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1층에서 푸틴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 11월 13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1층에서 푸틴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photo 연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한국 방문 동안 푸틴의 지각 행동에 대해 말들이 무성하다.

지난 11월 13일 방한한 푸틴 대통령은 당초 당일 오후 1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단독 정상회담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30분 지각했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 관련 모든 행사들이 지연됐다. 청와대 오찬은 만찬으로 이어졌고 나머지 행사들도 줄줄이 지연됐다. 푸틴 대통령의 돌발적 행동 때문이었다. 푸틴 대통령의 행보를 두고 파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외교적 결례를 지적하는 여론이 강하다. 하지만 러시아는, 더구나 푸틴 대통령의 스타일을 알면 외교적 파장으로 볼 만한 상황도 아니다.

러시아는 극동에서 동부 유럽에 걸쳐 있다. 1709만㎢의 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데다 인구 1억4250만명으로 세계 9위, GDP도 2조218억달러로 세계 9위 국가다.(2012년 국제통화기금 발표 기준) 대륙국가로 워낙 땅이 넓다 보니 국민성도 느긋하고 서두르는 법이 없다. 슬라브족이 기반인 러시아는 술(보드카)도 40도 이하는 술로 생각하지 않고, 영하 40도 이상은 추위로 생각하지 않고, 400㎞ 이하는 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통이 크고 스케일도 큰 대륙적 기질을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하거나 외교활동을 할 때는 러시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알지 못하면 번번이 당한다. 아니 절망감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과 유럽처럼 신사적인 행동과 사회규범 등 시스템이 갖춰진 환경에 익숙한 관료들과 비즈니스맨들은 러시아에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푸틴 대통령이 한국 방문 동안 보여준 행동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러 정상회담에서 푸틴의 지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 때도 박 대통령은 1시간 넘게 푸틴 대통령을 기다렸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는 45분,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40분 늦어 우리 측을 곤혹스럽게 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지각 행동은 우리 정상과의 회담 때만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도 40분,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만남에서도 15분 지각하는 결례를 범했다.

웃긴 것은 푸틴의 지각 시간에 따라 상대방을 무시하는 경향이 더하다는 주장도 있다. 일종의 압박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바마와의 정상회담에 늦은 것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경고 의미가 있고, 요한 바오로 2세와의 회담에 늦은 것은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러시아 정교는 십자군전쟁 때 정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이유로 지금까지 교황청과 갈등을 보인다. 러시아 정교 수장인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의 러시아 방문을 결사 반대한다. 역대 교황이 러시아를 방문하지 못한 이유다. 이처럼 푸틴의 지각 행동에는 다양한 해석이 쏟아진다. 하지만 푸틴의 행동에 대해 어느 나라도 공식적인 항의를 하지 못한다. 러시아 그리고 푸틴이 차지하는 국제적 영향력 때문이다.

옛 소련 국가들인 CIS 외교관들은 러시아 측에 ‘디플로마티치시코예 함스트버(Дипломатическое хамство·‘외교적 결례’를 뜻하는 러시아어)’라며 강력히 항의해 보지만 러시아는 무시한다.

푸틴 대통령이 모두에게 늦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특별한 정상회담도 있었다. 푸틴에게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의 회담 때는 늦는 법이 없었다. 공식회담은 물론 사적 회동까지 늘 제시간에 만나 ‘절친외교’를 펼쳤다. 푸틴과 이들 두 총리가 재임하는 동안 러시아와 독일,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관계는 최고였다.

러시아의 외교 행보는 영락없는 ‘크렘린식’이다. 러시아어 ‘크렘린’은 요새(要塞)를 의미한다. 국제 외교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러시아인의 속내를 나타내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번 푸틴 대통령의 방한 일정은 그야말로 러시아식이고 푸틴스타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 푸틴 방한 일정은 정해진 것처럼 제대로 진행된 게 하나 없다. 당연히 외교적 결례다. 하지만 러시아는, 푸틴은 늘 그런 식이다.

이른바 ‘푸틴 타임’이다. ‘푸틴 타임’이란 푸틴 맘대로 하는 돌발적 시간 활용을 의미한다. 푸틴은 연애시절에도 늦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이혼한 전(前) 부인 루드밀라 여사는 “푸틴은 연애할 때도 1시간~1시간30분씩 늦었고 항상 일 핑계를 댔다”며 “그렇게 늦는 것은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 시절 그는 시간에 철저했다고 동료들은 전한다. 러시아 언론도 “공식 일정에 제시간에 나타난 적이 없는 푸틴 대통령의 시계는 일반인들의 시계와 다르다”고 할 정도다. 푸틴의 지각 행동은 오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만 일종의 권위의식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를 한다. 러시아 신문 ‘노보이 가제트이’의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 편집장은 “푸틴은 스스로를 1인자로 생각한다. 자신 위에 신(神)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권력은 제정러시아 시절 ‘차르’ 이상이다. 사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행동을 하는 때는 러시아 정교의 수장 총대주교를 만날 때다.

청와대는 이번 정상회담 지연에 대해 “푸틴을 만나기 위해 교황도 기다리고 오바마도 기다렸다”며 푸틴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자위한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오히려 “청와대 측이 지난 정권과 달리 의전팀이 약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상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적잖은 서운함이 드러난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러시아에 대해 별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에는 전통적으로 중시해온 4강 외교에서 러시아를 배제한 듯한 발언까지 있었다. 러시아가 이를 방관할 리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러시아 외교부는 한반도 관련 국내 언론 보도나 정부의 대러 외교 발언을 완벽할 정도로 챙긴다.

2007년 여름 남부시베리아에서 휴가를 즐기는 푸틴 대통령. ⓒphoto AP·뉴시스
2007년 여름 남부시베리아에서 휴가를 즐기는 푸틴 대통령. ⓒphoto AP·뉴시스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러시아를 잘 아는 각국 외교관들은 아무튼 러시아를 알려면 ‘마트료시카(인형 속에 인형이 계속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를 하려면 겉모습이 아닌 진정한 내면을 이해하는 ‘마트료시카 외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명 ‘어니언(양파) 외교’라고도 한다. 까고 까고 끝까지 까 봐야 속내를 알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외교관들은 “러시아와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 러시아에서 살면서 그들의 생활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인의 다차(별장)에 초대받아 보드카를 마시고 사우나를 할 정도가 돼야 완전한 신뢰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 외교부도 러시아를 상대하려면 러시아 스타일과 푸틴 스타일을 집요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유사한 상황은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푸틴은 앞으로도 11년을 더 집권할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와의 외교에서 신사 외교와 품격만 고집하다가는 더한 굴욕을 당할 수도 있다. 러시아 대통령들이 특정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때는 그 나라 정상들과도 사우나회담을 하면서 신뢰를 다졌다.

우리 외교부가 대(對)러시아 외교를 제대로 하려면 신뢰가 기반된 지속적인 외교 채널의 유지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공식적 채널이 불가능하면 사적 채널 등을 총동원해야 하지만, 대러시아 외교 전문가들의 부재와 소극적인 외교 채널 유지로 이런 인연을 잇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외교부가 김하중 전 중국 대사와 같은 중국전문가를 활용했던 것처럼 ‘러시아 스쿨’로 대변되는 러시아 전문가들을 등용해 대러시아 외교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전문가들이 대사관에 포진해 지속적으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면 문제는 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직도 몇 안 되는 러시아 전문가들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늘 러시아에 당한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러시아 측도 “청와대에 러시아 전문가가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러시아에 수모를 당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당시 MB정권 출범을 앞두고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이 이끄는 러시아 특사단도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대통령은커녕 라브로프 외교장관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수모를 당했다. 러시아에서는 웬만한 국가의 총리나 외무장관이 오면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나고 가는 게 관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상하리만큼 푸틴과 접촉 창구를 만들어가지 못했다. 러시아 전문 외교관의 부재이기도 했다. 반대로 러시아에서 오는 러시아 장관들은 청와대에서 우리 대통령 만나는 것을 당연시한다. 외교에서 중시하는 호혜의 원칙도 러시아라면 완전 무시된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우리나라 외무장관은 물론 한국 총리의 러시아 방문 때도 개별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 2006년 유엔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반기문(潘基文)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도 푸틴 대통령을 만나긴 했지만 이는 우리 외교장관이 아닌 유엔 사무총장 내정자 자격으로 면담한 것이다. 반 총장 역시 장관 자격으로 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했지만 푸틴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이쯤 되면 대러시아 외교력 부재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00년 이한동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당시 이 총리는 러시아 대통령실에서 푸틴과의 면담 확답을 주지 않아 크렘린궁 주위를 수시간 동안 맴도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당시 외교관들은 ‘외교 굴욕’이라고까지 표현한다.

한·러 양국은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전략적인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맞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국에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풍부한 데다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이 절대적인 파트너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비즈니스 다이얼로그에서도 “한국에 대한 러시아 투자가 거의 제로”라며 공식적으로 투자를 요청할 정도다. 사실 러시아에 한국은 가깝고 먼 나라다. 우리가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펼치지 않으면 러시아는 정상회담에서 리토릭이나 쏟아내는 행동만 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한국 방문 동안 ‘삼보(러시아 전통 격투기)’ 관계자들만이 제시간에 푸틴을 만난 셈이다. 예정에도 없던 행사였지만 삼보하는 친구들은 푸틴의 스타일을 알고 푸틴을 사로잡았다. 비약하자면 이런 장면에서도 우리 정부는 배워야 한다. 문종금 대한삼보연맹회장은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은 이미 참모들을 통해 예정됐을 정도였고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며 “푸틴 대통령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러시아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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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선 조선일보 프리미엄뉴스부 기자 전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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