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우상호 의원 photo 조선일보 이명원 기자 / 이성헌 전 의원 photo 조선일보 전기병 기자 / 신경민 의원 photo 조선일보 이태경 기자 / 권영세 전 주중 대사 photo 조선일보 조인원 기자
(왼쪽부터) 우상호 의원 photo 조선일보 이명원 기자 / 이성헌 전 의원 photo 조선일보 전기병 기자 / 신경민 의원 photo 조선일보 이태경 기자 / 권영세 전 주중 대사 photo 조선일보 조인원 기자

4·13 총선까지는 두 달 남짓 남았다. 선거구 획정 문제가 난항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선거의 윤곽이 그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선거의 예상 대진표를 보다 보면 ‘리턴매치’를 벌이는 예상 출마자들을 볼 수 있다. 많게는 다섯 번째, 16년에 이어진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강원·충청·전라 할 것 없이 리턴매치는 전국 곳곳에서 이뤄진다. 그중 서울 지역에서 흥미로운 대결 셋을 소개한다.

서울 서대문갑… 연세대 81학번 동기의 다섯 번째 대결

둘 다 연세대 81학번이다. 둘 다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한 사람은 YS를 통해, 한 사람은 DJ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지금까지 네 번 맞대결을 치렀다. 2 대 2, 무승부다. 서대문갑에 또 출마할 이성헌 전 새누리당 의원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얘기다.

시작은 2000년 치러진 16대 총선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던 이성헌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우상호 후보에게 47.01% 대 45.16%, 1364표차 신승을 거뒀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두 사람은 개표 과정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자정을 넘어서야 승부가 판가름났다고 한다.

4년 뒤 열린 17대 총선에서도 두 사람은 맞붙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이던 우상호 후보는 야인 신분으로 2년여간 유학을 다녀온 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이성헌 후보가 탄핵 정국의 역풍을 맞으며 판세는 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우 후보는 ‘낡은 정치 대 새로운 정치’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두 번째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선거전은 얼마나 치열했던지 이 후보 가족의 재산을 두고 네거티브 공세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과는 우상호 후보의 2.29%, 1899표차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세 번째 대결에 이르자 모든 언론이 두 사람의 대결을 두고 ‘격전’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마침 2007년 12월에 치러졌던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에 열린 선거라 판세는 이성헌 후보에게 유리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믿는 참모’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이 후보의 기세가 올랐다. 우상호 당시 통합민주당 후보는 오랜 당 대변인 경험으로 인지도는 높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전과 달리 표차가 많이 나 5278표차로 이성헌 후보의 승리였다.

네 번째 대결은 우상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의 승리였다. 정권심판론을 앞세워 젊은 유권자들을 공략한 덕분이었다. 당시 선거판을 주도했던 ‘이명박 정권 심판론’으로 이성헌 새누리당 후보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젊은층을 노리고 반값 등록금 등 교육정책을 들고나온 우 후보가 54.4% 대 45.63%, 6499표차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2016년, 다섯 번째 대결을 앞두고는 ‘결승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제는 지역 주민들도 두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서대문을은 대학가와 상권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재개발공사 중인 북아현동을 중심으로 개발에 대한 찬반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젊은 유권자들이 우상호 의원에게 우호적이라면, 재개발을 앞둔 주민들은 이성헌씨에 우호적인 셈이다.

이성헌씨는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은 19대 현역 의원에 대한 심판,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에 대한 심판론이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를 통해 ‘초심 되찾기 운동’을 펼칠 것이라며 자신의 총선 전략 역시 “청년 일자리를 만들고, 정치권에서 사라진 초심을 되찾으며, 정치권 전체의 혁신 운동을 전개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우상호 의원은 “서대문구 내 공약 이행률이 90%에 달할 것”이라면서 지난 의정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지역구 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은 물론 야당에 대한 비판 여론도 크다”며 “정치 개혁에 대한 희망을 높이는 쪽으로 젊은층에 접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좌) 유인태 의원 photo 조선일보 조인원 기자. (우) 김선동 전 의원
(좌) 유인태 의원 photo 조선일보 조인원 기자. (우) 김선동 전 의원

親朴의 설욕전… 영등포乙의 재대결

서울 지역구만 두고 보더라도 이번 총선에서 리턴매치가 이뤄질 곳은 절반이 넘는다. 전국적으로 보면 강원 홍천횡성에서 황영철 새누리당 의원과 조일현씨가 다섯 번째 대결을 펼치고, 경기 일산서구에서는 김현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영선씨가 세 번째 여성 맞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단 두 번째 만남에도 화제를 모으는 지역구가 있다. 서울 영등포을이다. 이 지역에서만 3선을 지내고 중국대사까지 역임한 권영세 전 주중 대사와 뉴스 앵커 출신으로 19대 총선에서 권씨를 꺾고 당선된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신경민 의원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화제를 뿌리던 인물이었다. MBC 간판 뉴스 프로그램 ‘뉴스데스크’의 앵커를 맡으며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2008년에는 강제 하차 논란이 불거지며 MBC 사측은 물론 정권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권영세씨는 2002년 8월 16대 국회 보궐선거에서 영등포을에 당선된 이후 내리 3선을 했다. 2004년 탄핵 정국으로 당시 한나라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매우 강하던 시절에도 권씨는 무난히 당선됐을 정도였다. 특히 권씨는 친박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권영세씨를 사무총장과 공직후보자추천위원에 앉힐 정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던 2012년 대선에서도 새누리당 종합상황실장을 맡았다.

영등포을 지역은 서울 어느 곳보다 지역구 내 분위기가 다양한 곳이다. 여의도와 신길동, 대림동이 이 지역구에 속한다. 여의도는 확실히 중산층이 많이 사는 곳이다. 재개발을 앞둔 대단지 아파트가 많아 보수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 반면 건너편 신길동에는 서민들이 많다. 아파트는 적고 다세대주택이 많은 동네다. 대림동은 또 다르다. 중국 동포가 많이 사는 곳이라 다문화 정서가 짙은 곳이다. 여의도가 새누리당 정서가 워낙 강한 곳이라면, 신길동과 대림동은 야당세가 다소 우세한 곳이다.

그래서 영등포을 지역에서는 정치 신인이 당선돼 화제를 일으킨 일이 잦았다. 1996년 15대 총선 때 당시 최불암 신한국당 의원을 꺾었던 인물은 겨우 32살이었던 정치 신인 김민석씨였다. 김씨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기 위해 사직한 2002년, 보궐선거로 당선된 인물이 바로 권영세씨였다. 당시 권씨는 검사 출신의 정치 신인이었다.

권영세씨에게 세 번의 배지를 달아줬던 지역 분위기는 2012년 때는 좀 달랐다. 당시 권영세 새누리당 후보와 신경민 민주통합당 후보는 내내 팽팽하게 대립했다. 판세가 흔들리자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공식 선거운동 첫날 영등포을을 찾기도 했다. “3선을 하면서 지역에 해준 것이 없다”는 권 후보에 대한 비판과 “결국 전략공천으로 온 낙하산 아니냐”는 신 후보에 대한 비판이 맞섰다. 결국 주민들은 신경민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52.6% 대 47.4%, 4508표차였다.

20대 총선에서는 지금까지 권영세씨가 다소 앞서는 모양새다. 1월 4일 ‘중앙일보’가 ‘엠브레인’과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권영세씨가 5.7% 정도 신 의원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권씨는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선거에서는 지역 주민과의 교감을 얼마나 이뤘는지가 중요하다”면서 2년간의 주중 대사 일이 끝나자마자 지역구에 매진해 왔음을 강조했다. 신경민 의원은 “지역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지적도 귀담아듣고 있다”면서 “활발하게 해온 의정활동을 알리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친박 vs 친노… 도봉을의 세 번째 대결

18대 의원을 지낸 김선동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대표를 지낼 당시 비서실 부실장을 지낸 친박이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도 정무비서관을 지낸 바 있다. 유인태 의원은 손꼽히는 친노 중 한 명이다. 운동권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3대 때부터 총선에 출마해 14대 총선 당시 도봉구 갑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3선 의원이다.

도봉구 지역에 수십 년간 뿌리를 뻗어 온 두 사람의 첫 대결은 2008년 제18대 총선이다. 당시 현역의원이던 유인태 통합민주당 후보는 금배지에 처음 도전하는 김선동 한나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4451표차로 패배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 승리에 힘입어 김 후보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당시 민주통합당 지지율을 앞서던 상황이었다. 당시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김선동 후보는 “20여년 동안 이 지역이 한나라당 성향이 아니어서 발전이 지체됐던 것”이라며 지역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특히 정치 신인에 가깝던 김 후보는 “거물에 도전하는 신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는 두 사람의 희비가 엇갈렸다. 당시 지역에서 첨예한 현안은 삼성의료원을 도봉구에 유치하느냐의 문제였다. 두 사람 모두 의료원 유치를 18대 총선의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실패했다. 현역이었던 김선동 새누리당 후보에게 불리했다. 유인태 민주통합당 후보는 “18대 때 내건 공약을 다 지켰다”며 공세에 나섰다. 2010년 지방선거,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거치며 반(反)여당으로 돌아선 민심도 유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 후보는 ‘박근혜 vs 노무현’ 대결 구도 대신 ‘지역 일꾼론’을 내세웠다. 성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지역을 위해 수십 년간 일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선동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유세 현장에서 박 대통령은 김 후보를 두고 “같이 일을 해보니 맡은 일을 끝까지 하는 젊고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51.06% 대 47.2%, 유인태 후보의 승리였다.

세 번째 맞대결에서도 친박 대 친노 대결 프레임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김선동씨는 지난 1월 7일 서울 도봉을 지역구에서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열며 신호탄을 쏘았다. 김씨는 개소식에서 지역 내 개발 이슈를 강조하기도 했다.

키워드

#정치
김효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