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photo Wikipedia Japan, 퍼블릭 도메인

   가락국의 진출로 일본에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그때부터 동아시아 권역 전체에서 이해관계가맞는 집단들의 교류가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문헌에서 일본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나타나지만, 실제 교류가 기록되는 것은 3세기 후반부터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이 교류에 이용된 항로가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중국 대륙에서 대방군, 즉 지금의 황해도로 일단 넘어온 다음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혹은 육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설명이 갈린다.) 한참 여행한 후 가락국, 지금의 김해까지 온다. 여기에서 배를 바꾸어 타고, 즉 가락국의 배를 타고 쓰시마를 거쳐 규슈로 넘어갔었다. 역방향으로 일본 열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위 오른쪽 그림은 일본의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중국까지 가는 길을 표시한 것인데, 7세기까지도 중국 대륙 사람들과 일본 열도 사람들이 교류하려면 옛 가락국이 만들어둔 항구를 거쳐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항로가 9세기까지도 여전히 이용됐다는 것을 당시 일본 승려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가락국은 동아시아 교류의 길을 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마도 비즈니스 귀재였던 가락국 사람들은 이런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국부를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가락국의 관심사 1순위는 무엇보다도 자신들 파워의 원천인 철을 만들 수 있는 OEM 기지를 찾아 생산해서 본토로 보내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을 테다.
   
   앞선 연재에서 보았듯이, 중국에 이어 일본 열도에서 첫 번째로 성공적으로 그 시스템을 구축했던 곳이 야쯔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열도에서 가야 활동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거기서부터 고대의 제철 선진국 특유의 전개 양상이 시작된다.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가 또 빠른 속도로 자원을 소진시키면서 원래 터전은 약해지고 다른 적절한 곳을 찾아 확산되어 가는 것 말이다.
   
   
▲ (왼쪽) 규슈 구마모토 현 야쯔시로 시 위치. photo Wikimedia Commons (가운데) 1979년 야쯔시로시 소재 가와하라다이진구 뒷산 숲 속에서 이종기 선생이 확인했던 가락국 제철작업장 유적 추정 위치. 2020년 1월 현재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다. photo 구글 어스 (오른쪽) 야쯔시로 제철작업장 내부에 있었던 가락국 복식의 화강암 석상. photo 이종기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가락국 정도로 품질 좋은 강철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경영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어떤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면, 그 강렬한 경제 부흥의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고대 제철 선진국 특유의 속성에 따라 약화와 소멸의 궤적을 거쳤다 하더라도 그 흔적 역시 남아 있게 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고, 아무리 후대의 역사가들이 붓끝으로 그 흔적을 지우려 했어도 말이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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