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무에 올라선 다음에는 당신(李承晩)이 나무를 흔들어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으리라는 것도 안다.’
-김규식(金奎植)

1886년 어느 날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경영하는 고아원에 한 남자가 대여섯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와 자기의 조카라며 맡아줄 수 없느냐고 애원했다. 아이는 작고 병색이 짙었다. 고아원 규칙에 따르면 4세 아래만 받을 수 있어 그 아이는 거절 당했다. 언더우드는 며칠이 지나 아이의 병이 깊어졌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했다. 찾아보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를 고아원에 데려와 병을 간호하고 규칙에 맞지 않지만 맡아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John)이라 짓고 키웠다. 아이는 명석했다. 그는 본디 가난하고 병든 고아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래부(東萊府)에 근무하던 김지성(金智性)이라는 유생이었는데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간 탓에 느닷없이 고아가 됐다. 아이의 이름은 김규식(金奎植)이며 기록에는 1881년생으로 되어 있었다.

살면서 가장 큰 행운은 의인을 만나는 것인데 김규식이 언더우드를 만난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총명한 소년을 몹시 사랑했고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로어노크(Roanoke)대학에 유학을 보냈다. 그는 이때 의친왕(義親王) 이강공(李堈公)을 만났다. 김규식은 1903년에 그 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면서 영예로운 졸업생 연설을 했다. 1904년에 귀국한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곁에 머물면서 새문안교회의 집사와 YMCA의 교사로 믿음의 생활을 했다.

김규식이 고아원 생활을 할 무렵인 1886년 경기도 양평의 몰락한 지주 댁에 한 아들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소년은 훗날 호를 몽양(夢陽)이라 지었다. 태몽이란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이 회상성 기억조작(retrospective falsification·사실이 아니었음에도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회상에 오래 젖다 보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기억이 고정되는 심리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성격이 엄하고 담대한 분이었으며 호승심(好勝心)이 남다르게 강했다. 부친은 전형적인 소론(少論) 가문의 양반으로 조부의 형제와 부친의 형제가 모두 동학도(東學徒)였다. 소년의 이름은 여운형(呂運亨)이다.

여운형은 15세(1900년)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민영환(閔泳煥)이 창설한 흥화학당(興化學堂)에서 3년을 수료했고, 이어 대한제국 학부(學部)가 설립한 우정학당(郵政學堂)에 들어가 2년을 공부했다. 그는 1907~1908년에 서울 승동(勝洞)예배당에서 성경을 공부했다. 그 무렵 그는 미국인 선교사 곽안련(郭安蓮·Charles A. Clark)의 조사(助事) 일을 했다. 여운형은 곽안련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집에 기독 광동학교(廣東學校)를 설립했으며 강릉의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었다. 26세 때 그는 승동예배당 전도사가 되어 기독교를 설교하는 한편 평양장로신학교에서 2년 과정을 수료했다. 전국적인 금연(禁煙)운동이 일어났을 적에 그는 단연국채보상(斷煙國債報償) 기성회를 조직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강연했으며 23세 때(1908)에 부친의 3년상을 치른 뒤에는 빚 받을 문서와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느티울(槐江)이라는 강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이쪽 강변에서 저쪽 강변으로 날아가던 꿩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가끔 있었다. 강폭은 넓지 않았지만 강물 위를 날던 꿩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음을 바꿔 되돌아가다가 빠져 죽었다. 그냥 날아갔더라면 능히 강을 건널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을의 어른들이 죽은 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도 또한 저러하니라.”

한국 현대사에서의 중도파를 논의하면서 위와 같은 개인적 체험을 소개하는 것은 김규식이나 여운형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자기 지탱력을 필요로 하면서도 이들 중도파는 결국 그 꿩이 그랬던 것처럼 ‘멈칫거리다가’ 일을 허다하게 그르쳤다. 신생국가의 건설 과정에 나타나는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가치는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음(中庸)’이다. 그러기에 공자(孔子)는 “모름지기 그 중심을 잡으라(允執厥中·‘論語’ 堯曰篇)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도 중용(mean)을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했다.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용은 비겁할 수도 있고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회색분자이거나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다. 정치적 정향(定向)으로 볼 때 중도 노선은 철학이라기보다는 기질(氣質)에 속한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도 가지고 있고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도 가지고 있지만 질주(疾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해방정국의 격렬한 몸부림 속에서 한국인 6671명을 대상으로 하여 좌우익 4명의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이승만 29%, 김구 11%, 김규식 10%, 여운형 10%의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 여기에서 중도파인 김규식과 여운형의 지지율이 의외로 높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중도파를 대표하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들은 더 고뇌에 찼고 행적은 더욱 간고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연대감을 다진 것은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서였을 것이다. 이때 한국의 좌파 52명이 참가하였는데 김규식과 여운형은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들은 레닌(V. I. Lenin)을 만나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경외감과 공산주의에 대한 의구심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 자리에서 레닌은 한국이 언젠가는 공산주의를 지향해야 하지만 지금은 민족주의에 몰두할 때라고 지적했고 한국의 대표들은 이에 깊이 공감했다. 그 무렵 회의를 취재한 미국의 르포기자 에반스(Ernestein Evans)가 김규식을 인터뷰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병합으로부터 3·1운동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한국에 보여준 정책에 실망한 나머지 이제 마지막 희망은 러시아밖에 없다고 체념했는데 그 모습이 조금은 슬퍼 보였다.

여운형은 이 무렵에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스스로 마르크시스트임을 자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여운형은 가산을 정리하고 총독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루(小松錄)의 소개장을 얻어 신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생각을 바꾸어 1914년 가을에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여 3년간 수업을 받았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유학을 떠나면서 하필이면 총독부 관리의 소개장을 들고 가야만 했는가의 문제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업장(業障)이 되었다. 1919년 8월경에 일본 정부의 식민지 업무를 관장하는 척식(拓殖)대신 고가 렌노스케(古賀廉之助)가 여운형을 도쿄(東京)로 초청하였다.

이때 여운형은 다이고쿠(帝國)호텔에서 내외 신문기자와 명사 500명에게 조선 독립의 절대 필요를 주장하는 연설을 했고 이어서 일본 정가 거물들이 식민지에서 온 33세의 청년을 환대했다. 이러한 대접은 그의 능력에 대한 일본의 평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는 있지만 뒷날 그의 운신에 짐이 되었다.

이런저런 미덥지 못한 행보로 민족 진영으로부터 소외되던 여운형의 상하이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그의 행보는 무척 부산했다. 상하이 푸단대학(復旦大學) 축구단장을 지낼 만큼 그는 마당발이었다.(그가 뒷날 광복과 더불어 초대 대한체육회장으로 일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임시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임시정부 헌법을 제정하면서 멸망한 구황실(舊皇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 하는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 임정 요인들은 공화주의에 대한 개명 의식이 익숙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왕정복고(復古)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이 멸망한 왕조에 대한 연민(憐憫)을 가질 수 있었다 하더라도 여운형은 황실 우대를 법조문화하려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라고 명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여운형으로서는 이 사실을 끝까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임정과 여운형의 불편한 관계에 관한 색다른 주장이 있다. 임정 의정원 부의장이었던 김창숙(金昌淑)의 증언에 따르면, 여운형은 상하이 일본영사관의 밀정이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상대역을 아오키(靑木)라고 지칭했다. 김구(金九)가 이를 알고 여운형을 불러 문책했을 때 그는 “작은 정보를 주고 큰 정보를 얻으려 했다”고 대답했지만 임정 세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혈기에 찬 청년단원들이 여운형을 죽이려 하자 그는 상하이를 떠났다. 김창숙은 그 기록의 말미에 “여운형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썼다.(‘金昌淑文存’ 244~245쪽)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한 것을 감지한 총독부 요인들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한국인의 보복을 모면하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를 여운형에게 보내어 정권 인수를 교섭한 바, 여운형은 이를 수락했다. 미 군정청은 이때 여운형이 아베로부터 2000만엔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신복룡(편)·‘한국분단사자료집II’ 138쪽) 그 금액은 현재의 20억3000만원에 해당한다. 물론 여운형과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를 부인했다. 금전수수설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하지(John R. Hodge) 사령관은 여운형을 불러 어르고 겁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지로서는 여운형을 정국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애로가 있었다. 하지가 보기에 여운형은 대단한 가능성(immense possibilities)을 가진 인물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임정 봉대(奉戴)의 문제가 대두되자 여운형과 임정의 갈등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는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면서, 군정이 임정만을 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요인 환영식을 반대했다. 그는 “해외에는 미주·연안(延安)·시베리아·만주 등 여러 곳에 혁명 단체가 있고 고생도 더 많이 했지만 임정은 안전지대로 몸을 피하여 공을 쌓은 단체로서 혁명가가 섞이지 않은 정권”이라고 했다. 우익들은 아마도 이때 강렬한 살의를 느꼈을 것이다.

미 군정으로서는 여운형 문제가 뜨거운 감자였다. 하지 군정청장은 극우로 치닫는 우익으로는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여운형을 쳐다보게 됐다. 하지가 판단하기에 이승만이 미래의 과도정부에 필수적이거나 바람직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에 대한 한국민의 인식은 군정의 후광이 안겨준 허상(虛像)이라고 하지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정적과의 타협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 생각했지 자신이 남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어서 한국인은 그의 직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판단하고 있는 군정으로서는 김구나 이승만의 무리에 대하여 호의를 보일 수도 없었다. 미국이 생각할 때 그들은 ‘끝까지 버틸 사람들(diehard)’이었다. 그들과 같은 극우세력으로 정국(政局)을 운용한다면 중도파는 공산당과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할 위험이 있다는 점도 깊이 고려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이 유용한 시기는 지났으며,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모양 좋게(gently)’ 사라져야 한다고 하지는 판단했다. 그 무렵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서 태풍의 중심권에 있었던 인사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진다면 미국과 소련의 협상뿐만 아니라 남한의 여러 파벌들 간의 협상도 촉진될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다. 아무리 우익을 경원했다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의 선악을 떠나서 김구와 이승만을 배제한 채 정국을 운영할 수 있으리라는 군정의 구상은 순진한 발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운형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다는 데 하지의 애로가 있었다. 하지는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한국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확신했다. 그는 도쿄에 있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인민공화국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 단체이며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 여운형은 분명히 소련의 꼭두각시이다. 상당수의 좌익이 인민공화국에 포함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는 자신의 행동이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쟁 선포로 인식되어 무질서가 유발되고 빨갱이(pinko)나 그들의 신문들로부터 정치적 차별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인민공화국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얻은 결론은 여운형을 좌익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46년 봄·여름 동안 미 군정은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로부터 이유(離乳)시키느라고 바빴다. 그런 뒤에 김규식의 카운터 파트너로 그를 선정하여 좌우합작을 추진함으로써 좌익을 약화시키고 한국의 반공화에 이용하려 했다. 여운형으로서도 미 군정의 그와 같은 구도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나름의 야심과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가지고 있었고, 좌익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좌익을 장악하지 못한 채 우익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straddling)’ 상황에서 미 군정의 제안은 기쁘고도 바라던 일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박헌영(朴憲永)을 압도함으로써 좌익의 주도권을 잡고 정국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그 무렵 남한 좌익 3당인 인민당의 여운형, 신민당의 백남운(白南雲), 조선공산당의 박헌영(朴憲永)이 각기 다른 정치적 계산에 맞물려 3당 합당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좌익의 연대는 우익은 물론 군정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여운형은 미 군정의 정치 공작으로 자금이 고갈되었고 더욱이 아우인 여운홍(呂運弘)과 140명의 당원이 인민당을 탈당하여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좌익 통합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여운홍은 군정으로부터 10만원의 자금을 받아 창당에 썼다.(‘주한미군사’ II/2, 98쪽·103~104쪽) 결과적으로 여운홍은 미국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여운형은 조직적 두뇌를 가진 훌륭한 참모를 만났더라면 큰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보필하던 동지이자 혈육인 여운홍이 곁을 떠났을 때 그는 인생의 비애와 허무함에 싸여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급격히 무너졌다. 혈육은 돈을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을 다루는 공작을 맡은 사람이 하지의 정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였다. 미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출신으로서 1946년 초에 소위로 부임한 그는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군정청 안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의 홀리크로스(Holy Cross)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문필에 뛰어났으며 형세 판단이 빨랐다. 버치는 자신이 한 신생국가의 창설 과정에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에 태어난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1973년에 커밍스(B. Cumings)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중위(the highest ranking first lieutenant in the world)”라고 그는 말했다. 겸손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독약임을 그는 몰랐다.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자동차도 많지 않던 그 시절, 1년 동안에 교통법규를 여덟 번이나 위반했다. 한국을 그만큼 우습게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귀국해서는 변호사 자격마저 정지당한 채 한국에서의 수많은 정치 공작을 가슴에 묻고 평범한 시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재주는 넘쳤으나 덕이 부족(才勝薄德)한 사람으로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한국의 원로 정객들은 1910년생인, 아들 또래의 그를 보며 시큰둥했다.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정확한 현실인식과 판단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판단이 정확한 실천(praxis)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나 혈육과 같은 소승적 욕망이 이상이나 조국을 비웃는 역사적 사례는 허다하다. 인성의 면에서 본다면, 김규식은 정세를 빨리 판단하면서도 행동에는 미온적이었다. 그는 성격상 대중 앞에서 외치는 것을 싫어했고 그런 정치인들을 경멸했다. 입법의원 당시에 그는 동료 의원들을 학생 나무라듯 했다. 회의에서는 이치를 따지고 기지와 유머로 듣는 사람을 황홀케 하는 선비형의 지식인이었지만 대중 앞에 서서 외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지도자들이나 대중을 설득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다.

성품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김규식은 정치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장로이자 교수로서 남았으면 좋았다. 그는 불우한 유년기를 거치면서 열등감에 빠져 있었고 자기가 남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할 심리적 부담을 느꼈다. 그는 허약했다. 그는 1919년에 뇌종양에 걸려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간질 증세를 보여 평생 동안 고생했다. 이때 머리에 혹이 생겼는데 이에 상심한 그는 자신의 호를 ‘튀어나온 사람’이라는 자학적인 뜻으로 우사(尤士·尤史)라고 지었다. 혹부리영감이라는 뜻이다. 이정식 교수(펜실베이니아대학)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만성 위장병을 앓아 외식을 하지 못하고 죽을 싸들고 다녔다. 그는 평소에 “나에게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묻지 말고 없는 병이 무엇이냐고 물어라”고 말했다. 군정청은 김규식의 이름을 ‘Kim Kiu Sickly’라고 표기했다.

여운형은 인간적인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투쟁 경력과 기반, 천부적인 정치 감각과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 영어구사력, 친화력으로 그는 해방정국의 유력한 지도자로 각인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명심이 강했고, 허장성세했으며, 조직적이지 못하고 어수선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그가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처사를 보인 것이 지도자들 사이에서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정국에서 다섯 차례의 저격을 당했고 끝내 마지막 테러(1947년 7월 19일)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방정국과 같은 격동기의 시대적 흐름은 중도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도파는 좌우익 모두의 적이었으며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 여운형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지면서 좌우합작도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결국 좌우합작은 버치의 허영심과 여운형의 공명심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합작(國共合作)의 환영(幻影)이 어른거렸겠지만 두 나라의 역사 상황은 그 결절점(結節點)을 찾아주지 못했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