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직로 ‘아쇼카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의 농도’ 전시. 세대 간 연결을 통해 고령화 해법을 찾은 10명의 혁신가를 만날 수 있다. ⓒphoto 아쇼카한국
서울 종로구 사직로 ‘아쇼카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의 농도’ 전시. 세대 간 연결을 통해 고령화 해법을 찾은 10명의 혁신가를 만날 수 있다. ⓒphoto 아쇼카한국

축구공은 차 본 적도 없는 그녀들이 축구 리그를 벌인다? SBS의 축구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이 화제다. 초보들의 어설픈 축구 경기가 주는 감동에 시청자들이 열광하고 있다. 감동의 포인트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녀들의 진정성이다. 축구는 남자들의 스포츠라는 편견을 깨고 ‘골 때리는 그녀들’은 누구나 거친 운동장을 누비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원조는 ‘골 때리는 할머니들’이다. 200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할머니 축구단(Soccer Grannies)’이 창단됐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시골 할머니들이 주축이 된 축구단은 절망적이던 할머니들의 삶을 바꿨고 남아공 전역에 희망을 전파했다.

‘할머니 축구단’을 만든 사람은 베카 네탄위시(53)이다. 당시 방송국에서 일하던 베카는 대장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갔다 아픈 노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 계기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농촌 지역 노인들의 현실은 더없이 열악했다. 에이즈로 죽거나 도시로 돈 벌러 떠난 자식들을 대신해 손자들을 돌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난과 책임감에 짓눌린 이들은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치매라도 걸리면 온 마을로부터 내쳐짐을 당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화형에 처해질 만큼 불행의 악순환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하던 베카가 떠올린 것은 뜻밖에도 축구였다. 50세 이상 여성들을 대상으로 출신 지역에 따라 축구팀을 조직했다. 짧은 치마를 입는 것조차 금기시된 사회에서 긴치마를 입고 뒤뚱거리는 할머니 축구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왔을 리 없다. 베카는 팀 이름을 ‘할머니’를 뜻하는 ‘바케구라 바케구라(Vhakhegura Vhakhegura)’로 붙이고 ‘Stay strong, live long!(튼튼하게 오래오래 살자)’을 슬로건으로 세상의 편견에 맞섰다.

50~84세의 할머니들은 발로 공을 차며 자신감을 찾고 몸도 건강해졌다. 회비를 내서 힘든 팀원들을 돕고 서로에게 힘이 됐다. 베카는 다양한 대회를 열어 할머니들이 지역을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게 했다. 2019년 세계 최초로 열린 국제 시니어 여자축구 대회에서 ‘바케구라 바케구라’는 프랑스팀을 상대로 10 대 0 완승을 거뒀다. 축구팀의 평균 나이는 70세였다. 베카의 아이디어는 남아공 전역을 넘어 모잠비크, 짐바브웨 등 인근 국가로 확산됐다. 이들의 도전은 노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

베카 네탄위시는 사회혁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글로벌 비영리재단 ‘아쇼카’로부터 2014년 ‘펠로’로 선정됐다. ‘아쇼카 펠로’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낸 체인지메이커들이자 미래사회 솔루션 개발자들이다. 1980년 미국에서 출발한 ‘아쇼카’가 선정한 펠로는 지금까지 4000여명에 이른다. 펠로들이 교육, 인권, 환경, 고령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낸 솔루션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엄청난 자산이다.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사회혁신 뮤지엄 ‘아쇼카 스페이스’. ⓒphoto 아쇼카한국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사회혁신 뮤지엄 ‘아쇼카 스페이스’. ⓒphoto 아쇼카한국

세계의 혁신가를 만나는 법

이 혁신가들을 만나고 그들이 찾은 해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 아쇼카한국(대표 이혜영)이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만든 ‘아쇼카 스페이스’이다. 이곳에서는 현재 고령화 문제를 풀어낸 10명의 아쇼카 펠로를 소개하는 전시 ‘시간의 농도(Time & Gradation)’전(2022년 1월 31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10명의 혁신가는 노년층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소개한 베카도 그중 한 명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대 간의 연결을 통해 고령화 해법을 찾은 것이다.

미국의 아쇼카 펠로 마크 프리드먼(Marc Freedman)은 은퇴를 새로운 시작, 즉 ‘앙코르 커리어’로 규정하고 시니어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의미 있는 일에 쓰게 만들었다. 문제청소년의 멘토가 될 수 있게 매칭해주고 아이를 돌보게 했다. 청년들과 팀을 이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는 최근 ‘영원히 사는 법’이란 책을 내고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세대의 연결이다. 젊은이들 곁에 있어 주고 내가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종분리정책이 아니라 ‘에이지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세대 갈등이 심각한 시대에 되새겨봐야 할 이야기이다.

여성 칼럼니스트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인 엘런 굿맨(Ellen Goodman)은 ‘죽음’에 대한 대화를 금기시하는 문화에 도전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였다. 보호자로 중요한 의료적 선택을 해야 했지만 어머니가 원하는 치료나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어머니와 그런 대화를 한 번도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화 프로젝트’라는 재단을 설립하고 치매, 중증환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대화 툴킷’을 11개 언어로 만들어 무료 배포하고 있다.

공유승차 네트워크 ‘ITN 아메리카’를 만든 캐서린 프로이드는 자원봉사와 시간제 유급 드라이버 시스템을 결합해 운전이 어려운 노인들의 교통 문제를 혁신했다. 자신의 아들이 노인이 운전하는 차량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연 6만원(50~60달러) 정도의 가입비를 내고 월 일정액을 거치해두면 일반 택시 요금의 절반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예약만 하면 집 앞까지 달려온다. 자원봉사자는 50~60대의 은퇴자들로 봉사시간을 포인트로 적립한 후 더 나이 들어 ITN 이용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한국의 펠로도 있다. 전북 고창의 폐교를 누구나 책을 펴낼 수 있는 ‘마법의 학교’로 만든 ‘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이다. “한 권의 책을 펴내는 것은 한 개인의 생각을 다음 세대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 대표는 마을 노인들을 학교로 불러들여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짓는 마을로 만들었다.

덴마크의 올레 카소는 자원봉사자가 요양원 노인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도시를 달리는 ‘함께 자전거 타기’ 운동을 시작했다. 고립된 노인들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젊은 자원봉사자는 대화를 나누며 인생을 배운다. 그의 아이디어는 2020년 기준 50여개국에서 3만3000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는 글로벌 프로젝트가 됐다.

전시 프로그램 중 하나인 ‘감정 선상에서’. 죽음, 고령화와 관련된 단어를 열거해 놓고 관객들의 감정 단어들을 실로 연결하게 했다. 각기 다른 감정 선들이 쌓이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photo 아쇼카한국
전시 프로그램 중 하나인 ‘감정 선상에서’. 죽음, 고령화와 관련된 단어를 열거해 놓고 관객들의 감정 단어들을 실로 연결하게 했다. 각기 다른 감정 선들이 쌓이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photo 아쇼카한국

나와 닮은 혁신가는 누구?

‘시간의 농도’전은 일반적인 전시와는 다르다. 전시의 핵심은 ‘질문’이다. 혁신가를 만나려면 먼저 ‘질문의 방’을 거쳐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전시장 입구에 있는 큐알 코드를 찍으면 전시 앱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다음은 여러 개의 거울로 구분이 된 ‘질문의 방’이 기다리고 있다. 거울 곳곳에는 고령화와 관련된 50개의 질문이 흩어져 있다. 10명의 혁신가와 연결된 질문들이다.

“죽음과 연관해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는 무엇인가요?”

“자신의 장례식에 쓰고 싶은 사진과 음악이 있나요?”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마음에 꽂히는 질문들을 앱에 저장한다. 내가 선택한 질문을 통해 나이 듦, 죽음에 대한 나의 인식을 알고, 비슷한 질문을 던진 혁신가는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질문의 방을 나오면 나와 닮은 혁신가를 가르쳐 준다. 이렇게 연결된 혁신가와 그의 스토리가 전하는 농도는 특별하다. 개인의 관심사와 성향에 따른 맞춤형 전시인 셈이다.

전시를 준비한 이혜영 아쇼카한국 대표는 “고령화는 전 세계의 문제이다. 글로벌 아쇼카도 지구온난화와 함께 고령화를 주요 이슈로 다루고 있다. 100세 시대에 교육, 고용, 제도 등 모든 시스템은 70~80세 수명에 맞춰져 있다. 배우고, 일하고, 은퇴하는 3단계의 삶이 단계별로 균형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1, 2단계는 그대로이고 3단계만 무한정 늘어났다. 10명의 혁신가들을 관통하는 것은 ‘연결’이다.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세대를 통해 늙음에 대한 두려움을, 젊은 세대는 거꾸로 나이 듦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아쇼카 스페이스’는 세계 최초의 사회혁신 뮤지엄이다. 이 대표는 4000명의 펠로들이 쌓아놓은 빅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세상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변화시킨 그들의 여정은 한 명 한 명이 흥미롭고 새로웠다. ‘아쇼카의 자산을 확산시키고 대중들과 혁신가들을 만나게 하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던 이 대표는 아카이빙(archiving)이 첫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구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아쇼카 스페이스’와 ‘디지털랩’이었다. 이 대표는 “21세기 인간의 두 가지 언어는 디지털과 경험이다. 그 문법에 맞게 혁신가들의 이야기를 옮겼다”고 말했다.

디지털 전략은 ‘체인지메이커 라이브러리’라는 앱을 만든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펠로들의 스토리를 앱에 모두 담고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등 6개 언어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세계 어디서든 앱을 다운받으면 펠로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는 인권, 환경, 의료보건 등 분야별로 펠로들을 분류해놓았지만 인공지능을 통해 관심 키워드를 넣으면 그에 맞는 혁신가를 찾아낼 수 있게 개발 중이다. 아쇼카 스페이스는 경험의 공간이다. ‘시간의 농도’전처럼 펠로들과 대중을 연결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일을 이어갈 계획이다. ‘아쇼카 스페이스’와 앱이 만들어진 후 각국 아쇼카 지부로부터 환호와 감사 인사가 쏟아지고 있다.

이는 글로벌 아쇼카도 하지 못한 일이다. 글로벌 아쇼카의 지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 대표가 겁 없이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5년 전 ‘교육 혁신’을 위해 한국 아쇼카에 개인 주식 5만주를 기부한 덕분이다. 이 인연으로 이 대표는 김범수 의장이 재산 절반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사회공헌 재단 ‘브라이언 임팩트’의 이사진에도 들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혁신이 가진 힘은 확산성이다. 혁신은 또 다른 혁신으로 이어진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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