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 차기 대표로 유력시되는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 ⓒphoto 연합
영국 노동당 차기 대표로 유력시되는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 ⓒphoto 연합

요즘 영국 야당인 노동당의 변화를 보면 4개월 전의 그 노동당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지난 5월 총선에서 의외의 참패를 당해 에드 밀리밴드 대표가 사임한 후 4개월여가 지났다. 이 기간 동안노동당은 당 대표 선거를 치르며 정말 놀랄 정도로 변했다. 특히 대표 후보 네 명 중 한 명으로 현재 당선 1순위로 꼽히는 좌파 정치인 제러미 코빈이 일으킨 바람은 노동당을 재창당 수준으로 몰아갈 기세다. 그래서 요즘 영국 언론에는 보수당이란 정당이 있기나 하느냐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온통 9월 12일 투표 결과가 나오는 노동당 대표 선거 이야기뿐이다.

유권자들의 예상 지지율을 보면 코빈의 지지율이 다른 후보보다 월등히 높아 코빈의 당선은 거의 확정된 상태다. 김이 빠질 만도 한데 영국은 아직도 코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4개월 전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새로운 좌파 대표의 선출 후 기존 정책과의 조율 문제 등 후유증이 불거질 것이고, 코빈 대표가 펼칠 보수당과의 ‘전투’가 매우 볼 만한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당 115년 역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대표가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코빈은 32년간의 하원의원 생활에도 불구하고 체제 밖 인물이었다. 코빈을 일러 한 영국 언론은 “32년 경력의 하원의원이 영국 좌파의 새로운 포스터 인기 모델이 되었다”고 평했다. 그는 노동당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영국 좌파 전체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코빈이 갑자기 대표 예상후보 1위가 된 것은 새로 바뀐 노동당 대표 선거 규정 덕분이다. 직전 대표 에드 밀리밴드는 노동당 내 중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의 현대화를 밀어붙였다.(주간조선 2370호 커버스토리 노동개혁 참조) 그중 하나가 대표 선거제도다. 전에는 하원의원과 유럽의회의원, 노동당 등록 당원, 연계노동조합 등으로 균일하게 삼분된 선거인단의 투표를 합해 대표를 선출했다. 그러나 개정된 대표 선거 원칙은 ‘1당원 1표제(OMOV·One Member One Vote)’다. 노동당 당비를 내는 등록 당원 29만9755명, 연계단체 지지자 18만9703명, 대표 투표를 위해 3파운드를 내고 등록한 지지자 12만1295명 등 도합 61만753명 중 50만에서 60만 사이의 유효 유권자가 9월 10일까지 우편이나 인터넷으로 투표를 할 수 있다.(등록된 지지자 중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투표 직전까지 골라내는 작업을 한다.)

총선 참패로 초상집이어야 할 노동당은 지금 거의 축제 분위기다. 총선 직후부터 일기 시작한 노동당 당원 등록 바람도 놀랍지만 특히 대표 선출을 계기로 당원 수 증가에 가속도가 붙었다. 총선 이후 정식 등록 당원이 4만2550명 증가했다. 이는 거의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5월 총선 때만 해도 등록되어 있던 정식 노동당원이 약 20만명이었는데 무려 20%가 늘어난 것이다. 연계지지자, 등록지지자를 포함하면 노동당은 총선 이후 몸집을 두 배로 불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너무 잔인한지 모르지만 현실이 그렇다.

뿐만 아니다. 이번 대표 선거에는 7000여명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노동당 역사상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다. 모자, 부자. 형제 등의 가족 단위 봉사자들이 몰려와 당사에서 전화 봉사 등을 하고 있다. 휴가를 내고 와서 투표 준비를 돕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노동당으로 몰리는 지지자의 대부분은 젊은이다.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노동당뿐만 아니라 보수당 쪽에서도 흥분하고 있다. 노동당 쪽에서 일어난 정치 바람이 보수 성향의 젊은이들도 정치판으로 불러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가 생긴 가장 큰 배경은 총선 대패로 인한 노동당의 위기의식이다. 탈당했던 과거의 노동당원들과 지지자들이 노동당의 위기를 인식하고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이런 현상은 유독 노동당뿐만이 아니다. 연립 정당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집권여당이었다가 총선 패배로 존재 자체마저 위협받는 자민당도 비슷하다. 총선 패배 4일 만에 자민당 기존 당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만명이 당원으로 재등록 혹은 신규 등록했다. 보수당의 대승과 함께 펼쳐질 일방적인 과속에 위기를 느낀 노동당·자민당 지지자들이 새롭게 등록을 한 것이다.)

당원이 직접 대표를 뽑는 투표제도가 지지자들의 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킨 것도 당원 증가의 배경이다. 거기다가 대표 선거에 정말 혜성처럼 나타난 코빈의 회오리바람 같은 개인적 인기도 크게 한몫을 했다. 코빈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코빈 매니아들이 대거 입당을 하고 지지자로 등록했다. 그전까지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던 대표 입후보자 연설회, 특히 코빈의 연설회는 일시와 장소가 발표되자마자 표가 매진되었고 표를 못 사 입장을 하지 못한 지지자들은 연설장 근처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이런 광경 역시 노동당 역사에서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코빈의 이런 갑작스러운 인기는 본인이나 지지자는 물론 전 영국을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코빈은 대표 입후보 당시만 해도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나 지지자들 말고는 거의 알지 못하던 평의원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오래 의원 생활을 한 코빈과 대화를 해 본 동료의원도 드물 정도였다. 당내에서 친화력이 전혀 없는 의원이었다. 거기다가 워낙 자신의 원칙이 강해 의원 생활 32년 동안 당명을 거의 500번이나 어기는 투표를 하원에서 했다. 그럼에도 코빈이 왜 출당 권고를 받지 않았는지가 이번 인기 급등을 계기로 다시 대두됐을 정도다.

코빈 스스로 동료의원들과 거리를 두고 따돌림을 선택한 측면도 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동료의원들도 그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표 입후보 등록을 할 때 필요한 동료 하원의원 35명(전체 의원 수 232명의 15%)의 지지서명을 받기도 어려웠다. 서명을 해준 의원도 실제 그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목소리를 대표 후보 논쟁에 끼워넣는다’는 이유로 서명을 해주었다고 공개적으로 토로할 정도였다. 동료의원들 대부분은 지지서명을 해줄 때 코빈이 이렇게 강력한 대표후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의외의 코빈 현상 때문에 충격에 빠진 영국 정계는 물론 좌파·우파 언론, 심지어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왜 코빈이 인기가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코빈이 아니면 남은 대표 후보 세 명 중 누가 돼도 좋다며 맹렬하게 코빈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까지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I don’t get it)’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을 정도다. 코빈 현상이라고까지 불리는 코빈의 인기 이유에 대해 논객마다 각기 다르게 설명을 하지만 순서 없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NGO 인사 같다’ ‘전통적인 노동당의 가치를 팔아 권력과 부를 누린 블레어 바이러스균에 감염된 노동당을 해독시킬 인물’ ‘재야의 정치인 같은 이미지’ ‘정치 공식에 들어 있지 않은 정치인’ ‘영국 의원들이 경비를 부당하게 청구해서 문제가 된 스캔들 때도 코빈은 650명 의원 중 경비를 가장 적게 청구한 의원이었다’ ‘토니 밴(노동당 하원의원을 지낸 원칙주의 좌파 정치인) 같은 정치인’ ‘권력을 위해 원칙을 굽힌(subordinated principals to winning power) 블레어파의 위선에 대한 반발 심리에 어필한 코빈의 원칙 위주 성향’ ‘자식은 명문사립학교 보내면서 공립학교 교육이 어쩌고 하고, 자신은 사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보건의료제도(NHS)가 위기라느니 어쩌니 하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려는 아내와 이혼까지 감행할 정도의 원칙주의자’ ‘1983년 초선 때부터 들고나온 정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차별받고 불평등한 사회를 반대하고 주택을 더 짓고 핵을 반대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신념(unshakeable beliefs)’ ‘다른 대표 후보 세 명은 기존 정치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코빈만 다르다’ ‘가공하지 않고 꾸미지도 않고 성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권력을 추구한 적도 없고 한 번도 당료나 대표가 되고자 한 적도 없다. 이번 입후보도 본인이 아니고 주위에서 떠밀려 나오다시피 했다’ ‘계산하지 않고 동네 펍에서 만날 수 있는, 그래서 힘들고 고단한 삶의 하소연을 들어 줄 듯한 키다리 아저씨 같은 정치인’ ‘하소연을 하면 내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짓의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그냥 어깨를 감싸안고 같이 울어 줄 정치인’ ‘똑똑하지 않고 젊지도 않고 옥스브리지를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가 돈이 많아 돈 걱정 하지 않고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고 부인이 미인도 아니고 세련되게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돈 많은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앙당에 있지도 않았고 현직이든 그림자 내각이든 해본 적이 없는, 아니고 없는 것 투성이의 정치인’ ‘반미, 반이스라엘, 하마스 헤즈볼라에 호의적인 정치인’ ‘영국 정치인 중 많은 사람들이 내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러나 코빈은 다르다.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의원으로서 항의 시위까지 한다’ ‘영국 정치인 중 처음으로 약자 애칭(JC)으로 불리는 정치인’ ‘홍보 담당 전략가도 없고 연설 대필가도 없어 자신이 믿는 바를, 자신이 옳다고 하는 바를 그냥 말하는 정치인. 코빈은 뭔가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유권자들이 받는다’ ‘사상이 너무 좌파이고 과격해서 당료도 되지 못했다. 그냥 조용하게 32년을 지역구를 위해 일하고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그래서 노동당이 대패를 한 2015년 총선에서도 2010년 총선보다 표차를 더 늘려 차점자와 무려 2만2000표로 다시 당선된 유일한 노동당 7선 의원’ ‘힘든 시절 낭만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치인’….

제러미 코빈이 부인 로라 알바레즈와 함께 런던 거리를 걷고 있다. ⓒphoto AP
제러미 코빈이 부인 로라 알바레즈와 함께 런던 거리를 걷고 있다. ⓒphoto AP

코빈에 대한 이런 평가들을 읽다 보면 한 사람의 현실 정치인에 대해 더 이상 무슨 칭찬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그의 자질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자신이 믿는 뭔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정치를 시작하고 의원을 했다면 지금까지처럼 영원한 평의원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그렇게 뒤에서 자신의 원칙만 내세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역구에서 사소한 민원이나 챙기는 일은 비겁하거나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소시민적이라는 말이다. 1983년 초선 때부터 들고나온 정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강점인 동시에 감점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바뀌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자이거나 현실정치 부적응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런 비평도 지금 노동당 대표를 뽑는 당원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노동당 내 평당원 사이에서는 코빈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 ‘계급 배반자, 자본주의 프락치, 보수주의자’로 매도당한다. 심지어는 요즘 노동당 내에서 가장 큰 욕인 ‘블레어주의자’로도 매도당하는 분위기이다.

어찌되었건 이제 정치 컨설턴트들은 바쁘게 생겼다. 영국 유권자의 취향이 코빈 같은 지도자형을 원한다면 결국 지도자를 그런 쪽에서 선출하든지, 그런 지도자가 없으면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10대들부터 늙은 연금생활자들까지 코빈을 자기네 사람(their man)이라고 자랑스러워하고 흡사 자기 동네 펍에서 같이 맥주 마시던 사람인 것처럼 여긴다면 자신의 고객 정치인도 그렇게 만들어 내야 한다. 심지어는 코빈의 노타이마저 인기의 이유가 되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제외하고는 다 물러났지만 사실 총선 전 영국의 주요 정당 지도자는 모두 같은 판에서 찍어낸 듯한 유형이었다. 정치적으로 아주 잘 다듬어진, 영국 지식인 혹은 언론이 좋아할 말들을 정치 홍보 전문가들이 써준 대로만 읽었다. 그런 지도자들만 봐온 유권자들이 ‘자신의 말’을 하는 정치인에게 열광한다면 그런 유권자들의 취향에 정치인들이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됐든 노동당원들로서는 드디어 자신의 신념으로 말하는 사람이 나왔다. 그 신념이 옳든 그르든, 노동당을 다음 총선에서 이기게 할지 다시 패배를 안기게 할지 모르나 최소한 홍보담당 측근이 말하라는 대로 인기 발언만 하지는 않는 정치인을 노동당원들은 오랜만에 만났다. 그래서 노동당원들은 열광하고 있다.

코빈은 지금까지 영국 유권자들이 보던 어떤 정치인과도 다르다. 만약 그가 올해 66세에 대표가 되고 5년 뒤인 2020년 총선에 승리해 총리가 되면 71세가 된다. 41살에 노동당 대표가 되고 44살에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 39살에 대표가 되었던 노동당 직전 대표 에드 밀리반드, 39살에 보수당 대표가 되고 43살에 총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 현 보수당 대표와 코빈은 나이 등 여러모로 다르다. 차기를 노리는 보수당 중진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이나 런던 시장 보리스 존슨과도 다르다. 그들은 모두 40대에, 말 잘하고 옷 잘 입고, 대대로 내려오는 부자에, 명문 대학들을 나왔다. 심지어는 헤어스타일까지 같고 배도 안 나오고 키도 크고 수염도 안 기른 스마트하고 지적인 모습이다.

코빈은 전기엔지니어와 수학교사 사이에서 태어나 노스런던폴리텍에서 공부한 평범한 서민 출신이다. 평범한 노인의 모습에 심지어 돋보기까지 썼는데, 영국 유권자들은 돋보기 쓴 정치인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래서 나온 말이 노동당원 중 코빈을 지지하는 많은 젊은이가 코빈에게서 부성을 찾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 이후 거의 20년간 보수 노동 양당 지도자들 모두가 ‘젊은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그들에게 결여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모습을 코빈에게서 찾았다는 말이다.

현재 캐머런 총리는 줄기차고 매몰차고 앙칼지게 내핍과 긴축을 강조한다. 이성적으로 보면 합리적이고 논리에 합당한 소리만 하지만 영국 젊은이들은 피곤하고 지쳤다. 현실의 고통에서 쉼터를 찾는 젊은이에게는 그들의 고민과 고뇌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면서 걱정해주는 인자하고 따뜻한 목소리의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런 이미지의 코빈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게으름을 꾸짖는 부모의 잔소리가 분명 맞지만 듣기 싫던 차에 자포자기 비슷한 심정으로 코빈에게서 도피처를 찾는 심리라 할 수 있다. 너희가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으려 해서 못살 뿐이고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돕지 않는다는 보수당의 닦달에 지친 게 영국의 젊은 세대다.

심지어는 코빈 현상과 메시아 신드롬을 연결하는 사람도 있다. 현실정치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카리스마 있는 정치 영웅을 기다리는 영국 젊은이의 심정에 코빈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영국 젊은이는 코빈의 키다리 아저씨 이미지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왜 언론이나 지식인이 이해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좌파에 대한 철저한 기피증이나 혐오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코빈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지는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라는 말이다.

영국 언론의 코빈에 대한 반응, 특히 정책에 대한 논평은 모든 영국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냉소적이다. 거의 미치광이 취급을 할 정도다. 물론 극우 성향의 데일리메일이 선봉에 서서 코빈을 몰아세우지만 데일리텔레그래프도 못지않다. 레닌 모자를 쓴 코빈의 사진을 어디선가 찾아내 싣는가 하면 심지어는 우주공상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괴물이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리는 사진을 코빈에 대한 논평기사 중간에 실을 정도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노동당에 우호적이던 좌파 성향의 가디언은 물론 자매지 옵서버마저 코빈을 시대착오적인 골수좌파로 몰아가고 있다. 시사잡지 이코노미스트는 거의 데일리메일 수준이고 좌파이던 인디펜던트마저도 돌아섰다. 코빈의 우군은 이제 존재조차 희미해진 공산당 기관지 모닝스타 정도다.

그나마 선데이텔레그래프가 ‘코빈의 철도 우편 재국유화 정책이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트라이던트 미사일과 잠수함 폐기 정책도 의외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며 코빈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긴축재정 반대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기도 보기보다 높다’는 논평도 했다. 실제 코빈을 지지하는 노인들은 언론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기술자격증을 가지면 충분한 월급을 주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고 집도 연봉 3~4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면 4만파운드 이상의 빚을 지고 사회로 나올 뿐 아니라 직장도 얻기 힘들고 집값은 연봉의 십수배 이상 간다. 연봉만큼의 주택 융자를 받아도 집을 사기 힘들다. 그렇다고 공공주택 임대도 가능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공주택은 차례가 돌아오지도 않고 돌아온다 해도 임대료도 높다. 결혼하면 어딘가에서 개인 월세로라도 집을 얻어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월세가 워낙 높아 장래를 위한 저축도 못한다. 그렇게 인생을 출발한들 무슨 희망이 있는가. 우리 때는 정말 살기 좋았다. 뿐만 아니라 공공요금도 월급 인상 정도로만 올랐는데 지금 민영화된 공공요금은 연봉 인상이나 인플레의 몇 배가 오른다. 철도 요금은 너무 올라 여행하기가 겁이 나는 정도인데도 정부 보조는 세 배가 늘었다. 그러면서도 맨날 고장이고 취소다. 코빈이 우리를 1970년대로 끌고 간다고 하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된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영국 좌파학자 30여명은 최근 코빈의 극좌파 정책에 대해 공동성명을 통해 변호했다. 그들의 지지 표명이 코빈에게는 상당한 힘이 된 듯하다. 그들의 주장은 철도 재국유화가 반드시 시대착오적인 정책이 아니라 상당한 현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현재 철도가 민영화돼 고액의 요금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비스가 엉망이고 요금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 누구도 철도 민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보수당의 최저임금 인상과 맞물려 코빈이 주장하는 필수공공부문노동자(교사·간호사·긴급구조요원 등)의 봉급 인상 정책도 긴축으로 위축된 소비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골수 보수당 지지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겠지만 현실적 불편을 겪고 있는 거의 30%에 해당하는 영국 부동표 유권자들의 표심은 코빈의 정책에 움직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영국에서는 최근 들어 기간산업 재국유화 얘기가 부쩍 많이 나온다. 민영화된 기간산업 운영회사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지자 심지어 보수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될 바에는 다시 국유화를 해서 전문가들에게 경영을 맡기자”는 말도 나온다. 국유기업이 거덜이 난 것은 경영 부재와 함께 강성노조 문제 때문이었는데, 만일 지금처럼 노조 문제가 없다면 재국유화를 고려해 볼 때도 되었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지금처럼 이자율이 역사적으로 낮을 때는 정부에서 채권을 대규모로 발행해 공공투자에 투입하면 현실적으로도 좋고 장기적인 투자 효과도 볼 수 있다는 논리다.

세상의 시계추는 항상 좌우로 움직인다. 우로 갔던 시계추가 좌로 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정치에서 5년은 정말 긴 시간이다. 보수당의 앙칼진 꾸짖음과 현실의 어려움에 지친 중산층 유권자들이 좌로 돌아서는 사태가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영화 ‘카사블랑카’나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하고 존 레넌의 ‘이매진’을 즐겨 듣는 코빈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1970년대 정책을 들고나오는 것이 역사적인 혹은 운명적인 일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그는 영화화도 됐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인 스페인 내전에서 만난 낭만적 지식인 평화주의자들의 자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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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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