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인선
ⓒphoto 이인선

어릴 때부터 소녀 이인선은 “너는 독립운동가의 손녀야”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이는 독립운동가 이준석의 손녀 이인선에게 축복이자 족쇄였다. 소녀 이인선의 조부인 독립운동가 이준석 선생은 3·1운동 당시 포항 지역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고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로 인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도 일본 순사들은 이준석 선생을 끊임없이 감시했고 그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까지 찾아왔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는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이준석 선생의 독립운동은 뒤늦게 인정이 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포항의 생가 옆에는 3·1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만주 등지에서 유랑생활을 하느라 초등학교마저 끝내지 못한 무학이었지만 독립운동가의 아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식 교육에는 열심이었고 성공했다. 슬하에 3남3녀, 6남매를 두었다. 딸 2명은 약사, 아들과 딸 2명은 교수, 아들 1명은 한의사로 병원장, 아들 1명은 사업가다. 이들 중 다섯째가 바로 지난 10월 3일 퇴임한 이인선(56) 전 경북도 경제부지사다.

이인선 전 부지사는 2011년 11월 경북도 정무부지사로 취임해 4년을 정무부지사·경제부지사로 재임했다. 전국 최초의 여성 부지사, 경북도의 최장수 정무·경제부지사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이문동의 외가다.

“일제의 핍박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주를 유랑한 탓에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함께 살 처지가 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광복이 된 후 귀국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정착하자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죠.”

대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와 경북여고에 진학했다. 그의 형제들은 넉넉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같이 공부를 잘했다.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가족 장학금 품앗이’를 한 덕분에 형제들 모두가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는 “언니와 오빠가 다 이공계를 졸업했으니까 너도 이공계를 지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권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꿍심’이 있었다. 식품영양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학한 학교가 영남대 식품영양학과였다. 그때만 해도 신세계이자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던 유전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영남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전도유망한 학자로 태어났다.

잠시 경북대 의대 면역학교실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때 그는 누구보다 논문을 많이 썼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92년 계명대 교수로 채용됐다. 1996년 일본 도쿄에 있는 국립의약품식품연구소(NIHS)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당시 ‘햄스터에 췌장암을 일으킨 뒤 브로콜리와 같은 식물로 암을 억제하는 연구’로 ‘젊은 과학자상’을 수상했다. 계명대로 돌아오자마자 전국 150여개의 지역협력센터 중 하나인 ‘전통미생물자원연구센터’ 센터장을 맡았다. 그의 나이 불과 42세. 여성으로서는 유일했다.

사람 보는 눈은 비슷한가 보다. 그의 활동을 지켜본 대구시는 2004년 학교로 돌아가려던 그에게 ‘대구신기술사업단’의 단장을 맡겼다. 대구시의 ‘밀라노 프로젝트’ 후속사업으로 IT·BT·NT·한방을 아우르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업의 책임자 자리였다. 그때 습득한 것이 ‘설득의 기술’이다.

“사업 예산을 따내려면 돈을 주는 측에 돈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야 하는 법입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잘 설득하느냐를 연구했죠.”

‘국책사업 유치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이후의 여정은 숨가쁠 정도다. 신기술사업단 단장 일이 끝나기 무섭게 대구시와 경북도는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2대 원장으로 초빙했다. DGIST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현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에 자리한 DGIST의 전체 마스터플랜을 완성했다.

“DGIST 원장으로 갈 당시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DGIST에는 연구 기능만 있었는데 학교라는 울타리를 쳐주면 훨씬 기능이 좋아진다고 보았습니다. KAIST나 GIST(광주과학기술원)에는 석·박사 과정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꾀를 낸 것이 DGIST에 석·박사 과정은 물론 학부 과정까지 넣은 것. DGIST의 기구는 특별법으로 정해야 하기 때문에 국회 통과를 시도했으나 2008년 국회 임기가 만료돼 자동적으로 법안은 폐기됐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법사위 소속이었던 국회의원들의 사무실을 일일이 방문했다.

물러설 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그의 전략은 결국 법안 통과로 마무리됐다. DGIST는 2008년 기공식과 함께 2010년 현재의 달성군 현풍면 신청사로 이전했다.

행복한 결실을 본 그는 2011년 2월 DGIST 원장을 마치고 3월부터 학교로 돌아왔다. 짧은 기간이지만 7개월 동안 대외협력 부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캠퍼스 울타리 안에 머물도록 놔두지 않았다.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그를 다시 여성 최초로 경북도 정무부지사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한 것. 신일희 계명대 총장에게 “1년만 이 부총장을 보내 달라”고 했다. 신 총장과 본인은 “못 간다”고 했고 망설였다. ‘교육자가 행정기관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결국 김 지사의 간청에 신 총장이 수락한 것이 어느덧 4년이 후딱 지나버렸다. 그는 재직 중 ‘국책사업 유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유는 그를 만나 1분만 대화를 해보면 느낄 수 있다.

“국회의원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미리 나타나 국회에 등원하러 가는 동안 1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국회의원의 보좌관과 비서관 등 직원은 물론 전문위원들과도 친밀하게 지내야 해요. 그러기 위해 커피나 빵, 쿠키 등을 가져가서 함께 먹으면서 배경 설명을 충분히 합니다.”

‘아줌마 리더십’으로 예산 따내기는 확률 100%에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이러다 보니 그의 봉급은 빵 사고 커피 사는 데 모두 들어갔고 집에 가져가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재임 4년 동안 그는 19조원대의 엄청난 기업 투자를 이끌어 냈다. 특히 과학 분야에서의 역량은 두드러졌다. 3세대 방사광가속기 성능 향상,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 양성자가속기 연구센터 출범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들을 잇따라 성공시켰다. 그밖에 종가 음식과 고택을 창조경제와 접목해 경북의 전통문화를 다양한 디지털콘텐츠로 생산한 일,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가족친화적인 도청 조직을 만들고 여성 공무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앞장서 온 일 등은 여성이기에 가능했다는 평을 받았다.

최근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되돌아본 책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불꽃’을 도서출판 황금물고기에서 펴내고 인생의 한 막을 내리는 소감을 술회했다.

교수→국책연구사업단장→DGIST 원장→부총장→부지사로의 변신을 끝낸 이 전 부지사는 “정말 후회 없이 일했다”며 “경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김관용 지사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리며 유능한 경북도청 직원들과 함께 땀 흘리며 수없는 밤을 지새워 일했던 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보람으로 영원히 추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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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수 조선일보 대구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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