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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그들은 왜 ‘단정론’ ‘통일론’으로 갈라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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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2363호] 201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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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그들은 왜 ‘단정론’ ‘통일론’으로 갈라섰나?

단독정부를 둘러싼 갈등 : 이승만과 김구의 애증(2)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정치인은 죽는 일에도 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하물며 살아 있음에랴.”
- 플루타르코스
▲ 손을 잡은 이승만(왼쪽)과 김구.
우리가 젊은 날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은 만남이란 성격이 같은 사람끼리의 인연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너무 닮으면 못 산다. 성격이 다른 만남이 좋은 배필이다.” 그런데 50년을 살고 보니 문득 그 다른 성격이 닮아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이치가 어디 부부 관계뿐이겠는가? 정치적 동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의 경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끓는 가슴을 안고 격정의 삶을 산 김구와 이지적인 이승만의 만남이 좋은 동지였는지 아니면 잘못된 만남이었는지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비극적 식민지 시대에는 적군의 모습이 너무도 뚜렷했고 엄혹했기 때문에 그 앞에서 두 사람의 개인 감정은 적군에 대한 증오심보다 후순위여서 허물이나 섭섭함이 덮일 수 있었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목전에 과실(果實)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경계하는 경쟁자로 천천히 닮아가고 있었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이승만에게 더 강렬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김구가 ‘형님’이 하시자는 대로 따라가는 듯했으나 거듭되는 앙금과 불신은 결국 그들을 갈라서게 만들었는데 첫 번째로 부딪친 문제가 곧 단독 정부의 수립을 둘러싼 이견이었다.
   
   
   단독 정부 수립의 문제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호남에 유세하러 가서 정읍에 들러 시국 강연을 하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생각과 지략이 깊은 사람이니 불쑥 한 말은 아니며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정서가 독립과 조속한 통일 정부의 수립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런 발언은 계산과 용기가 함께 필요한 일이었고 보는 이에 따라서는 무모하거나 위험하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왜 그런 모험을 했을까.
   
   먼저 짚이는 것은 그가 단정론을 제기한 것이 시기적으로 볼 때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미·소공위의 결렬은 미국으로 하여금 신탁통치 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한반도 정책을 모색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소공위가 실패하자 미국은 타협에 의한 통일을 체념했다. 이런 점에서는 이승만도 같은 생각이었다. 또 한 가지 당시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던 좌우 합작에 대하여 이승만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미국은 당초 정국 운용의 주도적인 인물로서 김규식(金奎植)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신탁통치 정책 대신에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는 전환기에 미 군정이 김규식·여운형(呂運亨)과 좌우 합작을 추진했다는 것은 미 군정의 향후 정국 구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이 무렵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승만이 단정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정국 운용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는 단정론을 제기함으로써 미 군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의한 정국 구도를 분쇄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정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북한에 인민위원회가 정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총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대안은 단정일 수밖에 없다고 이승만은 판단했다. 적어도 그는 한반도 전역의 소비에트화보다는 남한만이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판단은 미국과 교감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승만이 미 국무성과 미 군정 일각에서 검토되었던 단정안을 입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워싱턴에는 그를 지원해 주었던 인사들이 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워싱턴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정의 문제에서 이승만으로서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정 자체가 분단의 영구화로 가는 길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업보가 되리라는 것을 이승만이 계산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죄책감은 그의 정치적 판단과 권력 의지에 묻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정치 공세 속에서 그는 자신이 김구로부터 추월당하고 있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우익이 뭉쳐야 한다면서 자신이 초당적으로 활동할 것이니 김구도 한독당을 탈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1947년 11월 30일과 12월 1일에 이승만과 김구의 회담이 있은 후 이승만의 제안으로 양쪽의 합작은 급속히 추진되었다. 양측 대표는 12월 2일 모임을 갖고 “국민의회 의원선거법에 따라 조속한 기한 안에 자율적으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되 UN 감시단의 선거가 우리의 뜻에 일치할 때는 이에 협조할 것”을 결의했다. 그 동기에서 순수했던 김구는 젊은 당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독당의 당수를 사퇴할 것을 공언했으나 이승만은 통합을 추진해 놓고 한민당이 그 대오에서 빠짐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만의 합당이 이뤄졌다.
   
   그 후의 추이를 보면 김구의 당수 사퇴를 권고한 이승만의 의도에는 깊은 계산이 담겨 있었다. 결국 이승만은 동반자살을 가장하고 자신만이 살아남는 방법을 택하였다. 단정론의 등장과 함께 분단의 고착화 등 민족적 비극의 가능성을 절감했던 김구는 이승만에 비하여 더 순박한 이상에 젖어 있었다. 결국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國民會議)와 이승만이 이끌던 한국민족대표자대회(韓國民族代表者大會)의 통합이 무산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김구의 배신감이 배가되었다. 이 무렵에 김구가 주장한 단정 반대의 논리를 들어보면, 단정은 38도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북한의 단정을 유발함으로써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올 것이며, 통일 정부를 이룰 희망이 없다고 해서 단정이 차선일 수는 없으니 남북 협상을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구의 단정 반대론에도 원초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처음부터 단정 반대로 일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김구는 당초 우익 세력을 결집해 단정을 더욱 통일적으로 전개하려고 조직한 민족통일총본부에 부총재로 취임함으로써 이승만의 단정 노선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김구가 이승만의 정읍 발언 직후에 단정 반대를 분명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소공위가 결렬된 뒤에는 단정론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간파 정당들과 한국독립당이 결합하여 정당협의회를 결성하여 단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한 예로써 김구는 1947년 11월 30일에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승만을 방문하여 요담한 다음 이승만이 주장하는 단독 정부 수립 견해에 완전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발표했다.(조선일보 1947년 12월 2일자)
   
   그렇다면 김구가 당초에 이승만의 생각에 따라서 단정론을 지지하다가 통일지상주의로 노선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뇌에 찬 이념적 판단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인간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앞서 말한 김구와 이승만의 합작 약속이 깨진 것이 일차적 계기였고, 이를 계기로 김구는 이제까지의 단정 동의와는 달리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조선일보 1947년 12월 23일자) 그런 상황에서 더 큰 빌미를 제일 먼저 제공한 것이 곧 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1947년 12월 4일)이다. 장덕수는 비록 친일의 허물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 암살에 대해 군정과 이승만은 김구에게 혐의를 두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한독당 요인들을 연행하여 취조하는 한편 그들의 집회를 금지시켰다.
   
   이러한 계제에 김구는 1948년 3월 12일과 15일, 두 번 검찰에 소환되어 살인교사를 집요하게 추궁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당했다.(조선일보 1948년 3월 14일자) 비록 임시정부였다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수반이었던 김구는 그때 겪은 일이 너무도 부끄럽고 원통하여 남들에게 이야기도 못했다. 그는 이번 일은 ‘형님’이 장택상을 시켜 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제 한민당이나 이승만과 더 이상 같은 배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김구의 이러한 입장 변화는 이승만의 단정 의지에 대한 반사 행동이었다. 이념은 애증을 뛰어넘지 못했다.
   
   단정론과 통일론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좌우익이 모두 피로해 있을 무렵 정국의 흐름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1948년에 제주4·3사건은 이승만에게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국회 내의 구도를 우파 대 좌파의 대결 구도로 변경시킴으로써 국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곧 제주4·3사건은 한민당으로 하여금 체제를 둘러싼 이승만과의 연대를 강화해 주었고 이로써 힘이 실린 이승만은 단정을 더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단정론을 옹호하는 입장(한림대학교 김영명 교수)에서는 “과연 통일 정부는 민주 정부보다 당연히 앞서는 가치인가?”라고 물으면서 “당시 우익 주도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남한의 단정 수립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바람직하기까지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가치는 민주적 통일 정부의 수립에는 비길 수 없지만, 당시 한반도에서 민주적 통일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지나친 이상론이며, 우리에게 고통과 비극을 안겨준 단정 수립은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次惡·second worst choice)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자 김용호 교수(인하대학교)는 그것이 차악이 아니라 차선(次善·second best choice)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차선이었는지 아니면 차악이었는지의 의미상의 차이는 미묘하다.
   
   
   친일 청산의 문제
   
   해방정국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역사가 반드시 정죄(定罪)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격동의 해방정국에서 분출하는 복수심과 망국에 대한 추궁의 심리 속에 모두가 애국자처럼 외치며 이미 이성은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었다. 더욱이 해외파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촉수 안에 머물렀던 국내파 민족주의자들에 견주어 더 몸짓이 거칠었고 목소리도 컸다. 그 가운데에 김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구는 1945년 12월 27일 ‘3000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에서 친일파에 대해 언급하며 “적지 않은 협잡 정객과 또 친일분자·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 한다. 그것은 대의명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많아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고 선언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였고, 따라서 그들은 감옥에 가야 한다”(마크 게인(Mark Gayn)·재팬다이어리(Japan Diary)·433쪽)는 그의 주장을 들은 한민당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적어도 친일 논쟁은 한민당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화두였다. 그들은 역공을 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격노하여 반격에 나선 인물은 조병옥(趙炳玉)이었다. 당시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는 정치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친일 비리를 꿰뚫고 있던 터라 할 말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논리가 친일(pro-Jap)은 먹고살자고 한 일(pro-Job)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운형과 안재홍(安在鴻)이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당하자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에게 불려가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전력(前歷)을 공격하고, 김규식의 아들이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의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사실을 들추었다. 따라서 고의로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민족운동을 방해하였거나 민족운동자들을 살해한 자가 아니면 취업으로 인정하고 감싸야 한다고 강변하면서(‘나의 회고록’·173쪽) 그는 더 따져보겠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으로서는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김구나 좌익의 주장을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민족 반역자나 친일파는 일소하여야 하지만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놓고 볼 일이다. 우리의 강토를 찾아낸 후에 우리의 손으로 재판하여야 하며 지금은 누가 친일파이고 누가 반역자인지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친일파를 처리할 수 없다는 그의 표면적인 구실은 그것이 결국은 국론을 혼란케 하여 통일을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이었다. 친일 논쟁에 하지(John R. Hodge)가 이승만의 편을 든 것도 한민당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로서는 본디 친일파를 두둔할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영어를 알 만한 인물로서 허물이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는 데 애로가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에서 본다면 선명성이라는 점에서 김구가 우위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이승만의 정치적 야망으로 볼 때 대중 동원이나 정치 자금 그리고 인물을 모아가는 과정에서 지주나 매판자본가를 깨끗이 물리칠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3회 망국의 책임) 논의했듯이, 식민 지배 반세기를 지난 뒤의 해방정국에서 친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김구가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을 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였다.
   
   
   죽음이 갈라놓은 역사적 평가
   
   어떤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려면 생전의 업적이 일차적으로 근거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인물사 연구의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 서글프고도 통속적으로 말하면 “자식이 출세하여 조상을 붓으로 키우는 일”이 허다하며, 어떤 사건의 연루자로서 마지막 생존자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자기중심적 논지로 변질되어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러한 조건보다도 더 역사적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의 죽음의 모습이다.
   
   1949년 6월 26일 현역 군인 안두희(安斗熙) 소위는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그는 1961년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자객의 칼에 찔리기도 했다. 그 뒤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신했으나, 1987년 3월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權重熙)에게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두희는 이어서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몇 차례에 걸친 응징을 겪었는데 그 과정에서 김구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 안두희는 국회 법사위 산하 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그는 인천의 자택에서 박기서(朴琦緖)에게 피살되었다.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는 김구의 살해범이 안두희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분노하여 그의 집을 찾아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 당시 언론들은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고 설명했다. 박기서는 살인죄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1절 특사로 사면되었고 당시 안두희를 때려 죽인 몽둥이에 쓰인 문구는 ‘정의봉(正義棒)’이었다. 사회는 그를 의인으로 부르고 있다. 권중희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나 마석의 민족민주열사의 묘에 묻혔다.
   
   안두희는 옥중에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글의 형식으로 일기를 써 ‘시역(弑逆)의 고민’(1955)이라는 이름으로 회고록을 출판했다. 그가 자신의 처사를 ‘시역’이라고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그는 이 글에서 그날 경교장을 찾아가 전보(轉補)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김약수(金若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김구가 격노하여 벼루와 책을 던지는 바람에 자신도 분노하여 “만민이 추앙하는 국부”를 쏜 죄인이라고 술회했다. 김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배후의 이야기는 물론 없다.
   
   김구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이 그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안두희는 종신형을 받고 수형 1년8개월 만인 1951년 2월에 석방되고 다시 2년 뒤에 복권되어 군수사업으로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암살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암살의 경우에 명시적 지시가 하달되는 경우는 드물며, 은유(隱喩)와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배후를 밝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대명천지에 댈러스에서 암살된 케네디(JFK) 대통령이나 수백 명이 지켜보는 마닐라공항에서 피살된 필리핀의 아키노(Benigno Aquino) 대통령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김구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안두희를 죽인 것이 민족정기를 살리는 길이었다고 말하지만 치매에 걸린 팔순 노인을 몽둥이로 때려 죽인 것이 민주국가에서 온당한 응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장군 알키비아데스(Alkibiades)가 스승 소크라테스(Socrates)를 찾아가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제자에게 “네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은 몸에 해독제를 지니고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김구는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실천한 인물이지만 해독제를 준비하지 못하고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다.
   
   이승만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쉽다. 오래 사는 것(壽)이 오복 가운데 첫째라고는 하지만 오래 산 것이 욕이 되었다.(壽則多辱) 그리스의 현자(賢者) 솔론(Solon)의 말에 따르면 “독재자의 자리가 마음에 끌리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내려오는 길이 없다.” 그의 말로가 그의 뜻이 아니라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나쁜 ×’이었다고 변명하겠지만 아첨을 물리치는 것도 정치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아첨꾼들이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할 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의 행적과 업적을 돌아보았어야 한다.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권력은 가장 매혹적인 수의(壽衣)”였다.
   
   한국의 민족운동사가 가지는 하나의 비극은 이러한 대조적이고도 상호보완적인 두 가지 타입의 민족 지도자들이 화목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중화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천리푸(陳立夫)가 김구를 겪어본 다음 “김구는 인화로써 정국을 영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아쉬워한 대목이 여운을 남긴다. 이승만에게 더 큰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김구가 천수를 누리고 그의 경륜을 폈더라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밝았으리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김구는 그 노회(老獪)함에서 이승만을 따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설령 이승만을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의 격정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장해 줄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의 승부는 예정된 것이었고 운명적인 것이었다. 가슴으로 살아온, 그래서 때로는 낭만적이었고 전략 개념이 부족했던 김구에게는 순수함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가슴으로 살다간 사람이 머리로 산 사람을 이긴 사례가 없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 201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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