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들은 그 ‘시대’를 잊고 다만 그 ‘결과’만을 바라보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다.”
- 이승연(‘전통과 현대’ 12권 164쪽)

처음 주간조선으로부터 광복 70년을 맞아 해방정국에 대한 글을 연재해 보고 싶지 않으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그 글을 쓰는 동안에 겪어야 할 고생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5년 전에 동아일보의 김학준(金學俊) 사장이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내가 강의하고 있는 ‘잘못 배운 한국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을 때 나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했지만 끝내 연재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연구실이 점거당하고, 시위대가 대학의 총장실을 찾아가 나의 파면을 요구하고, 변절한 33인의 이야기를 했다가 어느 유족으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고, 밤중에 욕설 전화를 퍼붓는 일을 허다하게 겪은 뒤로 나는 대중지에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일종의 무서움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학문인들 쉬울까만 역사 연구가 본디 어려워 때로는 검투사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물사(傳記學) 연구는 더욱 어렵다. 한국의 인물사 연구에는 세 가지 암초가 있는데 첫째는 문중사학이고, 둘째는 지방색이고, 셋째는 종교적 배타성이다. 문중의 문제는 목숨을 걸고 나온다. 그 가운데에서도 인물사를 쓰는 사람들이 연구 대상자의 후손들로부터 당하는 사자명예훼손죄(형법 308조) 피소는 참으로 무섭다.

이 죄는 기본적으로 친고죄이지만 친족 또는 자손인 고소권자가 없는 경우라도 ‘이해관계 당사자’가 고소권을 갖는다. 이 죄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사자(死者)의 명예가 훼손되었을 경우에는 성립되며, 학술 서적에 게재된 글보다는 대중지에 게재된 책임이 더 크다. 이때 사자의 명예란 외부적 명예, 곧 사회적 평가를 의미하지만 유족의 명예도 포함된다. 따라서 법리(法理)로 보면 김유신(金庾信)이나 김춘추(金春秋)에 대한 글도 사자명예훼손죄에 적용된다. 이 죄를 범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공소시효는 3년이다. 신분에 약한 교수들에게는 참으로 겁나는 죄목이다.

인물사 연구의 어려움

당사자나 그 후손들이 살아 있는 현대사를 실명(實名)으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두 달을 고민하다가 끝내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하고, 지난 여섯 달 동안 13회를 쓰면서 보람도 있었으나 많이 힘들었다. 23회를 예정한 가운데 이제 그 중간점을 돌면서 나는 그동안 지면이 적어 다 하지 못한 말, 미흡했거나 틀린 점, 쓰고 나서야 알게 된 일들, 독자들이 지적해준 내용, 그리고 견해를 달리하는 독자들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을 해야겠기에 이 편을 번외(番外)로 쓰고자 한다.

독자 반응 가운데 가장 민감한 문제는 김구를 숭모하는 분들이 보여준 반응이었다. 해방전후사에 대한 나의 인식은 비교적 냉혹하며 나의 붓끝에서 칭송받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망국의 책임을 외면하는 한국사학사에 대한 한 맺힌 저항이 있으며,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 언제까지 ‘왜놈 탓’만 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비판은 남달리 신랄했다는 점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에서 몹시 섭섭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런데 논쟁을 악화시킨 것은 이승만과 김구의 숭모자들이 화목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마치 법통 논쟁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두 분의 애증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비난한다. 그런 점에서는 나도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를 ‘애증’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헤어져서는 안 될 헤어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해방정국을 이해하면서 좌우의 대립에 못지않게 좌익 내부의 갈등과 우익 내부의 갈등이 적과의 갈등보다 더 심각했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진영의 갈등을 더 주목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김구를 숭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이 김구를 죽였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고, 이에 질세라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가 장덕수와 여운형을 죽인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갈등과 마찰이 서로에게는 상처를 주며 누구에게인가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8회 ‘이승만과 김구의 애증(2): 단정론의 갈등’ 편에서 최능진의 죽음을 다룬 데 대하여 이승만을 비호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최능진이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저지하려고 출마했다가 서북청년회원들에게 등록 마지막 날 서류를 탈취당하여 등록하지 못하고 끝내 입후보가 좌절되었다고 기록했는데, 확인해 보니 그와는 사실이 조금 달랐다. 그날 최능진의 선거운동원들이 서류를 탈취당한 것은 사실이나 서둘러 다시 서류를 제출했더니 이번에는 추천인의 도장이 가짜라는 이유로 입후보 서류가 무효화됨으로써 결국 이승만이 무투표로 당선된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8월 27일의 도하 각 신문에 최능진이 사형당한 지 60년 만에 무죄 평결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는 점이다. 그는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인연도 없는 나도 가슴이 찡한데 유족들이야 오죽했을까? 맏아들 최필립 선생은 이를 보지도 못하고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지하에서라도 기쁘겠고, 생존해 있는 작은 아들 최만립 선생께도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얼마 전에 언론계 어른이신 전 조선일보 주필 신동호 선생님이 최만립 선생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셨지만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워 전화를 드리지도 못했다. 최능진의 해원(解寃) 한 모퉁이에나마 내가 서성거렸다는 것이 기쁘다.

김구를 숭모하는 독자들에게

이승만과의 갈등과 관련하여 나는 김구를 숭모하는 측에서 마음을 열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이념의 혼란 시대에 국경일이면 이 땅의 좌파가 효창공원이나 백범기념관에 가서 기념식을 올리는 현상을 놓고 김구를 숭모하는 사람들은 흡족히 여기며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김구는 어찌 보더라도 좌파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자칭 진보 세력이 그의 묘소를 찾아가 국경일 행사를 치르는 것은 김구를 위해서 결코 명예로운 것도 아니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 진실로 김구를 숭모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이념의 왜곡, 곧 애국이니 남북협상이니 하는 주제로 자신을 위장하는 자칭 진보라는 좌파들로부터 김구를 ‘구출’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김구는 김구답게 이 땅의 정통 보수민족주의자로 그대로 두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길이다. 김구를 테러리즘으로 표현한 데 대하여 격렬한 비난을 퍼부은 분들께서는 테러리즘에 대한 학술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진보라는 이름의 좌파들도 김구의 남북협상 정신을 계승하고 추모한다는 미명 아래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느니 차라리 양평의 여운형(呂運亨) 생가나 묘소, 또는 충남 예산 신양면의 박헌영(朴憲永) 생가에 가서 추모식이라도 올리는 것이 더 진솔한 표현이다. 애국가도 군국주의의 유산이어서 부를 수 없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좌파가, 태극기 걸어놓고 이봉창(李奉昌)이나 윤봉길(尹奉吉)과 기념 촬영을 한 김구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김구를 추모하는 독자들이 나에게 더욱 분노하고 저주에 가까운 댓글을 달았던 것은 아마도 “한국 현대사에서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김구가 친일파로부터 경교장을 받은 사실을 지적한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증류수에서는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항변한 분의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굳이 반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공산권이 무너지고 1989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하벨(Baclav Havel)이 우리 시대에 과거사 청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청과물가게 주인 정도였다”는 말(‘과거사 청산의 비교정치학’·앤드루 릭비·110~111쪽)이 한국인에게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 시대의 가진자들 가운데 한말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역사를 살아온 조상 3대 3족(친가·처가·외가)의 이력서와 호적·제적등본과 족보를 내놓고 “우리 집안은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집안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열 사람의 의인만 살아 있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던 여호와의 약속(‘구약성서’ 창세기 18장 32절)은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렇다면 당신이 그 시대에 태어났었더라면 어땠을 것 같으냐”고 나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 나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친일 이야기를 하면서 박정희(朴正熙)를 거론하는 의견이 있었다. 친일파가 정권을 잡아 나라가 이렇게 어려워졌다는 논리이다. 박정희는 육군 중위의 몸으로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 없었더라면 좋았을 일이니 허물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육군 중위가 친일을 했으면 얼마나 했을까. 그것은 식민지에 태어난 젊은이가 겪어야 할 아픔(karma)이었다. 나는 그를 두둔할 뜻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육군 중위가 친일파라면 그 숱한 한국인 육군 중위 가운데 왜 하필이면 박정희만 문제가 될까.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와 지주에게 세금과 소작료를 지불한 나와 귀하의 아버지도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친일의 죄상을 따지자면 중위보다 오장(伍長)이 더 악랄했다. 박정희가 훗날 대통령이 되지 않고 중위로 생애를 마쳤더라도 그의 행적은 친일의 멍에를 썼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광복 이후의 행적에 따라서 광복 이전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은 당사자나 그 자식에게 주홍글씨를 써넣는 작업의 성격이 짙다.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를 물으려면 유신 시절의 독재 요소를 논증하는 것이 옳지, 친일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과오를 빗나가게 겨냥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한국인에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왜 조선은 멸망했는가’라는 거대 담론이다. 한국인은 망국의 문제를 몇몇 친일파에게 책임 지움으로써 망국의 원인이라는 좀 더 본질적인 담론을 희석시켰다. 내가 관계하는 한 애국단체에서는 모임만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박정희가 쓴 파고다공원의 ‘삼일문’ 현판을 때려 부순 무용담(?)을 회순(會順)에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주 지겨웠다. 그 뒤로 나는 그 모임에 가지 않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다시 그 모임에 나갔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만델라(Nelson Mandela)는 영국에 대한 부역자를 처벌하면서 일몰법(Sunset Law)을 적용했다.(릭비·145쪽) 일몰법이란 부역의 문제를 마냥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야간경기가 불가능했던 시절에 ‘날이 지면 경기도 끝나듯이’ 부역 문제도 종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60년 3월 1일부터 1994년 5월 10일 곧 만델라의 취임 이전까지의 죄상만을 따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정했다. 나는 형법학자는 아니지만 “친일파에게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에 법률적 하자가 없는지를 가끔 생각해 본다. 이는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나치 치하나 붕괴 이전 공산 치하와 남미에서 저지른 반인륜 범죄의 추적과는 다소 다른 성격의 것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한때 수행했다는 내 고향 괴산 군자산(君子山)에는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원효가 상좌중과 길을 걷다가 중도에 개울을 만났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물이 불어 건너기가 어려웠다. 옷을 입고 건너자니 물이 깊어 옷이 젖을 지경이었고 옷을 벗고 건너자니 그리 깊지는 않았다. 그런데 원효는 서슴없이 옷을 벗더니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고 물을 건너려 했다. 마침 그때 옆에는 젊은 여인이 난감하게 서 있었다. 원효는 주저 없이 그 아낙을 업고 물을 건넜다. 내를 건너 저편에 이른 원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입고 길을 걸었다. 이때 따라오던 상좌중이 원효에게 말씀을 드렸다.

“스님, 이제 저는 스님의 곁을 떠나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출가한 스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젊은 여인을 업고 내를 건넜으니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효가 상좌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망국의 죄인들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내려놓고 가자. 이제는 우리도 우익이나 좌익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 대하여 정직하고 자유롭게 고백하고 사죄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을까.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필자가 독자의 눈치를 보며 글을 쓸 수는 없지만 그 반응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남이야 듣거나 말거나 내 주장만 하는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지일 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박헌영에 대한 글의 열독률(閱讀率)이 가장 높았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박헌영 편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장 뛰어난 글도 아니었다. 지적(知的)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제까지 금기시된 주제에 대한 ‘훔쳐보기’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박헌영 편(9회)에서 조선정판사 사건에 관한 외국어대학교 임성욱 박사의 학위논문을 인용하면서 이는 아무래도 우익의 조작이었다는 뜻으로 글을 쓴 것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임성욱 박사의 말이 맞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한 사회를 그토록 혼란에 빠트렸다는 위폐 사건에 증거로 제시된 위폐가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미심하다. 그런데 그 난마와 같은 해방정국에서 우익이 저지른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그런 죄상을 거론한 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이석기 같은 ×”이라는 주장에는 좀 더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폭로한 모든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구사건에 관한 글(11회)이 발표되었을 때 카페 마르코(Marco) 글방(2015년 8월 20일)을 통해 학계 원로이신 이인호(李仁浩) 교수님께서 고언을 보내 주셨다. 그분의 지적은 북한에 있던 소련군사고문단이 대구사건을 각별히 지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옳으신 지적이니 내가 변명할 것은 없지만 나도 대구사건을 설명하면서 남로당의 틈새전략을 분명히 지적했는데 보는 분들에게는 악센트가 약하게 느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는 각기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대구사건에 박헌영이나 남로당 또는 북한 세력이 호기로 여기고 개입한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전체 동력으로 볼 때 민란의 요소가 독립변수였고, 좌익의 공작은 사건의 종속변수였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나는 대구사건을 온통 우익적 반공 시각으로 몰아가려는 이 시대 보수주의 시각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대구사건을 이데올로기의 시각으로 몰아간다면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고통 받았거나 죽어간 민초들의 원혼을 풀어 줄 길이 없다. 해방정국에 관한 나의 글은 소작농으로서 그 무렵에 영문도 모르고 겪은 고문으로 평생을 지병 속에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육신을 주물러 드려야 했던 소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민초들에 대한 연민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입장이 우익이나 보수주의사관으로부터 쉽게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인호 교수님의 지적에 거듭 감사드리고 원고를 보완하는 데 참고하겠다.

김일성 가짜 논쟁

김일성 편(11회)의 글이 나간 다음 나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소감에는 “아슬아슬하다”는 글이 많은데 드디어 사고가 났다. 곧 “김일성은 가짜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구절이 필화(筆禍)가 됐다. 정확히 말해서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니었는데 일부 항간에서 오고 가던 이야기와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확인하지 않고 쓴 것이 나의 실수였다. 유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대가 한때 억압 구조라는 오명을 썼던 중앙정보부의 요원이었다는 기록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망자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기사에 따르면, 이명영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주장의 발설자는 성공회대학교 한홍구(韓洪九) 교수로 알려져 있다.(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gkaqor&folder=1&list_id=5450847·검색일 2015년 8월 8일)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한홍구 교수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 2편’(한겨레신문사·143쪽)에서 “김일성의 가짜설을 주장한 이명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에서 기획관으로 근무했는데 그때 공보실장이 이후락(李厚洛)이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명영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후락이라면 중앙정보부를 연상하던 시절이어서 한홍구 교수의 글이 마치 “이명영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말로 확대되어 와전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사건은 내가 사려 깊지 못해서 벌어진 실수이니 남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내가 사과와 정정 기사를 싣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졌지만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

백남운과 이극로

13회 ‘남북협상(2):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편을 쓰면서 당초에 나는 백남운(白南運·1894~1979)과 이극로(李克魯·1893~1978)를 쓰고 싶었으나 지면 관계로 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언제인가 단행본으로 나올 계제가 되면 그때나 싣고 싶다. 전북 고창 출신인 백남운이 북한에 남았다는 것은 남한의 학계로서 큰 손실이었다. 고창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조선 제일의 명문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백남운의 부친 백락규(白樂奎)는 일본의 국권침략에 분개하여 자결한 주자학의 거유(巨儒) 송병선(宋秉璿)의 제자였다. 그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白寬洙·1889~1961)보다는 다섯 살 아래의 족손이었고 처가는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이었으니 가히 명문가의 자제다. 백남운의 연구자인 고(故) 방기중 교수의 증언(‘한국현대사상사연구’ 62쪽)에 따르면, 백남운은 1925년에 새문안교회의 세례교인으로 등록했는데 이는 미션스쿨인 연희전문학교 교수의 취업을 위한 것이었지 진심으로 기독교를 신봉한 것 같지는 않다. 당대의 선비들은 백남운을 만날 때 양수거지(兩手交之·두 손을 마주 잡고 서서 말씀을 드림)했다고 한다. 그는 1940년에 연희대학 교수 시절에 연전(延專)적색교수그룹 사건으로 징역 2년(집행유예 4년형)을 받았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는 이념의 정오(正誤)를 떠나서 노작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문화인류학과 어원학(語源學)에 기초를 두고 실증주의 방법으로 접근한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은 최초의 과학적 접근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일제 강점 아래에서 한국의 원시·고대·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다. 다만 그것이 삼국시대로 끝나고 그 후속 작업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봉건사회경제사’(1937)가 고려시대에서 끝난 것이 아쉽다. 정치학에서 흔히 하는 말로 “마르크스(K. Marx)의 ‘자본론’이 없었더라면 자본주의는 이미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의 경고와 지적이 자본주의의 자기 수정을 도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존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백남운이 남한에 남아 한국경제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지적 풍토가 가능했었더라면 신생국가인 한국 자본주의의의 자기 수정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남운이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강의하기에는 남한의 우익적 분위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백남운은 해방정국에서 좌익이라는 이유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같은 연희전문 교수로서 가까웠던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과 한민당 총무 백관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남한에서 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백완기 교수(고려대·학술원회원)의 증언에 따르면, 백남운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월북할 무렵 그는 여비서 한 명만 데리고 갔다. 아내는 고향에 남아 핍박 속에 한국전쟁 무렵에 예비검속에 걸려 살해되었으며, 아들과 딸은 전쟁 전에 아버지를 찾아 월북했는데, 아들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했다. 백남운은 북한으로 넘어간 뒤 북한 정권 수립과 함께 교육상에 취임하여 역사 연구에 참여했고, 정치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의장(1967~1972)에까지 올랐으나 일제강점기에 보여주었던 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기지는 못한 채 1979년에 사망하였다.

이극로는 경남 의령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 시동(詩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12년 서간도로 망명하였는데, 그 무렵에 상하이에서 김두봉(金枓奉)을 만났다. 1921년 모스코바를 방문하였을 때 레닌그라드에서 트로츠키(Leon Trotsky)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극로의 회고록 ‘고투 40년’(1947) 어디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찬양이나 감동이 추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기이하다. 마르크시즘의 고향 영국과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 마르크시즘을 입도 뻥긋하지 않다가 북한으로 넘어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극로의 연구자인 조준희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민영환(閔泳煥), 이순탁(연희전문 경제학교수)에 이어 세 번째로 세계를 일주한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1927년에 베를린대학에서 ‘중국의 생사(生絲) 공업’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것이 한글학자로의 길을 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는 베를린대학의 조선어과에서 강의했다. 이 무렵에 그는 영국 런던대학에 잠시 유학(1927)하면서 아일랜드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극로는 1929년에 귀국하여 조선어학회사전편찬위원장, 1930년에 조선어학회장에 취임하여 한글 보급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2년에 6년형을 받았으나 광복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 선전국장의 자격으로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돌아오지 않고 평양에 남아 1962년에 최고인민회의 3기 대의원과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의장, 1970년에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다음 1978년에 86세로 천수를 마쳤다.

홍명희나 백남운이나 이극로를 포함하여 북한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남한보다는 북한에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북한 사회가 덜 부패했고, 덜 혼란스러우며, 친일 청산의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백남운은 남한의 현실이 “일제강점기만도 못하다”(‘백남운 전집 4’·휘보·335쪽)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서울신문 1946년 11월 26일) 그들이 북한의 정치적 선전에 대한 불쾌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에 대하여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김규식(金奎植)의 경우에 더욱 그러했다. 이극로가 북한에 남은 것은 아마도 스승 김두봉이 함께 한글을 연구하자는 제의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의 이야기

글을 쓰면서 학술 서적이 아니고 대중적 독자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전거(典據)를 자세하지 적지 못한 것에 대하여 원저자와 독자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소설적 분위기로 쓰려다 보니 건조한 학술 문체가 못된 것에 대해서도 독자들의 양해를 빈다. 정확한 출처와 논증이 궁금한 독자들은 나의 부족한 글 ‘한국분단사연구’(2001)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남은 글에서는 제주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에서의 김일성(金日成)과 맥아더(D. MacArthur)와 마오쩌둥(毛澤東), 휴전, NLL, 그리고 통일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면찬(面讚)이 아니라 이런 ‘금기가 된 글들’을 연재하게 해준 주간조선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한국 보수 언론의 대표지인 조선일보사의 계열사가 발행하는 잡지가 좌파들로부터 ‘보수 꼴통’의 오명을 들으면서도 박헌영이나 김일성이나 홍명희의 모습을 가감 없이 실어준 것을 보며 나는 고맙기도 하고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편집진도 의견을 달리하는 독자들로부터 많이 보대꼈을 것이다. 언제인가 자칭 진보라는 내 자식들로부터 지금 아빠의 글에 어떤 댓글이 올라 있나 읽어보라는 말을 듣고 인터넷을 열었다가 기겁을 해서 닫았다. 신문사에서 어느 정도 걸러냈다는 글임에도 저주와 욕설로 가득한 글을 읽으며 인터넷 댓글은 읽을 것이 못된다고 여겨 다시는 보지 않았다. 문득 연예인 최진실을 생각했다.

이제까지의 논리를 정리하자면, 해방정국사를 설명하면서 현대사 연구자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과장했다. 그 시대의 소수 지식인들을 제외한다면 마르크스나 아담 스미스(Adam Smith)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한국현대사의 이데올로그(ideologue)들은 생계형 ‘꾼’들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의 이데올로기는 속지주의(屬地主義)의 결과일 뿐이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이념을 결정했다. 하물며 민초들에게 이념이란 비료 한 포대만 한 가치도 없었다. 내가 한국현대사의 이념 논쟁을 공부한 끝에 얻은 결론에 따르면, 좌우익의 이념은 그리 정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념은 끝내 혈육을 넘지 못했고, 혈육은 돈의 유혹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진행형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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