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에서 작전 중인 이스라엘군. ⓒphoto 연합
가자지구에서 작전 중인 이스라엘군. ⓒphoto 연합

1982년 4월 21일 이스라엘 장교 한 명이 이스라엘 북부의 레바논 접경지역 빈트 자빌에서 이동하다가 지뢰를 밟았다. 폭발과 함께 이 장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병원에 옮겨지기도 전에 사망했다. 이스라엘군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이스라엘은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차관의 중재로, 교전하던 레바논과 9개월째 휴전 상태였다.

이스라엘군의 조사 결과 문제의 지뢰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매설한 것이었다. 당시 레바논 내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함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본거지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 외신과 반(反)이스라엘 국가들은 “사고 지역은 이스라엘군이 오랫동안 작전을 수행했던 곳”이라면서 “이번 사건은 이스라엘군이 설치한 지뢰에 자국군 장교가 당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최우방국인 미국이 중재해 이뤄진 휴전을 가능하면 깨서는 안 된다는 외교적 압박감을 느꼈다. 교전이 다시 일어나면 더 큰 경제적 손해를 보는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 일부 정치인 사이에서는 인명피해가 크지 않고 외교적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군사적 대응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다.

군은 흔들리지 않았다. 군은 사고 지역에 아군(我軍)이 수년간 지뢰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군이 의도적으로 설치했다고밖에 볼 수 없으므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8년 건국을 선언함과 동시에 주변 아랍국가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에선 안보를 책임지는 군의 입김이 누구보다 셌다. 아리엘 샤론 당시 국방장관(훗날 총리 역임)은 곧장 전투기를 레바논 영공으로 출동시켰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근거지인 레바논 중부 해안도시 다무르의 군사 시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적군 20여명을 사살했다.

‘다무르 공습’이라고 알려진 이 작전은 작은 사건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물고 처벌해야 더 큰 피해를 막는다는 이스라엘군의 원칙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베긴-사다트 전략연구소의 앨런 레프코비츠 연구원은 지난 8월 20일 나와의 전화통화에서 “군사적 맞대응을 보복이라면서 다소 충동적인 조치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은 적절한 보복은 제2의 피해를 막는 합리적인 처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군은 군사적 대응을 할 때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규정을 정해놓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면서 “이 같은 군의 유연성은 적이 이스라엘군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공격을 받고도 ‘말 펀치’만 날리며 가만히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공습을 감행하는 식의 ‘예상 가능한 대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보복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앨런 연구원은 전했다. 적이 여러 경로로 공격을 해오는 만큼 대응 방법도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뮌헨’이라는 이름의 영화로도 제작된 이스라엘의 ‘자암 하엘(신의 분노)’ 작전이 이와 관련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작전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72년 9월 5일 독일 뮌헨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은 숙소로 두건을 뒤집어쓴 괴한 8명이 들이닥쳤다. 괴한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무나자마트 아이룰 알아스위드(검은 9월단)’였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죄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범인들은 독일 내 신(新)나치주의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원 무장상태였다. 독일 특수부대팀이 투입돼 구출을 시도했지만 작전은 실패였다.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모두 살해됐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군에 시리아와 레바논의 ‘검은 9월단’ 연계 시설에 대한 폭격을 지시하는 동시에 ‘뮌헨올림픽 테러’를 지시한 적 지도층의 암살을 목표로 한 별동팀을 즉각 구성했다. 훗날 공개됐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군 장교·외교관 등으로 구성된 이 팀의 이름은 ‘X(엑스)’였다. 전투기 폭격도 큰 피해를 주지만, 적에게 확실한 공포와 함께 처벌을 하기 위해선 해당 사건을 기획하고 지시한 적 간부를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X’는 결성 한 달 만에 이탈리아 로마에 은신 중인 테러 연계범을 암살했다. 얼마 뒤엔 프랑스에 머무는 ‘검은 9월단’의 우두머리 마흐무드 함샤리를 제거했다. X 요원이 기자 행세를 하며 파리에 살던 함샤리의 집에 들어가 폭탄을 설치하고 나서 터뜨렸다. 이 같이 X는 ‘뮌헨 테러’와 연계된 자들 수십여 명을 끝까지 찾아내 처단했다. 이스라엘은 암살 사건으로 인해 유럽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이 작전을 계속 이어나갔다. 메이어 총리가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X는 해체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유지됐다. 이스라엘의 이 같은 끈질긴 보복으로 ‘검은 9월단’은 소련 등에 접촉해 이스라엘과의 중재를 요청하는 등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거친 보복조치로 긍정적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실제로 메이어 총리는 1973년 교황을 만나러 로마로 가다가 암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친(親)팔레스타인 성향의 바티칸 내부 관계자가 메이어 총리의 일정 정보를 유출해 메이어가 탄 비행기가 ‘검은 9월단’의 미사일 공격을 받을 뻔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복수는 ‘테러를 테러로 갚으려 한다’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국가의 이미지 손실도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억척스럽게 보복 대응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6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가자지구(地溝·strip)에서 이스라엘 남부로 로켓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은 즉각 로켓의 위치를 파악해 전투기로 폭격했다. 지난해 여름 이스라엘은 로켓 공격에 대한 반격으로 50일간 하마스의 통치지역인 가자지구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공격은 하마스 대원들이 이스라엘 10대 3명을 납치 살해한 것이 빌미가 됐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은 2100명의 사망자(이스라엘 측 자료, 팔레스타인은 2300명으로 주장)가 발생했다. 단순 비교하면 3 대 2100의 보복, 700배로 갚아준 셈이다. 이때도 가자지구의 민간인 피해가 속출해 이스라엘에 대해 무자비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지나친 보복조치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50일간의 군사작전을 강하게 밀어붙인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해 총리 연임에 성공했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강경 대응을 지지하는 국민이 상당하다는 의미였다.

전문가들은 적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징이 이스라엘의 이 같은 강경한 정책을 낳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정 한 국가에 관용을 보였다 하더라도 또 다른 적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관된 보복 대응이 더 효과적인 방어전략이 됐다는 것이다. 레프코비츠 연구원은 “‘보복 학습 효과’가 생겨 이제는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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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조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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