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민족사랑방이 출간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출판사 민족사랑방이 출간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최근 민족사랑방이란 출판사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시판한 것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단체(자유청년연합 등)에서 출판사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했고, 법치와 자유민주주의연대(NPK)는 ‘세기와 더불어’의 판매금지 가처분신청을 한 상태다. 경찰은 민족사랑방 측이 ‘세기와 더불어’를 발간하고 배포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 등을 위반했는지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계에 따르면 교보문고는 지난 4월 23일 오후 대책회의를 열고 ‘세기와 더불어’의 신규 판매를 중단했고, 이날 오후 4시부터 온라인 서점에서도 ‘세기와 더불어’가 검색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 와중에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책자 발간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소셜미디어 등 온·오프라인에서 논란이 확산되는 등 이른바 남남갈등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간한 1인칭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 김일성 80회 생일(4월 15일)을 기념해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간한 책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전까지 총5권이 나왔는데 이후 1995년에 제6권, 1996년과 1998년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이란 이름으로 제7권과 제8권이 나왔다. 이 책자는 기존 김일성 일대기와는 달리 ‘나는’으로 시작하는 1인칭 회고록 형태를 띠고 있다. 직접 김일성이 회고하는 듯한 형식을 취해 사실감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세기와 더불어’는 기본적으로 북한 당국이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 역사를 조작한 항일회고록이란 성격을 갖는다. 이른바 ‘가짜 김일성 만들기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날부터 1945년 광복 직전까지의 일대기를 통째로 날조하여 ‘김일성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대항하여 조선의 해방을 주도한 항일애국지도자’로 선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반일청년혁명조직이라는 타도제국주의 동맹(1926) 결성, 주체사상의 시원이라는 카륜회의(1930) 소집, 백두산을 근거지로 조직했다는 항일무장투쟁조직 조선인민혁명군(1932) 결성, 항일통일전선체 조국광복회(1936) 결정, 보천보전투(1937), 총진격작전(1945) 등이다. 특히 이 책자는 3·1운동의 실패를 혁명적 수령(김일성)의 영도를 받지 못해 실패한 부르주아지 운동이었다고 평가하는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다. 결국 날조된 김일성의 항일투쟁만이 ‘정의’이며 나머지 독립운동은 모두 ‘오류’라는 등식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전 8권으로 출간했다.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전 8권으로 출간했다.

김일성 항일투쟁만 ‘정의’, 나머지는 ‘오류’

이러한 연유로 대법원에서는 김일성 회고록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확정 판결한 바 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국내 모 출판사가 김일성 회고록을 출판한 사건과 관련해 법원에서 이적표현물로 판결(95도148, 94고단1532)을 내린 이래 총 4차례에 걸쳐 일관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북한 당국과 국내 종북세력들에 의해 항일애국투사로 둔갑한 김일성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이다. 과연 김일성은 누구인가? 필자가 북한연구소가 발행한 ‘북한대사전’(1996) 집필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해 ‘김일성’ 편을 직접 집필했기 때문에 이를 요약·인용한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김성주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유랑생활을 했다. 김성주는 만주 팔도구 소학교, 화성의숙, 평단중학교, 육문중학교 등을 다녔으나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아버지 김형직이 1926년 ‘살부회(殺父會)’라는 공산주의 계열의 폭력단체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무송 일대에서 마골(馬骨)이란 자가 이끄는 공산 폭력배 조직에 가담했다.

김성주는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이라는 공산주의 폭력단체에 가담하여 그 일대의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고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부농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30년 11월부터 김성주는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 조직이 와해되자 1932년 여름부터 김일성은 안도현(安圖縣)을 근거로 활약하던 중국인 항일무장부대인 동북의용군 오의성(吳義成) 부대에 가담했다가, 1936년 중국공산당 통합게릴라부대인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었다. 김성주는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의 제1로군 제2군 제6사의 부대원이 되었다. 김성주는 이 무렵에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김성주는 중국공산당을 위해 항일투쟁에 참가했다. 동북항일연군이 일제에 의해 와해되자, 1940년 부대원들과 러시아(구소련) 땅으로 도피했다가 소련군 극동군사령부 휘하의 정찰부대인 88여단에 소속되었다. 88여단은 전투부대가 아니고, 만주와 한반도 북단지역에 대한 정찰활동만 하는 부대였다. 이때 ‘金日成’이라는 별명을 사용한 김성주는 이 88여단에서 소련군 대위의 임시계급장을 달고, 제1대대장으로 활동했다. 김성주는 1941년부터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소련군을 위해 이러한 소조활동을 몇 차례 전개했다. 광복 후 김성주는 소련군의 북한 지역 점령이 완료된 1945년 9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 브가쵸브호를 타고 구소련군의 지시와 보호를 받으며 88여단에 소속되어 있던 다른 한국인 대원들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했다.

1945년 10월 14일 열린 ‘소련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석한 33세의 김일성.
1945년 10월 14일 열린 ‘소련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석한 33세의 김일성.

날조된 역사 위에 세워진 ‘조선혁명 전통’

당시 김성주는 소련군 군복에 대위계급장(임시계급장임)을 달고 있었으며 직책은 소련군 평양지구 위수사령부 부책임자였다. 당시 김성주는 소련극동군 군사위원이었던 시티코프에 의해 북한의 통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소련이 김성주를 북한의 통치자로 내정했던 이유는 소련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여 소련의 북한 공산화정책을 충실히 실천할 인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결성하고 김일성을 비서(부책임자)로 앉혔다. 소련군정은 1945년 10월 14일에는 ‘소련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겨우 33세에 불과한 김성주를 ‘金日成 장군’으로 소개하였다. 이날 이후 김성주는 완전히 ‘金日成 장군’으로 공식화된다.

북한대사전 김일성 편이 밝혔듯이 김일성은 북한이 주장하듯이 독자적으로 조선 독립을 위해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항일무장군사조직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다. 조선의 광복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에는 일부 비적 활동을,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을 위해, 1940년대에는 소련공산당을 위해 ‘일부’ 항일활동을 전개한 것에 불과함을 지적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 김씨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이른바 ‘조선혁명 전통’이란 북한당국에 의해 날조된 항일무장투쟁사에 근거한 것으로, 이의 진실을 알게 되면 철옹성과 같은 정권(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정통성은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사안이 이러한데, 이번에 ‘세기와 더불어’를 시판한 출판사 측은 책 소개란에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그날까지 중국 만주벌판과 백두산 밀영을 드나들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생생한 기록이다”라고 선전하고 있다. 또 “사실 일제 치하에선 김 장군을 전설적 인간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이제 본인의 회고록으로 의문의 여지는 풀렸다 하겠다”고 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좌익세력의 항일무장투쟁도 항일투쟁의 혁혁한 공적으로 인정하는 날이 오길 기원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명백한 북한 김일성에 대한 고무, 찬양이다.

역사 날조를 묵인하는 것도 역사 날조다

‘세기와 더불어’는 북한당국의 역사 날조를 기정사실화하여 반문명적인 북한 김씨집단과 이를 추종하는 국내 종북세력의 발호를 정당화하는 수단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한 논란은 남남갈등을 부추겨 소모적 국력낭비를 초래할 것이다. 이런 책자를 백주대낮에 대한민국에서 시판한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왜곡된 역사관과 국가관을 갖게 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우습게 아는 반국가 이적세력들의 지속적 도전의 일환이다.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의 판매허용 주장은 어찌 보면 진보적 주장으로 보이지만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 내부에서 북한의 역사 날조와 선동 등에 속아서 북한 김씨집단에 동조하고 찬양하는 종북세력들이 아직도 발호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주장이다. 또한 현실비판 능력이 결여된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책자는 잘못된 역사관을 갖게 하여 결국 대한민국에 ‘독약’이 될 것이다. 북한 추종세력들이 국회까지 진출한 현실을 외면하고 속아 넘어갈 국민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다.

아직 ‘세기와 더불어’ 시판 논란과 관련한 북한 당국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와 관련해 사법처리가 이뤄지면 곧 북한은 대대적으로 이를 비방하는 보도를 할 것이다. 문 정부가 김정은을 의식해 이번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이란 미명하에 한국현대사를 날조한 북한 당국의 주장을 용인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 날조를 묵인하는 행위도 또 하나의 역사 날조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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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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