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의 이창호 대표.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비영리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의 이창호 대표.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국내에서 ‘사채업’이라 하면 고금리에 미등록 대부업체가 영위하는 불법 사채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무담보·무이자·무보증으로 돈을 빌려주는 이른바 ‘착한 사채’도 존재한다. 이 사채는 대출 이자로 수익을 노리기보다 대출자의 회생을 도와 상환율을 높이는 데에 집중한다. 대출의 기준은 담보물, 신용도가 아닌 부양가족 수, 빈곤의 정도 등이다. 비영리 사단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의 이창호(67) 대표는 10여년 전 이런 대출업을 기획해 올 8월까지 총 4342건의 대출을 진행했다. 총대출금액은 14억9405만원. 지난 9월 6일 서울 서초구에서 만난 이 대표는 “제도권에서 규정하는 신용불량자는 돈이 없어 신용이 불량인 것이지, 마음의 신용까지 불량인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착한 대출 상환율은 올 8월 기준 88%다. 시중은행 대출 상환율 못지않은 셈인데, ‘신용’에 대한 그의 남다른 믿음이 만든 결과였다.

더불어사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대출 신청 사연.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더불어사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대출 신청 사연.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대출 관련 커뮤니티에서 입소문

이 대표는 본래 20대 때부터 국내외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서 근무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자동차보다는 신용협동조합(신협)에 있었다. 신협은 지역이나 직장 등 유대관계가 있는 구성원끼리 목돈을 모아 서로의 신뢰만으로 자금을 융통하는 일종의 ‘상호금융’이다. 1970년대 노동현장에서 부당함을 적지 않게 겪었던 그는 이 상호금융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동일 노동을 하는데 임금 차별을 받는 등의 부당함을 경험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 쌓여갔다. 열심히 일한다 한들 큰돈을 어떻게 모을 것이며 나를 믿어줄 곳은 있을까라는 고민들이 들었다. 그때 마음의 위로가 됐던 건 조직 구성원들과 함께했던 신협의 상호금융이었다. 수평적이고 민주적,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이 관계가 이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틈틈이 상호금융을 공부하며 자택 근처에 조직됐던 신협에선 비상근 감사로 일하기도 했다. 2007년 직장에서 명예퇴직한 후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 교육을 수강했다. 마이크로크레디트는 상호금융의 일환으로 금융사와 거래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에 무담보로 자금을 빌려주는 민간 주도의 대출제도다. 2009년 이 대표는 이를 처음 고안해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교수를 직접 만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에 착한 대출, 즉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계획이 이때부터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2011년 비영리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을 설립해 이를 조금씩 구체화했다. 법인 자본금은 500만원이었다. 주변 지인 4~5명에게 손을 벌려 만든 금액이었다. 이듬해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끌어모았고 3000만원이란 종잣돈으로 본격적인 대출 사업에 나섰다. 그가 당시 내세운 원칙은 ‘신용도는 절대 확인하지 않는다’였다.

“신용도가 아닌 대출 사연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부양가족 수, 기초생활수급자 여부, 한부모가정 여부, 임대주택 거주 여부, 차상위 계층 여부 등이 주요 기준이 됐다.” 그가 대출자에게 요구하는 서류는 약정서, 주민등록초본, 개인정보제공 동의서 정도였다. 약정서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삭제’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신용도와 관련한 정보는 일절 조회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첫 대출자는 2012년 이 대표의 지인을 통해 연락 온 예비 택배기사였다. 그는 택배 일을 해보려 했으나 막상 택배 차량 구입에 필요한 계약금 마련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이 대표는 계약금으로 필요한 100만원을 선뜻 빌려줬다. 대출 담보는 없었고 오로지 “꼭 갚겠다”는 대출 신청자의 말만 믿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100만원은 상환됐지만 이자는 받지 않았다. 무담보·무보증·무이자를 기조로 한 첫 ‘착한 대출’이었다.

그의 이 같은 대출업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대출 신청은 점차 늘었다. ‘대출나라’ ‘복아힘’ 등 대출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다수 회자됐다. 사람들은 더불어사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이지와 그의 휴대폰으로 직접 연락했다. 지난 9월 6일 기준 더불어사는사람들 인터넷 홈페에지에 신청된 누적 대출 신청 건수만 4891건이다.

이 대표는 사업이 커가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이자 수익을 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런 대출업을 하는 건 신용 없이도 살 수 있는 진짜 신용사회를 만들고 싶어서였다”라며 “쉽진 않지만 내 생계비는 이와는 별개의 것을 통해 마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대출자금은 모두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취하는 게 있다면 대출 상담 시 사용하는 휴대폰 요금 정도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직원은 따로 두지 않았고, 업무는 지금도 지인 사무실 한편에서 이어간다. 장부상 대출잔액은 2억3648만원이지만 이 금액은 대출한 금액이 모두 상환됐을 때의 수치다. 이 대표는 “매달 5000만원 정도를 갖고 대출 사업을 영위한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2011년 더불어사는사람들 창립총회 사진. ⓒphoto 이창호
2011년 더불어사는사람들 창립총회 사진. ⓒphoto 이창호

국선변호사 통해 ‘옥중 대출’도

이 대표가 지금까지 돈을 빌려준 이들의 사연은 다양했다. ‘남편 가정폭력에 집에서 도망 나와 오피스텔에서 아이와 근근이 살아가는 여성’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실직으로 초등학생 아이 수학여행비도 내지 못했던 어머니’ ‘백일 지난 아이의 기저귀 구입비가 부족했던 출산모’ ‘퇴직 후 신용불량이 되어 제주도 취업 자리를 알아보러 내려갔다 다시 서울로 돌아올 돈이 없던 남성’ ‘사업 실패로 부모님 수술비 마련이 불가했던 아들’ ‘빚더미에 앉아 공과금 낼 돈도 없던 부부’….

이들에게 이 대표의 착한 대출은 그야말로 삶의 희망이었다고 한다. 한 대출자는 “실제 빌린 돈은 30만원에 불과하지만 300만원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손길이었다”며 “밀린 공과금과 관리비를 내고 2만원이 남아 딸아이 어린이날 선물도 준비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출자는 “통화 후 30분도 채 되지 않아 입금까지…. 비록 유산이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산부인과에 대기하던 중 한 줄기 희망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수많은 대출 사연 중 ‘옥중 대출’ 건을 가장 기억에 남는 대출 사연으로 꼽는다. 이 대표는 “구치소에서 연락이 왔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다 형편이 어려워 돈을 갖고 달아나다 붙잡힌 분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연을 듣곤 국선변호사를 통해 돈을 빌려줬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편의점 주인을 찾아가 합의를 부탁하며 그의 재기를 도왔다고도 한다.

이 대표는 돈만 빌려주지 않았다. 일부 대출 신청자에겐 ‘가계부’를 요구해 소비패턴을 분석해주기도 한다. 그는 “돈을 빌려주면서도 과소비 여부, 돈 절약 방법 등을 검토해 대출자가 자생할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연에 따라선 돈 대신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료 진료비나 생필품 구입비 마련을 목표로 대출을 신청하는 이들에게 필요로 하는 재화·서비스를 직접 전달하는 식이다. “돈이 아니라 재화·서비스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경우 신청자들은 추후에 돈을 갚을 필요도 없고 그 돈은 또 다른 이들의 대출 자금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를 위해 이 대표가 연락한 병원 관계자만 수십여 명이다. 현재 더불어사는사람들 임원 및 자문위원으로 50여명의 이름이 기재돼 있는데, 대다수는 이런 식으로 대출 및 복지 사업에 참여한 이들이다.

2018년 복지기관으로부터 지원받은 과자 700상자를 봉사자들과 함께 소외계층에 나눠주는 모습. 더불어사는사람들은 대출 외에 나눔 복지 사업도 진행한다. ⓒphoto 이창호
2018년 복지기관으로부터 지원받은 과자 700상자를 봉사자들과 함께 소외계층에 나눠주는 모습. 더불어사는사람들은 대출 외에 나눔 복지 사업도 진행한다. ⓒphoto 이창호

“돈이 아닌 희망과 위로를 빌려줬다”

이 대표의 착한 대출은 오롯이 상호신뢰만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도덕적 해이도 적지 않다. 전체 대출자 중 약 10%는 돈을 갚지 않고 연락을 끊는다고 한다. 이 대표가 ‘착한 대출 한도 개인당 200만원’ ‘신규 대출자의 첫 대출 한도 개인당 30만원’ 규정을 만든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 대표는 “30만원을 상환하면 그때부터 대출 한도를 조금씩 늘려주고 있다”며 “그래도 상환율 88%는 시중은행과 비교했을 때 낮은 수치는 아니라 본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대출 자체가 이들에게 위로가 됐다고 본다. “일단 믿어주고 존중해준 것이 대출 신청자들에게 위로가 됐던 것은 아닌가 싶다. 돈을 빌려주며 ‘잘할 수 있다’ ‘희망을 잃지 마라’ 등의 메시지를 항상 드린다. 이는 높은 수준의 상환율로 이어졌고 개개인 입장에선 소액이라 할지라도 상환을 통해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본다.”

최근 금융감독원 등 정부기관에선 더불어사는사람들에 협조를 구하고도 있다. 생계유지가 곤란하거나 상환 능력이 부족한 일부 민원인의 대출 가능 여부를 판단했으나 규정상 쉽지 않아 대출을 도와달라는 것이 연락의 주된 내용이다. 서민금융진흥원과는 지난 2015년부터 위탁계약을 맺고 창업대출을 공동으로 지원하고 있다. 개인당 최고 7000만원 한도로 이자는 연 3%로 하는 대출인데 신용등급은 역시 따지지 않는다.

이 대표의 바람이 있다면 향후 더불어사는사람들의 대출 내역이 실제 제도권 내 금융사의 신용도 책정 기준 중 하나로 반영되는 것이다. “최근 10년간 신용조회, 담보 없이 4000건이 넘는 대출을 진행했다. 이게 진짜 신용 지표이지 않을까 싶다. 이분들이 사회에서 다시 돈을 빌려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더 많은 사회적 가치, 유대가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이성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