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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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모씨가 세상을 떠난 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이씨는 국내 자동차회사인 H사 연구소에서 자동차 디자인 업무를 했다. 그가 디자인한 모델 중엔 H사 인기 모델로 호평을 받은 것도 많았다. 당시 실력 있는 디자이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하지만 현재 이씨를 기억하며 추모하는 건 이씨의 부인 서모(36)씨와 자녀들뿐. 서씨는 “남편이 이렇게 잊히는 게 허망하기만 하다”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서씨와 이씨는 대학교 재학 시절 처음 만나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씨와 같이 디자인을 전공했던 서씨는 이씨의 일을 그 누구보다 응원했다. “남편은 2010년 H사에 입사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함께 저녁 식사할 때도 디자인 도안을 두어 개 가져와 아이들에게 ‘어떤 게 더 이뻐?’라며 물을 정도였다. 밤샘 근무를 불평하지 않았고 일 자체를 즐겼다.” 2018년 회사에서 실시한 직업적성평가에서 이씨는 자신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가족’ ‘자동차 디자인’ ‘자동차’ ‘운동’ ‘자전거’ 등을 꼽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관계를 존중하면서 책임을 다해 성취를 느끼는 행복한 삶’이라 서술했다.

서씨는 이런 남편의 삶이 조금씩 무너져내린 건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이라고 한다. 디자인센터 총책임자가 바뀌면서 업무 강도는 높아지고 직원들 간 경쟁이 치열해진 점에 주목한다. “디자인은 업무 특성상 정해진 프로세스나 답이 없었다. 개인의 주관적 감각이나 판단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졌다. 여타 직군에 비해 난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 업무량은 상당했다. 회사는 동일 업무를 1팀, 2팀 구분 없이 모두에게 맡겼고 이 중 괜찮은 안을 채택하는 방식 등을 취했다.”

디자이너들은 보통 2~3개월에 한 번씩 디자인 관련 품평회를 실시하는데, 품평회가 임박할 때면 이씨는 줄곧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 회사는 ‘스타 디자이너’를 강조하며 외모적인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장했다고 한다. 서씨는 이 과정에서 남편이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그때 당시 이씨의 심정은 그의 휴대폰 메모장에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담겼다.

‘스타 디자이너 한둘이 한 차종 소화할 수 있는 능력도 시스템도 불가능하고 쇼카, 파생차는 점점 많아지고… 비교당하고 구박받으면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결과를 요구받는 것도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2018년 2월 2일), ‘말 못하는 디자이너는 디자인 못하는 디자이너보다 더 못하다’(2018년 5월 24일),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매니징이 아니라 센터장 눈치 보는 매니징’ ‘잘했을 때 잘했다고 못했을 때 어딜 고치라고 이해가 쉽게 들리지 정확하게 이야기해야’(2020년 1월 14일)….

고 이모씨가 살아생전에 직접 썼던 ‘나를 대표하는 키워드’ 마인드맵. ⓒphoto 이씨의 부인 서모씨
고 이모씨가 살아생전에 직접 썼던 ‘나를 대표하는 키워드’ 마인드맵. ⓒphoto 이씨의 부인 서모씨

“품평회에 죽고 산다”

이씨는 입사 이후 단 한 번도 토로하지 않던 스트레스를 집에서 표하기 시작했고, 회사 내에선 돌발 행동까지 보였다. 지난해 1월 20일 이씨가 20여명이 있는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이○○입니다. 제가 부족한 게 많습니다. 잘하겠습니다”라고 외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씨의 부인 서씨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부담이 폭발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서씨는 그 이후로 남편을 데리고 7개월 동안 수차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았다. 진료기록부에 따르면 이씨는 양극성장애(조울증), 중증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앓았다. 연애 때도 앓은 적 없던 질환들이었다. 외래경과기록상에서 이씨는 “업무가 주어지면 가슴이 조이고 심하게 두근거린다. 머리가 아프고 초조해진다. 신경도 점점 예민해지는 것 같다. 기분도 우울하다”라고 진술했다.

이씨는 그해 4월 회사에 휴직을 신청했지만, 휴직 중에도 회사 생각은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서씨는 “자동차회사가 국내엔 많지 않으니 H사에서 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국 지난해 9월 집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복직을 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이씨는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업무상 재해라 보고 있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직전 그의 모든 이야기는 ‘회사’ ‘일’에 있었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복직’에 대한 두려움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됐다는 이유 등에서다. 이씨는 올 7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승인(유족급여·장의비 청구)을 신청했다. 서씨는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아빠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또 엄마인 내가 이만큼 노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도 아빠가 회사 일로 병이 들었다는 것까지는 짐작한다. 그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우리 슬프다 그치’ ‘엄마 잘 이겨내는 것 같아?’ 등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도뿐”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역치’ 문제로 치부하기 어려워”

H사 측에선 향후 공단의 승인 결과를 따르겠다는 입장이지만, 지난 선례를 봤을 때 서씨 측이 기대하는 결과가 나올지는 아직 장담할 순 없다. 최근 정신질환에 따른 산재 승인율(승인·신청 건수)만 해도 그 수치는 저조하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정신질환 산재 승인율은 2017년 54.2%(103·190), 2018년 71.2%(166·233), 2019년 68.1%(213·313), 2020년 67.0%(376·561)를 기록했다. 근골격계, 뇌심혈관 등의 산재 승인율이 매년 70%에 육박하고 신청 및 승인 건수만 수천여 건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미미한 수준이다.

법조계에선 정신질환이 그 특성상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엑스레이(X-ray) 촬영 등으로 증상을 알기 쉽지 않고, 증상이 보인다 해도 공단에선 유전적 질병 혹은 유년기부터 장기간 형성된 질환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이런 수치의 배경으로 보고 있다. 산재 승인을 위한 질환과 직장 근무 간 인과관계가 잘 입증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자살에 이를 정도의 스트레스’에 대한 기준도 불명확하다. 재해자가 속한 사측에선 이런 점을 자사 논리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실제 공단의 산재 불승인 결정문엔 ‘업무상 스트레스가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자살할 정도의 스트레스로 볼 수 없음’ ‘회사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판단되며 자살은 개인적인 성격에 의한 것’ 등의 내용이 담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재 서씨는 산재신청 근거로 이씨의 ‘진료기록부’ ‘정신건강의학과 결과보고서’ ‘근태기록’ ‘수첩 내용’ ‘휴대폰 메모 내용’ 등을 제시한 상황이다. 이씨는 “남편의 자살로 외상후스트레스를 겪는 동료직원도 적지 않다. 남편의 일을 자신들도 겪을 수 있다는 우려 등에서다”라고 말했다. 이씨의 산재신청 법률 대리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마중’의 김용준 대표변호사는 “스트레스에 따른 이상 조짐은 회사 내에서 빈번히 나타났고 이를 ‘개인의 능력’ 혹은 ‘개인의 역치’ 문제로 치부하는 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라고 평했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정신질환 산재 승인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209.4일이다. 서씨는 하루라도 빨리 산재 승인 싸움을 끝내고 싶다고 말한다.

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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