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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주년 특집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낫·창으로 무장한 시위대 경찰 눈알 빼고 혀 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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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2369호] 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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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낫·창으로 무장한 시위대 경찰 눈알 빼고 혀 자르고

세 번의 비극 ① : 대구사건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의 기운이 막힌다.”
-강증산(姜甑山)
▲ 대구사건 당시의 희생자 시신.
사회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할 말을 못하고 안 할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학문이 이데올로기의 외풍(外風)을 만나기 때문이다. 일찍이 헝가리의 사회학자 만하임(Karl Mannheim)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존재구속성(Seinsgebundenheit)’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이념의 굴레를 쓰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반공’이라는 불퇴전의 보루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공부하던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이 공항 검색대에서 압수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름에 막스(?)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고전으로 꼽히는 무어(B. Moore)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표지가 빨갛다는 이유로 금서였으며, 라흐마니노프(Sergei Rakhmaninov)가 소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창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볼륨을 낮춰 그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외국에서 좌파 서적이라도 가지고 들어오려면 표지를 찢어버리거나 매직펜으로 제목을 지워 세관원의 압수를 모면했다.
   
   그와 같은 엄혹한 시대는 의외로 길었다. 국어 시간이면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대회, 반공 표어짓기대회를 치렀고, 미술 시간에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의 학습을 거쳐야 했고, 음악 시간에는 반공 노래자랑을 했고, 체육 시간에는 반공 마라톤대회에 나가 뛰어야 했다. 교과서 뒷장에는 ‘(1)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는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었고 ‘통일의 노래’를 실은 적도 있었다.
   
   반공·북진 통일이 아니라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치인은 처형되었고, 용공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제재 대상이 되었다. 향토예비군교육장에서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 과업”이란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학력이 낮은 친구들은 그것을 외우지 못하여 그저 “때·무·쳐·이”라는 첫 글자만 외웠다. 반공은 일상화되었고 거기에 익숙해 갔다. 그렇다면 반공은 악(惡)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논란이 되지만,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던 시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세 번의 사건, 곧 1946년의 대구사건, 1948년의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당장 사건의 명칭부터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는다. ‘대구10월항쟁’(심지연)인지, ‘대구인민항쟁’(박헌영·정해구)인지, 우익들의 호칭처럼 ‘대구공산폭동’인지, ‘대구사건’(대구MBC)인지 아직 학계의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이름 짓기도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구사건’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해서도 독자들의 양해를 얻고자 한다. 공자(孔子)께서 역사를 기술하면서 “있는 대로 설명할 뿐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말라”(‘述而不作’·논어 述而篇술이편)고 하신 말씀을 거듭 유념하면서 이 글을 쓴다.
   
   
   1946년, 대구의 분위기
   
   1946년의 상황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조속한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점차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5월에 미·소공위가 정회에 들어감으로써 그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기대감마저 무너졌다. 이러한 정치적 혼미에 대하여 우익이나 미 군정이 초조를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 정작 초조와 불안을 느낀 것은 좌익, 특히 박헌영(朴憲永) 일파였다. 7월부터 시작된 좌우합작은 좌파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국의 운영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게 만들었으며, 11월 14일로 확정된 남한의 과도 입법기구의 창설은 좌익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한의 상황은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화약고와 같았다.
   
   박헌영으로서는 이와 같은 정적(靜寂)을 견딜 수 없었다.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사건(1946년 5월 15일)으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내부의 도전을 받고 있던 그에게는 일거에 형세를 만회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후난(湖南) 추수 폭동(1927)을 연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의 수뇌부는 강성(强性)을 과시하면서 당내 반대파의 도전에 반격을 가하고자 9월 9일의 총파업을 지시했다. 전위(前衛·vanguard) 이론에 심취했던 박헌영으로서는 파업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파업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철도 노조를 겨냥했다.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그 자체로서 매혹적인 것이었다.
   
   7000여명의 부산철도 노동자들은 9월 15일 군정청에 제시한 임금 인상과 일급제 반대 등 6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부분 태업으로 맞서 오다가 9월 23일 파업에 돌입했다. 이때 부산철도 노조의 중심에는 백남억(白南檍)이 있었다. 대구사건을 취재했던 대구매일신문 기자 정영진(丁英鎭)의 증언에 따르면, 백남억은 규슈대학(九州大學)을 졸업하고 부산철도국 운수과장으로 재직 중인 지식인이었다.(‘폭풍의 10월’ 297~298쪽) 부산철도 노조를 시발로 하여 대구와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4만여명의 철도 종업원의 파업이 일어나자, 전평(全評) 산하 각 분야의 공장과 직장으로 파업은 신속하게 파급되었다.
   
   미 군정이 보기에 당시 대구의 공산주의자들은 아마도 ‘대구의 분위기를 서울까지 가져간다(bring Taegu to Seoul)’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당시 대구의 상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좌익적 분위기가 강했다. 한민당 요인으로서 도당의 재정을 맡고 있는 박노익(朴魯益·동아자동차주식회사 회장) 등 기업인들의 정치 참여가 있었으나 좌익적 분위기 속에서 입지를 강력하게 내세울 형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상북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당시의 유력 잡지였던 ‘무궁화’ 1945년 12월호, 80쪽에 수록된 대구인민위원회 광고에 따르면,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 최문식(崔文植), 산업부장 이선장(李善長),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재정부장 김성곤(金成坤)·채충식(蔡忠植), 노농부장 정시명(鄭時鳴), 선전부장 황태성(黃泰成)으로 구성된 대구인민위원회는 능력이나 이념에 대한 경도, 그리고 지적(知的) 수준에서 우익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울에서 파업을 지휘하고 있던 전평위원장 허성택(許成澤)은 함북 성진(城津) 출신으로 적색 노조로부터 시작하여 모스크바동방노력자대학을 수료한 파업전문가였다.(그는 대구사건 이후 월북하여 노동상(勞動相)과 노동당중앙위원을 역임한 후에 종파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
   
   어느 일이나 다 그렇듯이 역사에서의 어떤 사건도 느닷없이 문득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까지에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이미 깔려 있었는데, 대구사건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가 있다.
   
   첫째로는 식량부족과 이에 따른 기아(飢餓)문제였다. 당초 군정은 식량부족이란 신생국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대구의 상황만 보더라도 식량 사정은 그리 열악하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으로 말미암아 군정은 미곡수집령(米穀收集令)에 따라 2월부터 강제 미곡 수집에 들어갔다. 농가가 식량으로 보유할 수 있는 쌀은 1인당 4말5되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 차례 기아 시위가 일어났다. 대구 초등학생의 평균 50% 이상이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고, 전 학생의 80%가 점심을 굶는 학교도 있었다. 굶주린 시민들은 열차를 타고 전북 지방에 가서 쌀을 사 가지고 오다가 신태인역에서 그곳 소방대와 청년대의 제지를 받았다. 시위대는 8월 19일 오전 11시 도청 앞에 몰려들었다. 시위가 격화된 것은 콜레라의 발생으로 영남·호남·충북 일부 지역에서 열차 운행이 중지됨으로써 양곡 수송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대구 사태의 두 번째 요인은 경찰의 억압이었다. 당시 군정이 판단한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근무했던 한국인 경찰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민중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이 존재했다. 더욱이 경찰은 우익 청년단체의 협조를 얻어, 범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음에도 좌익 지도자를 체포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피의자를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양곡 수집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이 부당하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에 괴산(槐山)경찰서 옆에 살았는데 밤이면 고문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아 잠을 잘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정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경북 경찰의 총수인 권영석(權寧錫)은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친일 관료로서 관구경찰청장에 오른 인물이었고, 대구경찰서장 이성옥(李成玉)은 창씨명이 마쓰오카 히사요시(松岡久允)로서 일제강점기에 안동(安東)경찰서에서 형사주임으로 근무할 때 이미 종칠위훈팔등(從七位勳八等)의 서훈을 받았으며, 광복 당시에는 경시(警視) 계급을 끝으로 경찰직을 떠났다가 군정청에 의해 대구경찰서장에 기용된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 ‘순사’는 두려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울면 엄마는 “순사 온다”고 말해 울음을 그치게 했다.
   
   셋째로는 당시에 만연했던 콜레라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대구에서 8월경에는 1만여명이 감염되어 있었다. 위생에 대한 경비·통제·격리는 국방경비대의 임무였기 때문에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던 경찰이 통행 검문소를 관리했는데 이때 동원된 경찰의 거친 처사로 말미암아 의료진과 화목하지 않았다. 8월 1일 대구의전(大邱醫專) 교수 이상요(李相堯)는 콜레라가 발생한 관내에 7월 30일부터 교통을 차단하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방역 순찰에 동행했던 국방경비대원도 이상요의 추궁에 가세하자 소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후 학교로 돌아온 이상요는 경찰서에 연행되어 공무집행방해죄로 구금되었다. 대구 사태의 진원지가 대구의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건의 전개
   
   9월 30일에 대구에서는 여러 곳에서 운동회를 끝마친 학생들이 시위 행렬을 벌이다가 경찰의 제지를 당하여 사소한 충돌이 있던 터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태였다. 아직 추석(9월 10일) 분위기도 사라지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후 노동자들이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하여 1000여명이 시위 행렬을 개시하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중은 불어나 3000~4000명이 되었는데, 연령은 12~17세로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군중들은 질서를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은 호기심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색깔이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이 정도의 대치 상황은 당시로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시위대를 다루면서 매우 거칠어 시민들 사이에 증오감이 일어났다.
   
   대구 역전에 모인 노동자·지식인·학생·사무원·일반 시민들은 “쌀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 시위의 배후에는 경상북도 인민위원장 이상훈과 인민보안대장 나윤출(羅允出)이 있었다. 나윤출은 본디 씨름장사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그는 그 뒤 대구를 탈출,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임되어 체육계에서 활약했으며, 1966년 런던월드컵축구대회의 임원으로 참가했다가 숙청되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청년행동대원 100~200명씩이 1개 분단을 이루어 대구 역전 광장을 비롯하여 주요 거리에 배치되어 암약하고 있었다.
   
   10월 2일 12시에 경북지사 헤론(Gordon J. Heron) 대령이 주둔군에 탱크를 요청하자 프레지아(John C. Presia) 소령이 이끄는 탱크부대가 거리를 순찰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당시에 배치된 병력은 219명이며, 부산 제5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이날 오후 5시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오후 7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당시의 소요에 대하여 탱크를 동원할 상황은 아니었으나, 군정은 이곳의 좌익적 성향에 지레 겁을 먹어 과잉반응한 측면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군중들이 해산함에 따라 사람의 숫자가 적어졌는데도 경찰이 발포했다. 이날로부터 대구 일대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왜관(倭館)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장석한(張錫翰)과 경관의 눈알을 빼고 혀를 자른 다음 살해했다. 경찰의 성기를 잘라버린 경우도 있었다.(‘재팬 다이어리(Japan Diary)’·마크 게인(Mark Gayn)·420쪽) 이때 민간인 22명과 경찰 31명이 죽었다.
   
   10월 2일 아침이 되자 수십 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의한 피살자라며 사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이를 목격한 군중심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조선일보 1946년 10월 8일자) 사망자의 신원에 대하여는 좌익과 우익의 견해가 다르다. 당시 남로당원으로서 전평 경상북도평의회 간사였던 이일재(李一宰)는 나와의 인터뷰(대구 그랜드호텔, 2003년 10월 1일)에서 당시 사망자는 대팔(大八)연탄공장의 공원이었던 황팔용으로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대구 MBC가 제작하여 1996년 10월 10일에 방영한 ‘대구 10·1사건 50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했던 당시 대구의전 교수와 경찰 관계자들은 좌익들이 대구의전 영안실에서 그 시체를 탈취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체의 이름이 황팔용이었다는 이일재의 증언이 맞을 수는 있지만 시체의 신원에 대해서 나는 대구의전 교수들의 증언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민중들은 경찰서를 포위하여 한동안 점거했으며 인근 지방의 경찰서와 지서의 무기를 강탈하는 동시에 청사를 점령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대구의 군정 당국은 충남과 충북에서 경찰을 지원받아 대응했다. 경찰에 대한 보복살해는 더욱 늘어났다. 살해 방법은 몽둥이나 쇠꼬챙이를 사용했으며, 시체의 머리를 자르고 얼굴의 껍질을 벗기고 팔다리를 잘랐다.(조선일보 1946년 10월 29일자) 이날 대구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죄수 100여명이 탈출했으며 시위대는 도청 관리와 경찰의 가택을 습격하여 가구를 파손하고 가족들을 납치했다. 소요는 얼마 동안 더 진행되다가 10월 21일 밤에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며, 연말에 이르러서야 소요는 가라앉았다. 군정은 특별군법회의를 설치했는데 심지연 교수(경남대학교)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보통군법회의가 5년형 이상을 선고할 수 없기 때문에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구 사태는 “대구에서만 있었던 사건”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70~80여개 군 및 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 한 예로 선산인민위원회의 내정부장이었던 박상희(朴相熙)는 10월 3일에 선산군 민청 간부 김정수(金鼎洙)와 더불어 봉기에 참여했다. 그들이 이끄는 2000여명의 군중들은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구미경찰서를 습격하여 백철상(白喆相) 경찰서장에게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으나 이튿날 경찰의 반격을 받아 박상희는 군농조위원장인 김광암(金光岩) 및 민청 간부인 장달천(張達千)과 함께 사살되었다.(‘대구 리포트(Taegue Report)’·이그지비트 에프(Exhibit F)·20쪽, ‘폭풍의 10월’·정영진·389~390쪽) 백남억은 한민당 간부 박노익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박노익의 사위였다. 박노익은 공화당 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朴浚圭)의 아버지이다.
   
   
   유산
   
   훗날 한국전쟁 당시에 낙동강(洛東江) 전선이 위험하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끌어내어 기결수나 미결수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의 예비 검속이었다. 특히 대구와 왜관에서 헌병들은 200~300명씩 줄을 세우고 사살했으며, 그중에는 12~13세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총이 부실하여 단발에 사살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확인 사살을 했고, 그러고도 살아남은 자의 비명이 그치지 않았다.(‘프랭크 피어스 리포트(Frank Pearce Report)’ 1950년 8월 11일(11 August 1950))
   
   그렇다면 대구사건 당시의 희생자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어쩌면 우문(愚問)일 수 있다.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보복살해와 우익의 즉결처분과 암매장은 증거조차도 남아 있지 않으나 그 숫자는 매우 높으리라고 추정되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전쟁 당시에 옥중에서 학살된 인명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법천지에서 자행된 사형(私刑)과 불법행위는 더 참혹했다. 그것은 우익이 좌익에 비해 더 잔혹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좌우익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이 자행되었다. 이 당시에 대구형무소에서 군에 이첩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는 모두 1402명이었다.(대구매일신문 1960년 6월 7일자,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 371~390쪽·2000년) 그 잔혹상은 경북 일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박헌영의 기록(‘투쟁일지’ 119쪽)에 따르면, 10월 16일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대구 소요 사건의 주모자가 서울에 잠입했으리라는 확신 아래 3000여명의 경관을 동원하여 시내 각 여관과 유곽(遊廓)을 검색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 33명을 검거하여 경관을 해친 자라고 발표했다.
   
   대구 사태를 설명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점은 과연 이 사태의 배후에 박헌영 또는 남로당이 얼마나 깊이 연루되었으며 그들의 의도는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미 군정 측에서는 이 사건이 박헌영의 작품이라고 확신했고, 일부 조선공산당 계열에서도 그렇게 믿고 이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며, 우익에서도 이를 비난했다. 공산당에서는 이를 극좌 모험이라고 비난했고, 안재홍(安在鴻)은 실패한 이립삼(李立三) 노선(공산화 과정에서 먼저 거점도시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 농촌으로 혁명을 확산한다는 이론)을 방불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당사자인 박헌영은 이번 사건이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선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려는 것은 이승만 일파와 동일한 견해”라고 응수하면서, 이번 사태야말로 동학란(東學亂·동학농민운동) 및 3·1운동과 더불어 남조선의 3대 인민 항쟁이라고 자평했다.(‘10월인민항쟁’·박헌영·53, 67쪽)
   
   나이가 많은 독자들은 위의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실명(實名)을 보면서 내가 대구사건을 쓰면서 왜 부담스러워하며 사설(辭說)이 길었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박상희(1906년생)는 박정희 전 대통령(1917년생)의 형이었고, 백남억(1914년생)과 김성곤(1913년생)은 훗날 민주공화당의 중요 당직자였다. 황태성(1906년생)은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의 무역성 부상(차관)이 되어 남한의 군사정부가 친공산주의 정권이라고 오판한 김일성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1926년생)을 만나러 밀파되었다가 처형된 인물이다.(‘김종필 증언록’ 중앙일보 2015년 4월 20일자)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그런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박정희의 운신과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尹潽善) 후보도 이 문제를 거론했다. 당시 유세반원이었던 김사만(金思萬)은 영주(榮州)에서의 연설에서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으며, 김일성이 내려오면 만세를 부를 사람이 많다”(조선일보 1963년 10월 13일자)고 말했다가 거센 역풍을 만났다. 그때 박정희와 윤보선의 당락의 표차가 15만6000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김사만의 설화(舌禍)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역사적 평가를 하자면, 대구 사태는 전근대적 형태의 민란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흉작, 수입감소, 전염병이라는 민란의 전형적인 3대 요소에 의해 일어난 민중 봉기였다. 여기에 틈새를 노리고 있던 좌익이 이를 호기로 이용했을 뿐이다. 대구 사태 당시에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적기가를 부르고, 노동 해방의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그것이 공산혁명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박헌영의 평가는 대구 사태를 공산혁명으로 지나치게 미화했고 우익은 거기에 이념을 덧씌웠다. 그것은 굶주림과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남로당의 전술이 종속 변수로 개입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현대사 연구는 이념의 문제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념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몇몇 전문가들에 국한된 것이었고, 민중의 생각은 그토록 정제되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대구사건은 박헌영의 주장처럼 현대사의 3대 혁명도 아니고 우익의 주장처럼 빨갱이들의 폭동도 아니다. 그것은 신생국 창설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의 표출이었다. 거기에 해묵은 원한과 전통적인 모순에 대한 격정과 질주가 중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대구 사태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민중적 소망을 담은 현대적 민란이었고 그로 인한 잔혹사였을 뿐이다.
   
   <편집자 주> 이 시리즈는 앞으로 남북협상, 세 번의 비극② : 제주 4·3사건, 세 번의 비극③ : 여순반란, 한국전쟁과 김일성 신화의 진실② 순으로 이어집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정정과 사과의 말씀
   
   지난 회(10회)의 “김일성 신화의 진실”(1)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이명영 전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서술은 사실이 아니며, 필자가 전혀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근거 없이 작성한 것으로 고명하신 이명영 교수님과 그를 아끼는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점을 사과드리고, 이번 실수를 거울삼아 앞으로의 글에 더욱 세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 신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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