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후보가 지난 9월 26일 모교인 부산고등학교를 방문해 자신의 저서인 ‘안철수의 생각’에 사인을 하고 있다. ⓒphoto 이준헌 조선일보 기자
안철수 후보가 지난 9월 26일 모교인 부산고등학교를 방문해 자신의 저서인 ‘안철수의 생각’에 사인을 하고 있다. ⓒphoto 이준헌 조선일보 기자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1년여간 뜸을 들이던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출마 선언을 한 게, 10월 19일이면 한 달이 된다. 정치권을 혁신하겠다고 나선 만큼 대중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10여년간 대선 후보로서 검증을 받아온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와, 5년간 청와대에 있으면서 공직생활을 했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대 교수와 벤처기업 CEO를 했던 안 후보는 검증의 잣대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세 후보 중 지난 한 달간 가장 혹독한 검증의 잣대가 안 후보에게 가해진 것도 어찌 보면 이제 막 대선 출마를 한 새로운 후보에 대한 정치권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과정에 안 후보가 지금까지 낸 24권의 저서가 무엇보다 훌륭한 비판의 잣대와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인트(Saint) 찰스’

안 후보는 정치권과 취재기자들 사이에서 그의 영문 이름 ‘찰스(Charles)’를 본떠 ‘세인트 찰스’라고 오랫동안 불렸다. 세인트는 성인(聖人)이라는 뜻이다. 안 후보는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이후 대선 후보로 부각됐으나 출마 선언은 하지 않고, 각종 강연과 청춘콘서트, 방송 프로그램 출연 등을 통해 기존 정치권과 차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 과정에서 쌓인 그에 대한 이미지는 스스로 성인 계열에 들어갈 만큼,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착한’ 말들만 해왔다는 것이다.

안 후보는 지난 9월 출마 선언을 하기 전까지 언론 노출을 최대한으로 피해왔다. 때문에 새누리당 등 정치권에서는 그의 과거 언론 인터뷰나 저서를 통해 안 후보를 간접적으로 견제하고 파악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말을 쏟아내고 일거수일투족이 시시각각 생중계되는 정치권 인사에 비해 안 후보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부족했던 것이다.

지난 8월 난데없는 안 후보의 ‘막말 논란’도 비슷한 사례였다. 지난해 9월 한 인터넷 언론의 강연장에서 안 후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며 “(금융사범들은) 전문성이 높아서 잡힐 확률을 높이기가 힘들다. 어쩌다 한번 잡히면 거의 반을 죽여놔야 한다”고 했고, 또 “어쩌면 금융사기범이 살인보다 더 나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 사형을 왜 못 시키는가?”와 같은 발언을 했는데, 이게 1년 만에 비판 거리가 됐다. 급기야는 3년 전인 2009년 TV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안 후보가 ‘단란주점 가봤느냐’란 질문을 받고 “단란한 게 뭐죠?”라는 말을 했다가 ‘룸살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안 후보는 결국 “사업상 모임에서 함께 유흥주점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는 해명을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도덕 교과서 ‘안철수의 생각’

이런 와중에 안 후보가 대선 출마 2개월을 앞둔 지난 7월 19일 내놓은, 사회 거의 전 분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총정리해 놓은 ‘안철수의 생각’은 정치권의 좋은 공격 거리였다. 박근혜 캠프의 김종인 공동선거대책위원장(현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일반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짜깁기해 만들어 놓은 수준”이라고 혹평했고, 일부 전문가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신문의 좋은 사설과 칼럼에 있는 내용들을 죄다 가져다 붙인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일례로 안 후보는 저서에서 “잘못된 경험은 안 하는 게 좋다”며 단점으로 지적돼온 정치 경험 부재를 반박했다. 기존 정치권의 경험을 나쁜 경험으로 치부하고 그러한 경력이 없는 자신이 오히려 정치를 더 잘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기존의 정치 경험을 ‘잘못된 경험’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기존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우군으로 평가받던 민주통합당 등 야권 인사들조차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세균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대통령은 정치를 알아야 잘할 수 있다. 나쁜 정치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며 “정치에는 좋은 정치도 많다. 저 같은 사람이 한 정치가 좋은 정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좋은 정치 경험은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중요한 자산이라는 말로 에둘러 안 후보를 비판한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잘못된 경험은 안 하는 게 좋다고 했는데 이는 정치의 ABC도 안 돼 있는 것”이라며 “안 후보가 성인인 척하는 게 곧 판명이 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안철수의 생각’은 안 후보가 대선 출마를 하는 데 톡톡한 보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검증의 부메랑이 돼 안 후보를 괴롭혔다.

안 후보가 책에 너무나도 옳고 당연한 ‘착한’ 주장들만 써놓다 보니 책의 내용과 다른 안 후보의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곤혹스러운 상황이 계속됐다. 재벌 2·3세와 벤처 CEO(최고경영자)의 모임인 ‘V소사이어티’에서 한국 경제를 위해 최태원 SK 회장에 대한 선처를 호소한 것으로 드러나며 재벌 회장 구명 논란이 일자 곧바로 ‘안철수의 생각’의 한 구절이 인용되며 비판이 일었다.

안 후보가 책에서는 “기업과 기업주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이제는 법이 가진 자들만 편들지 않고 누구에게든 공정하게 적용된다는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행동이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안 후보는 또 “경제범죄에 대해 사법적 단죄가 엄정하지 못하다”거나 “머니게임과 화이트칼라 범죄 등에 대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가벼운 형을 선고하고 쉽게 사면해주는 관행도 바뀌어야 정의가 선다” 같은 말을 책에서 쏟아냈다.

결국 안 후보는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해야 했다. V소사이어티에서 ‘인터넷 전용 은행’을 만들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또다시 ‘안철수의 생각’에서 안 후보가 “금산분리 정책은 반드시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 구절이 비판의 근거가 됐다.

책의 내용과는 다른 안 후보의 실상

1988년 26세 대학원생 신분으로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아파트를 재개발 입주권, 일명 ‘딱지’를 통해 사들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직후에도 안 후보가 책에서는 정작 “저도 오랫동안 전세 생활을 해봐서 집 없는 설움을 잘 안다”고 한 부분이 정면으로 문제가 돼 안 후보를 괴롭혔다.

20여권에 이르는 안 후보의 다른 저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9년 안 후보가 할아버지로부터 99㎡(30평) 주택과 231㎡(70평) 규모의 토지를 가족과 함께 증여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2009년 그가 쓴 ‘행복 바이러스 안철수’의 “살면서 할아버지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임종 얼마 전에 제 이름으로 된 통장(50만원)을 마련해주셨다”고 한 부분이 정면으로 배치돼 문제가 됐다.

2001년의 저서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에서는 “무조건 전문 경영인이 바람직하다는 인식, 오너가 경영하면 문제가 많을 거라는 선입견도 문제”라고 한 발언이 알려지며 안 후보가 평소 ‘삼성 동물원’ ‘LG 동물원’이라고 비유하며 대기업을 비판해온 것과 맥락이 다르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치권 관계자는 “의도와는 달리 ‘안철수의 생각’ 같은 책을 써서 대선 기간 내내 두고두고 좋은 비판의 소재로 쓰일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에 익숙지 않은 안 후보가 대선 검증 과정을 예상하지 못하고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너무 많이 책에 쏟아냈다는 것이다. 여야 기존 정당보다는 결국 자신이 써온 20권 넘는 저서의 도덕적 아포리즘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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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희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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