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한국의 시드볼트 외관.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한국의 시드볼트 외관.

코로나19 대전염병 사태, 지구촌 곳곳에서 발발하는 이상기온, 범상치 않은 태풍·지진…. 인류는 언제 어떻게 맞닥뜨릴지 모를 대재앙에 대비해 10여년 전 특이한 ‘기밀시설’을 마련했다. 이른바 ‘시드볼트(Seed Vault)’.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시설은 자연재해나 전쟁·핵폭발 등으로 주요 식물이 멸종할 것에 대비해 만들어진 일종의 종자 저장시설이다. 씨앗을 의미하는 시드(Seed)와 금고를 뜻하는 볼트(Vault)를 합해 이름을 지었다. 식물 종자를 중복 보존해뒀다 세상이 폐허가 됐을 시 꺼내 활용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현대판 ‘노아의 방주’다.

이 시설은 얼핏 듣기에 유럽 등 선진국에 설치됐을 법하지만 실상은 노르웨이와 한국, 단 두 나라에 설치·운영되고 있다. 전 세계 식물 종자의 미래를 한국이 함께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서 한국과 노르웨이만 운영

한국 시드볼트의 경우 2011년 산림청이 수립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본계획에 따라 경상북도 봉화군에 설립했다. 2011년 공사에 착수하여 2013년과 2015년 각각 저장소와 터널을 완공했다. 시범 운영 절차를 밟아 정식 가동이 이뤄진 건 2016년부터. 현재는 산림청 산하 한국수목원관리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시드볼트운영센터가 운영·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해당 시드볼트가 위치한 곳에 가면 지상에서 보이는 건물은 약 140㎡ 면적의 돔 형태에 불과하지만, 지하 46m 아래엔 총면적 4327㎡의 지하 공간이 숨겨져 있다. 중장기 저장시설, 현미경실, 발아실험실 등이 설치된 곳이다. 수많은 출입문, CCTV를 지나야만 다다를 수 있다. 산림청 관계자는 “2019년 시드볼트가 국가보안시설로 등록되면서 일반인 출입은 물론 직원들도 정기점검 등 일부를 제외하면 출입이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시드볼트는 주로 국내외 국가기관이나 공·사립 수목원, 대학교 연구시설 등으로부터 종자를 기탁받아 보존하고 있다.

올 3월 기준 종자저장 현황에 따르면 총 4751종 9만5395점이 저장됐다. 이 중 자생식물은 48.1%(2166종), 희귀식물은 57.6%(329종), 특산식물 50%(180종) 등이다. 이상용 시드볼트운영센터장은 “같은 ‘종’이라 하더라도 채집 시기와 지역이 다르면 이를 ‘점’으로 다시 나눈다. 예를 들어 지리산 천왕봉에서 채집한 구상나무 종자와 설악산에서 채집한 구상나무 종자는 서로 다른 점으로 분류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시설은 최대 종자 200만점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당장은 국내 식물 종자 보존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국의 시드볼트는 노르웨이 시드볼트와 운영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노르웨이 정부는 2008년 스발바르제도(Svalbard Is.)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섬에 시드볼트를 설립했는데, 이들은 주로 작물(식량) 종자 보존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 시드볼트가 야생 종자 보존에 주력하는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야생 종자의 절반가량이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점을 더 큰 문제로 봤다. 지난해 영국 큐 왕립식물원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식물 30만종 중 약 40%가 멸종위기에 처했다. 국내의 경우 강원도·전라도 등에서 자라는 ‘광릉요강꽃’, 경북·경남·전남 해발 600m 이하에서 자라는 ‘세뿔투구꽃’, 한라산·지리산 등 고산지대에서 사는 ‘구상나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시드볼트’ 직원들이 방한복을 입고 식물 종자를 관리하고 있다. ⓒphoto 시드볼트운영센터
‘시드볼트’ 직원들이 방한복을 입고 식물 종자를 관리하고 있다. ⓒphoto 시드볼트운영센터

9만5395점 저장, 해외서도 기탁

이상용 센터장은 “이들 식물의 쓰임새나 활용도가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존 필요성은 더욱 높아진다”며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원료만 해도 팔각이란 식물에서 추출했다”라고 말했다. 이들 종자의 소유권은 기탁 기관들이 갖고 있다. 재난 상황이 벌어지거나 식물이 멸종위기에 처했을 시, 수탁 기관의 승인을 받아 해당 종자를 반출·사용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드볼트 시설엔 갖가지 기술력이 접목돼 있다. 통상적으로 식물 종자의 수명은 온도가 낮고 건조한 환경에서 길어진다. 이 때문에 시드볼트 저장소는 항시 영하 20도에 상대 습도 40%를 유지한다. 직원들이 시드볼트 내부에 들어갈 때 방한복을 입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단전 대비 체계도 촘촘하다. 이상용 센터장은 “시설 전체가 전기를 사용해 가동되고 있다 보니 혹시 모를 단전을 막고자 서로 다른 전력원 두 군데에서 전기를 끌어오고 있다. 한 군데가 끊어져도 다른 데서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두 군데 모두 끊길 경우 내부 비상발전시설을 가동해 약 한 달간 전기 공급 없이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시드볼트 저장소를 지하 46m 아래에 둔 것도 나름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한 온도·습도 유지와 핵미사일 등 폭격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다. 2010년대 시드볼트 설립 당시 벙커 버스터(방공호 등 내부를 파괴하는 폭탄)가 통상적으로 뚫을 수 있는 두께는 최대 30m였다. 정부는 시드볼트를 그보다 더 아래에 설치해 안전성을 갖추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하 터널 및 저장소가 진도 6.9의 지진을 버틸 수 있는 내진설계하에 60㎝ 삼중 철망 구조로 된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진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시드볼트가 지금의 경북 봉화군에 위치하고 있는 건 역사성을 고려한 조치다. 이 센터장은 “봉화군은 예로부터 흉년과 전염병, 전쟁과 같은 삼재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십승지(천재나 싸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 중 한 곳”이라며 “나름 역사성까지 감안해 확보한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시드볼트에 매년 5억원가량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전기요금과 인건비, 각종 물품 구매비, 네트워크 운영비 등을 포함한 규모다. 해당 예산은 큰 변화 없이 매년 지급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시드볼트의 존립 필요성과 취지엔 모두 공감했다는 이야기다.

이상용 센터장은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면 해외 종자 수집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 시드볼트가 노르웨이 시설보다 뒤늦게 지어졌을 뿐더러 시설 자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떨어지다 보니 다소 어려움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국내 시드볼트에 종자를 기탁한 해외 기관은 4개국(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조지아)의 8개 기관 정도다.

시드볼트 관계자들의 염원은 단 하나다. ‘시드볼트가 열리지 않는 것’. 시드볼트 저장소가 열려 보존 종자가 밖으로 나온다는 건 바꿔 말해 인류가 위협에 처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르웨이 시드볼트의 경우 내전을 겪던 시리아의 요청으로 한 차례 열리기도 했다. 시드볼트운영센터 측은 “한국 시드볼트의 문만큼은 굳건히 닫혀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키워드

#포커스
이성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