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동아시아 고대사(史)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광개토태왕비 ‘신묘년조(辛卯年條)’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 신묘년조는 광개토태왕비에 신묘년(辛卯年·391) 이래 있었던 일을 기록한 기사(記事)로, 소위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라고 흔히 해석된다. 과거 일제는 신묘년조를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임나(任那)일본부’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아, 한반도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측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태왕비의 존재가 1875년 전후에 다시 알려진 이래 한·중·일 여러 학자들은 다양한 해독안을 제시하면서 논쟁을 벌여왔고 이러한 논쟁은 지금까지 지속 중이다. 1884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사코 가케아키(酒勾景信) 중위가 광개토태왕비 탁본을 처음 일본에 가져온 이후 비문 변조설도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중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였던 신묘년조 기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과거 일본 학자들의 해석이 거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터였다.

하지만 ‘신묘년조’ 기사에서 지금까지 ‘해(海)’로 해석해온 글자가 실상은 ‘횟수’ 등을 뜻하는 ‘매(每)’이고 백잔(백제)과 신라 사이에 들어가는 두 글자는 ‘동강(東降·동쪽을 강복시키다)’이었다는 해석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이 경우 신묘년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왜가 신묘년 이래 건너올 때마다 매번 깨뜨렸는데, 백잔이 동쪽의 신라 변경을 강복(降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신묘년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사람은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이다. 박광민 연구위원은 1994년 임기중 동국대 교수가 중국 베이징대에서 발굴한 청(淸)말의 금석학자 반조음(潘祖蔭)본 ‘원석(原石)탁본’을 비롯, 여러 종의 탁본과 고대 금석문 자료들을 한 글자씩 대조하면서 신묘년조를 재해석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10월까지 총 3편의 논문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신묘년조에 관한 해석이 들어간 3편의 논문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

지난 11월 22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자택 겸 연구실인 ‘낙송재(洛誦齋)’에서 만난 박광민 연구위원은 “2013년 광개토태왕비를 처음 찾았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게 됐고, 지난해 1월부터 각종 탁본과 자료들을 대비하며 한 글자씩 새롭게 해석하게 됐다”고 밝혔다.

“래도해파 아닌 래도매파”

그에 따르면, 가장 논란이 되는 신묘년조의 소위 ‘해(海)’에 관한 주장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사실 여러 종류의 탁본들만 놓고 보면, 여기에 쓰인 글자가 ‘해(海)’인지 ‘매(每)’인지, 아니면 제3의 글자인지 육안으로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사(泗)’ 또는 ‘인(因)’으로 읽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해당 글자 바로 앞에 적혀 별다른 이견이 없는 ‘도(渡)’를 근거로 ‘도해(바다를 건너다)’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박 연구위원은 “자형(字形)과 글자의 비례, 문맥을 놓고 보면 ‘해’보다는 ‘매’에 가까워 보인다”라고 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왜를 매번 파한 ‘매파(每破)’의 주체는 ‘고구려’라고 단언했다. 깨뜨린 주체는 비록 생략돼 있지만, “광개토태왕비는 1면부터 4면까지 한 줄당 41자에 맞춰서 기록했고 글자수를 맞추기 위해서 글자를 생략한 경우도 몇 군데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래도매파(來渡每破)’ 다음에 이어지는 ‘백잔’과 ‘라이위신민(羅以爲臣民)’ 사이에 있는 두 글자는 ‘동강(東降)’으로 해석했다. ‘라(羅)’ 바로 앞의 글자도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지만, 문맥상 신라를 뜻하는 ‘신(新)’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신라’ 앞의 두 글자는 아예 비면이 떨어져나가 판독이 불가능해 ‘추독(推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연구위원은 해당 대목을 ‘동쪽을 무너뜨리다’는 뜻의 ‘동강(東降)’으로 봤다. 해당 글자를 ‘동강(東降)’으로 읽으면 “백잔(백제)이 동쪽의 신라 변경을 강복(降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신묘년 이래 기존 조공질서를 어지럽힌 행위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본 것이 기존 해석과 가장 큰 차이다. 대만의 부사년(傅斯年·전 국립대만대 교장)본과 중국의 탁공 초균덕(初均德)이 쓰던 필사저본에도 ‘동(東)’으로 기록한 자료가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신묘년조’ 다음에 등장하는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정벌하는 구절은 문맥상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기존 해석은 광개토태왕이 신묘년(391)에서 6년이나 지난 병신년(丙申年·396)에 큰 잘못이 없는 백제를 왜 대대적으로 토벌하느냐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박 연구위원은 “병신년 기사를 포함한 앞뒤 문맥으로 헤아려 ‘동강’으로 읽었다”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면, 광개토태왕은 백제가 아닌 왜를 토벌해야 앞뒤 정황이 맞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광개토태왕비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까닭은, 글자 크기가 가로세로 10~12㎝가량 된다지만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멸이 심해 읽어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다. 현재 쓰는 한자와 자형도 많이 다르고, 현대문과 달리 마침표, 쉼표 같은 문장부호나 띄어쓰기도 일절 없다. 박 연구위원 역시 “한문은 끊어 읽기에 따라 전혀 내용이 달라진다”고 밝혔다. 높이가 6m가 넘는 거석(巨石) 위의 한정된 공간에 한 줄당 41자에 맞춰 압축적으로 새긴 터라, 축약과 생략 등이 있을 수밖에 없어 해석상 어려움이 따른다.

“위변조설 가능성은 낮아”

다만 박 연구위원은 1972년 재일사학자인 이진희 교수가 제기한 위변조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석회를 발라 몇 글자를 바꾼 것은 맞으나 악의적으로 왜곡변조했다기보다는 깨끗한 탁본을 얻기 위해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겨넣다가 잘못 새겨넣은 글자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당시 34세의 젊은 군인인 사코 중위가 전문가들조차 판독 정리에 5년이나 걸린 광개토태왕비를 보자마자 해독해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코 중위는 원석탁본을 일본으로 구해왔을 뿐이고, 일본 학자들이 비문을 해독하며 쌍구가묵(雙鉤加墨)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쌍구가묵은 글자의 윤곽을 먼저 그린 뒤 주위를 먹으로 채워넣는 탁본법이다.

박광민 연구위원은 “광개토태왕비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잘못 읽었던 글자도 여러 군데 찾아 바로잡았다”며 “광개토태왕비 해독, 신라와 고구려군의 대마도 정벌, 낙랑과 대방의 요서 존재설, 고구려 평양의 요동 존재설 등에 관해 논의가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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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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