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제주9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맨 오른쪽) 대령이 작전에 참여한 연대 참모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photo 박철균 제공
1948년 5월 제주9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맨 오른쪽) 대령이 작전에 참여한 연대 참모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photo 박철균 제공

“최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임무수행 중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매도하는 것을 보면서 슬픔과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

지난 6월 18일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 54묘역. 박철균(朴哲均) 예비역 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등 시민단체 주관으로 열린 ‘박진경 대령 추모식’ 자리였다. 박 준장은 1948년 4·3사건 당시 제주 주둔 9연대장이던 박진경 대령의 양손자다. 박 대령은 연대장 부임 40여일 만인 6월 18일 새벽, 남로당 지령을 받은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박 준장이 말한 ‘최근’ 사건은 KBS 제주 총국이 지난 4월 2일 방송한 다큐 ‘암살 1948’을 가리킨다. KBS는 박 대령을 ‘제주도민을 학살한 강경 토벌작전 주역’으로, 상관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는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묘사했다. 남로당 폭동을 진압하러 간 국군 연대장은 ‘학살범’으로, 암살범은 제주도민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의인(義人)’으로 뒤바꾼 것이다. 73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박 대령이 강경진압 주역?

경남 남해 출신인 박진경(朴珍景) 대령은 서른, 짧은 인생을 살았다. 일본 오사카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박진경은 1944년 초 마쓰도(松戶) 공병예비사관학교에 학병으로 들어가 이듬해 2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최영희씨가 사관학교 동기생이다. 임관과 함께 제주도에서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 박진경은 고향 남해로 돌아왔다가 곧 부산으로 가 창군(創軍)운동에 참여했다. 1946년 1월 부산에서 5연대가 창설되자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해 4월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서 장교를 배출하면서 소위로 임관했다. 영어가 능통했던 박 대령은 1947년 6월 경비사령부로 전출돼 송호성 사령관 부관과 인사국장으로 재직했다. 4·3사건 발발 한 달 후인 1948년 5월 6일 제주 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미 군정은 김익렬 9연대장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총책 김달삼과 추진한 평화협상에 회의적이었다. 박 대령은 미군과 의사소통이 원활했을 뿐 아니라 학병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지역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4·3사건을 수습할 만한 적임자로 꼽혔다. 미 군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정상적으로 치르는 데 온 힘을 기울일 때였다.

남로당의 총선 방해는 집요했다. 제주도당은 박 대령 부임 나흘 뒤 치러진 5·10 총선에서 투표소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방화를 자행하면서 투표를 방해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제주도 선거구 2곳만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불발됐다. 미 군정은 6월 23일 재선거를 추진하면서 치안 확보에 나섰고, 박 대령은 이 작전을 이끌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나온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하 4·3보고서)는 박진경 대령이 이끈 9연대(5월 15일 11연대로 통합)가 한 달여 만에 3000~4000명에서 최대 6000명까지 체포했다고 썼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김익렬 전 연대장 회고록)고 했다거나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는 암살범(손선호 하사) 재판 증언까지 실어 강경진압의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4·3 보고서’(218쪽)엔 박 대령의 작전이 ‘선무공작’에 중심을 뒀다는 반대 증언이 실려 있다.

채명신 “양민 구출을 위한 작전”

당시 박진경 연대장 휘하 소대장이던 채명신 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그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4·3 초기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서 많은 주민들이 입산했다.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고 증언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남로당 무장대와 떼어놓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4·3 보고서’에 실린 증언이다.

4·3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진행된 ‘초토화작전’ 때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4·3 보고서도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는 등 글자 그대로 초토화됐다’(241쪽)고 썼다. ‘4·3 보고서’는 ‘박진경 연대장 재임 때의 인명 피해는 그해 겨울 대규모 집단 총살극으로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와 비교하면 많은 수는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KBS ‘암살 1948’은 이보다 한참 전인 5월 초부터 6월 중순까지 지휘를 맡은 박진경 대령에 대해 “닥치는 대로 청년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어린아이도 막 죽이고, 연대장이 학살 명령을 했다”는 인터뷰를 내보냈다. 그해 말 펼친 ‘초토화작전’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위원으로 참여했던 한광덕(80) 전 국방대학원장은 “박진경 대령이 했던 작전은 그해 말 초토화작전과는 완전히 다른 작전이었다. 어떻게 상관을 암살한 남로당 세포들이 꾸며낸 말만 듣고 강경진압으로 몰아갈 수 있느냐”고 했다.

‘4·3 보고서’나 ‘학살 1948’은 박 대령의 강경진압작전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암살을 단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로당은 박 대령이 작전을 펴기도 전인 5월 10일 회의에서 ‘박진경 대령 숙청’을 결정했다. ‘4·3 보고서’도 비중 있게 소개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이하 투쟁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주읍 도당 대표로서 군책, 조책 2명과 국경(국방경비대)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9연대 정보관 이소위 등 3명과 계 5명이 회담’하여 ‘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보고서’는 토벌대가 1949년 6월 남로당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를 사살하면서 노획한 내부문건으로 4·3사건에 대한 남로당의 전술과 입장을 보여주는 1차 자료다.

지난 6월 1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진경 대령 추모식. 양손자인 박철균 예비역 준장이 참배하고 있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진경 대령 추모식. 양손자인 박철균 예비역 준장이 참배하고 있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박 대령 암살은 남로당 지시

이 ‘투쟁보고서’는 박 대령 암살 주범인 문상길 중위가 남로당 중앙 직속 세포라는 사실도 밝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4·3 폭동을 일으키면서 프락치가 침투한 9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날 9연대는 움직이지 않아 남로당은 조사에 나섰다.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횡적으로 문상길 소위를 만났던 바 이 동무의 입을 통해서 국경에는 이중세포가 있었다는 것, 그 하나는 문 소위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직속의 정통적 조직이며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의 조직이었음.’ 장교는 남로당 중앙에서, 사병은 지역 도당에서 관리하는 이중체계였고, 문상길은 남로당 중앙이 관리한 프락치였다는 사실이다.

‘투쟁보고서’엔 박 대령 부임 직후인 5월 20일 문상길 중위가 부대원 41명(문건엔 43명)을 남로당에 합류하도록 탈영시켰다는 내용도 나온다. 문 중위는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의 사주를 받아 박 대령을 암살한 죄로 기소됐다.

남로당이 박 대령을 암살했다는 사실은 미군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1948년 6월 20일 자로 작성한 미군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는 ‘남로당 제주읍 특위(特委)가 11연대장을 살해했다’고 썼다. 이 보고서는 남로당 조직원들과 접촉한 포로 심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했고, 일부가 ‘4·3 보고서’에도 실렸다. 하지만 ‘4·3 보고서’나 KBS ‘암살 1948’은 박진경 암살을 다룬 대목에서 남로당이 박 대령을 암살했다는 내용을 담은 이 두 자료는 누락시켰다.

박진경 암살은 직전 연대장 김익렬과 남로당 무장책 김달삼과의 평화협상과 함께 4·3사건의 성격을 가늠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4·3 보고서’와 ‘암살 1948’은 미 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평화협상을 깨고 강경진압에 나섰고, 박진경 연대장이 이 방침에 따랐기 때문에 암살당한 것처럼 정리했다. ‘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봉기했다’는 ‘남로당 4·3 사관(史觀)’을 따라가는 모양새다. ‘4·3 보고서’ 작성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사퇴한 나종삼(79) 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은 “박진경 대령 암살 미화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운 미 군정에 4·3사건 책임을 돌리는 남로당 입장에 선 사관(史觀)”이라며 “박진경 대령이 9연대를 이끄는 동안 제주도민을 집단 학살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공개해달라”고 했다.

신혼 아내 유산, 평생 정신질환으로 요양원

당시 윌리엄 딘 미 군정장관은 박 대령이 암살된 그날 낮 총포 전문가 2명을 대동하고 제주도에 내려와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고 박 대령 시신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박 대령의 장례는 6월 22일 서울 남산동의 조선경비대 총사령부에서 육군장(葬) 1호로 거행됐다. 창군 이래 연대장급 고위 지휘관으로서는 첫 전사(戰死)였기 때문이다.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 등 각계 인사가 참여했고 당시 신문에도 눈에 띄게 보도됐다. 박 대령 암살범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1948년 9월 총살형이 집행됐다.

박진경 대령은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타계 1년 전 결혼한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으나 암살 소식을 듣고 유산했다. 40여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집안에선 당시 고교생이던 장조카 박익주(朴翊柱·2020년 타계)씨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박익주씨는 6·25전쟁 때 임관해 준장으로 예편, 남해에서 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익주씨의 장남인 박철균씨도 육사 42기로 준장으로 예편했다.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대표 전민정·이하 4·3시민연대)와 4·3역사왜곡반대학부모도민연대(대표 신혜경)는 지난 4월 27일 KBS제주총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로당 프락치인 암살범을 미화하는 다큐를 내보낸 KBS에 대해 경악한다’며 항의했다. 4·3시민연대는 지난 4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KBS ‘암살 1948’이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암살범을 미화했다며 제소했다. 유족들은 KBS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 중이다.

‘스딸린 대원수 만세’ 외친 김달삼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 친일(親日) 청산을 못 하고 친일세력들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다시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7월 초 여권 대선후보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이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듯, 한국 현대사 특히 대한민국 탄생을 둘러싼 견해 차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다. 4·3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은 겉으로는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같은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5·10총선을 준비하던 공무원과 경찰, 우익인사와 그 가족을 학살하고,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다.

4·3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총책 김달삼은 그해 8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연설했는데 그 연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쓰딸린 대원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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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조선일보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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