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1일 BBC와 인터뷰한 탈북자 김국송(가명)씨. ⓒphoto BBC
지난 10월 11일 BBC와 인터뷰한 탈북자 김국송(가명)씨. ⓒphoto BBC

지난 10월 11일(현지시각) 영국 BBC 방송은 한국으로 탈북한 김국송(가명)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김씨는 2014년 탈북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인 정찰총국 대좌(우리의 대령)로 고위 공작원이었다. 김씨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의미 있는 증언을 했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1990년대 초 북한 간첩이 청와대에 침투하여 5~6년간 근무하다가 무사히 북한으로 복귀하여 314연락소에서 근무했다는 부분이다. 과연 탈북민 김씨의 증언은 사실일까?

필자는 이 증언을 접하고 처음에는 반사적으로 회의적인 느낌을 가졌다. 청와대 근무자는 국정원과 경찰청의 정밀 신원조사를 거쳐야 한다. 신원조사는 대상자 출생 시부터 성장과정, 가족관계, 학력, 경력, 사상관, 정당관계, 주변의 평판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하는데 북한에서 직파된 간첩이 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만 세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 직파간첩이 국내에 침투하여 위장신분으로 합법적 거점을 확보하고 최소한 10년 이상 장기간 거주(고정간첩)한 후 정치권에 진출하여 활동하다 청와대 침투했을 경우이다. 둘째는 북한 직파간첩에 포섭된 내국인 간첩이 장기간 암약하다 청와대에 침투했을 경우이다. 셋째, 좌파 정부 시절에 간혹 청와대 실장급 고위 인사가 신원조사 결과 부적합한 인사에 대해 직접 신원보증을 하고 특별 채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도 형식적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이다. 필자가 판단할 때는 첫 번째나 두 번째 유형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청와대에 침투했던 여간첩 김옥화

이러한 판단의 배경으로는 김씨가 이 시점에 이처럼 엄청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30년간 북한의 정보기관에서 근무했고 탈북 직전까지 대남공작의 본산인 정찰총국 해외공작파트에서 근무한 김씨가 실제 고급정보를 접했던 사실을 밝힌 것이라 판단된다. 문제는 이른바 첩보 출처(source)의 신뢰성이다. 김씨가 이 사실을 문서(비밀 공작서류)로 접했는지, 대상자를 접촉해서 직접 들은 것인지, 아니면 제3자에게 들은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제3자라면 대남공작부서의 고위인사들이 당 간부나 부하들에게 대남공작의 성과를 자랑하며 과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우리 공작원이 남조선 청와대까지 침투하여 근무하다 복귀했다”고 자랑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필자가 김씨 증언에 신뢰성을 두는 이유 중 또 하나는 침투 시점과 기간, 복귀 후 근무부서(314연락소)를 특정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국내 입국 후 국정원의 전략신문 과정에서 이 사실을 진술했다면 국정원의 신문 역량이 탁월해 영국 BBC와는 달리 구체적인 사실, 즉 대상자 이름과 경력 등에 대해 상세히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국정원은 김씨의 증언에 대해 신속하게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신뢰성이 낮더라도 NCND(Neither Confirm Nor Deny·긍정도 부정도 아님)의 모호한 자세를 취하는 정보기관의 속성에 비추어 이례적이다.

북한의 대남공작 75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김씨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철저한 보안 속에 공개되지 않았던 청와대 침투 간첩사건을 소개한다. 당국의 간첩사건 기록물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과 ‘월간조선’이 공동으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토론자로 참석해, 그동안 묻혀 있었던 청와대 침투 여간첩 김옥화 사건(1968)을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이 내용은 월간조선 2017년 2월호에 수록되어 있다.

2001년 검거된 FBI 방첩국장 로버트 핸슨. 27년간 소련 및 러시아 간첩으로 활동했다. ⓒphoto nypost.com
2001년 검거된 FBI 방첩국장 로버트 핸슨. 27년간 소련 및 러시아 간첩으로 활동했다. ⓒphoto nypost.com

1968년 이른바 1·21사태(북한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 직후 북한 공작원들의 유류품을 분류·분석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내부 약도가 발견됐다. 그런데 내부 약도가 너무 정확해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치안국(현 경찰청), 군 방첩대(현 안보지원사) 등 대공수사 관계자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이렇게 내부 약도와 경호원들의 배치 실태 등을 상세히 알 수 있었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공수사팀은 분명 청와대 안에 북한의 간첩망이 침투해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전 직원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서인 김옥화가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김옥화는 국내 유명 여자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했는데 거기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을 했다. 바로 남편이 북한에 이미 포섭된 간첩이었다.

김옥화는 유학을 마치고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경호실장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김옥화는 경호실장을 수행하여 대통령 집무실, 관저 등 청와대 경내를 제한 없이 들락거리며 확인한 내부 약도와 경호인력에 관한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고 이것이 고스란히 북한으로 전달되었다. 북한은 1968년 1월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 특수요원 31명을 침투시켰고 김신조 일당은 청와대 내부 약도를 가지고 자신 있게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겠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김옥화 사건은 한국에서 가장 보안이 강한 청와대도 뚫을 정도로 북한의 대남공작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확인시켜준 사례이다.

국제첩보 운동사를 보면 적성국 핵심부서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암약한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수석비서관 등으로 암약하다 1994년 체포된 동독 간첩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 9년간 소련 및 러시아 간첩으로 활동하다 1994년 적발된 CIA 방첩관 앨드리치 에임스(Aldrich Hazen Ames), 27년간 소련 및 러시아 간첩으로 활동하다 2001년 검거된 FBI 방첩국장 로버트 핸슨(Robert Philip Hanssen)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CIA 에임스는 소련에서 활동 중인 미국 스파이 명단을 KGB에 넘겨주어 이 중 10여명이 체포되고 미국이 어렵게 구축한 소련 내 스파이망이 와해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1968년 1·21사태 주범인 김신조. 청와대에 근무했던 간첩 김옥화에 대한 수사는 1·21사태를 일으킨 북한 공작원들의 유류품을 분류·분석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상세 내부 약도가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photo 위키피디아
1968년 1·21사태 주범인 김신조. 청와대에 근무했던 간첩 김옥화에 대한 수사는 1·21사태를 일으킨 북한 공작원들의 유류품을 분류·분석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상세 내부 약도가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photo 위키피디아

국제첩보 운동사에서 확인된 사례들

우리는 국제첩보 운동사의 교훈을 통해 국내에도 수많은 간첩이 발호하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적발된 간첩 건수만 2000회를 상회한다. 1997년 한국에 입국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밝힌, “남한 쪽 깊숙한 곳에 북한 쪽 사람이 있으며 남한에 5만여명의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언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이번에 정찰총국 출신 탈북민 김씨는 영국 BBC와의 대담에서 청와대 침투 간첩건 외에도 “북한 요원들이 남한의 중요한 기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황장엽 비서와 궤를 같이하는 증언이다.

북한의 대남간첩공작은 날로 진화하며 남북 평화 국면에도 상관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적발된 청주간첩단 사건이 그 사례이다. 특히 좌파 정부 때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경력자들이 민주화운동가란 미명하에 정부 부서나 위원회뿐만 아니라 청와대에까지 진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이 정부 들어서 간첩사건 연루자가 최고정보기관의 간부로 발탁된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3년간 유예)되고 ‘안보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 작업이 추진되는 등 대공무력화 환경을 틈 타 북한의 대남공작은 더욱 정교하게 공세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영국 BBC방송에서 증언한 청와대 침투간첩의 진위와 실체를 확인할 방법을 제안한다. 이 정부하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년 3월 헌법적 가치를 제대로 구현할 정부가 들어서면 대대적인 간첩색출 작전을 진행해야 한다. 먼저 국정원, 경찰, 안보지원사 등의 정예 안보수사관으로 구성된 (가칭) 간첩소탕 TF를 구성해야 한다. 1990년 초부터 최대치 기간인 1990~1998년까지를 설정해 이 기간 중 청와대에 근무했던 전 직원의 리스트를 파악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추적하면 간첩침투 증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에 근무하다 북한에 복귀했다면 당연히 국내에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청와대 근무자 중 현재 국내에 거주하지 않는 자를 먼저 찾아내고 해외 체류자들의 소재를 확인하는 식으로 추적하면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신원조회 자료를 정밀분석하여 대조하면 대상자를 특정하거나 증언의 허구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대상자를 특정했다면, 누가 이 간첩을 청와대에 추천했는지 그 배후세력을 추적하고 5~6년간 청와대에 암약하며 무슨 정보를 어떻게 입수해 넘겼는지, 정치권을 대상으로 어떠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는지 등의 실체도 추적해야 할 것이다. 안보수사기관이 이러한 작업을 소홀히 한다면 중대한 직무유기를 범하는 것이며 안보의 무장해제를 자인하는 것이다.

정찰총국 고위급 탈북민 김씨가 인터뷰 말미에 “우리가 설정한 전략은 계속됩니다. 북한이 0.01%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란 경고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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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전 경찰대학 안보대책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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