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3일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 정운천 당선자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와 사진을 찍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지난 4월 13일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 정운천 당선자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와 사진을 찍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개표 종반 더민주 후보의 추격은 맹렬했다. 지난 4월 13일 자정 무렵 3000표를 앞서면서 당선 세리머니까지 마친 그에게는 악몽이었다. 새벽 4시 재검표 결과 간발의 111표차였다. 20대 총선에서 전주을의 정운천(62) 당선자는 새누리당 후보로 세 번째 도전 끝에 지역주의 장벽을 뛰어넘는 작은 기적을 이뤄냈다. 전북의 선거에서 보수 여당 후보의 당선은 강현욱 당선자(군산)를 낸 뒤 20년 만이고, 전주에서는 임방현 당선자를 낸 뒤 32년 만이었다.

총선 사흘 뒤인 4월 16일 오전 7시30분, 정 당선자의 집 근처 콩나물국밥집 구석 자리에서 벽을 향해 앉은 그를 만났다. 정 당선자는 “지역 장벽을 허무는 일만으로도 제 뜻의 절반을 이뤘다”며 “낙후된 전북의 설움을 풀어달라는 시민 명령을 수행하는 데 온몸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 무엇이 당선을 가져왔나. “자갈밭에서의 고군분투였다. 지역 장벽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전북을 외롭게 만들었다. ‘낙후된 전북으로 더는 갈 수 없다, 열 개 의석 중 하나라도 바꿔 보자’는 시민 열망이 모여 이뤄낸 선거혁명이었다. 야권이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나뉜 구도 속에 유권자의 37.53%가 저를 지지해 주셨다.”

그는 2010년 전북지사 후보로 나설 때부터 자신의 이름 석 자 앞에 트레이드마크로 ‘쌍발통’을 붙였고, 유세 때마다 ‘꼬끼오’를 외쳤다. ‘야당의 외발통’만으론 지역이 발전할 수 없다, 지역 장벽에 갇힌 전북에 새벽을 깨우는 장닭이 되겠다는 호소였다.

- 혼자 일을 얼마나 해낼 수 있나. “제가 당선되면서 야당만이 아니라 집권 여당까지 전북을 적극 도울 수 있게 됐다. 야당 독주가 종식되고 실종된 정당정치가 복원되는 것이다. 혼자지만 야당 의원 9명 몫을 할 수 있다. 전북은 지난해 예산 증가율이 0.7%로 전국 17개 시도 중 꼴찌였다. 인구도 15년 사이 201만명에서 187만명으로 줄었다. 집권당 통로로서 지역을 위해 정부 여당의 힘을 수월하게 빌려올 수 있게 됐다. 전주 시민의 자존심과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총선 유세에서 그는 2011년 LH 본사 전주 유치에 실패하면서 1주일간 단식을 했던 함거(檻車·죄수를 태우는 수레)를 다시 끌고 나왔다. LH 본사 유치는 그가 낙선했던 도지사 선거의 공약이었다. 그는 유세 차량 앞 운동원들에게 슈퍼맨 복장을 입혀 “야당의원 열 몫을 하겠다”고 부르짖기도 했다. 유세장엔 회사를 휴직한 아들(28)과 대학을 휴학한 딸(24)까지 나와 무릎을 꿇었다. 부인(56)은 그가 도지사 선거에 나서면서 교사를 그만두고 전주의 80㎡(24평)짜리 아파트에 함께 살며 그를 도왔다.

-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지역 민심은 ‘새누리당은 무조건 싫다’였다. 전북의 222개 선출직 가운데 새누리당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설움 속에서 자신이 당원임을 밝히지 못해온 게 전북의 새누리당원이다. 손발 없이 맨몸뚱이로 부딪쳐야 했다. 시민들의 싸늘한 눈길 속에서도 ‘민생 119전북본부장’이란 명함으로 민원 현장 120곳을 뛰었다. 팥죽집, 순대국밥집 그리고 밤엔 맥주집에서 시민들을 만났다.”

지역구 동네 행사들에서 그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전직 농식품부 장관이었고 집권당의 전북도당 위원장이기도 했지만 그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시의원들의 축사가 이어져도 그에겐 발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외면당하는 그에게 가까운 지인들마저 “새누리당으론 안 되니 무소속으로 나서라”고 권유했다.

-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나. “당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해 다가가서 감성에 호소했다. 새벽 산책길에서부터 밤 배드민턴 운동 모임까지 만나는 시민마다 악수를 청하며 말을 붙였다. 셀카로 함께 사진 찍은 분만 2만5000명이다. 두 번째로 치른 15대 총선에서 35.8%를 득표하고도 낙선해 가족과 함께 울면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20여년 농부로 살며 다져온 게 뚝심과 끈기다. 농부가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거다.”

그는 초등 5학년 교과서에 ‘참다래(키위) 아저씨’로 실린 ‘신지식농업인’이었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남성고와 고려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전남 해남의 비닐하우스에 방을 들여 5년5개월간 기거하며 참다래 농업을 일으켰다. 정부가 1989년 4월 농산물 수입 개방과 함께 도태시킬 대표 작목으로 바나나·파인애플·키위를 들었지만 그는 이듬해 한국 첫 농민주식회사로 ‘참다래유통사업단’을 세워 농업 생산을 유통까지 확대했다. 1×2×3차 산업, 이른바 6차 산업의 효시였다. 그의 성공 신화는 고구마로 이어졌다.

- 농사와 선거, 어느 게 더 어려웠나. “정치는 안 하면 그만이었지만 농사는 죽고살기로 해야 했다. 참다래 농사 4년 만인 1987년 농장을 완성, 첫 열매를 맺었는데 태풍 ‘셀마’가 비닐하우스를 모두 날려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여러 해 질시의 눈길까지 보내던 마을 사람들이 그 절망적인 모습에 구원의 손길을 주셨다. 수십 분의 도움으로 농장을 복구했다.”

정 당선자는 “어떤 일이든 처절하게 무너져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이치를 그때 터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첫 농식품부 장관으로 2008년 6월 ‘광우병 파동’ 당시 ‘매국노’란 지탄을 무릅쓰고 촛불시위 한복판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시위대는 서울 개포동 그의 아파트까지 수차례 몰려왔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장관직은 광우병 사태의 책임을 지고 157일 만에 사임했다.

- 참패 뒤에도 새누리당이 정신을 못 차린 것 아니냐. “새누리당은 일단 정지, 집권을 향한 욕심을 비우고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 당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면 외부 인사도 과감히 영입해야 한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개혁으로 새누리당이 변했다고 국민이 평가할 때 새누리당은 되살아난다. 국민이 왜 이런 선택을 했나 철저히 분석하고 단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세비와 면책특권 등 너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 그 기득권부터 쳐내야 한다. 말로는 안 된다. 정치인의 말이나 이벤트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 전북에서 더민주당 의석이 둘로 줄고 국민의당이 7명의 당선자를 냈다. “일당독주로 오만해진 민주당에 대해 전북 유권자가 내린 준엄한 심판이었다.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이 더 싫으니 국민의당이 반사이익을 누렸다. 국민의당은 이를 잊지 말고 도민의 염원을 늘 되새기며 오로지 전북을 살려내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전북을 살리려면 여야를 불문, 화합하고 소통해야 한다. 전북의 3당은 경쟁적으로 협력해 나가야 한다.”

그는 장관 사임 후 스님이 주신 호(號)를 써왔다. ‘산을 갈아 경작한다’는 듯의 경산(耕山)이었다. 그는 “제 인생에 편하게 해온 일은 없었다”며 “그간의 설움을 동력으로 삼아 예산을 늘리고 기업을 유치하며 일자리를 만드는 데 혼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장관 시절 함께 일했던 정부 부처의 동료, 후배들도 그를 응원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지역주의가 한국 사회 제반 갈등의 시초”라며 “이제 물꼬를 튼 지역주의 해소의 물길을 넓히기 위해 선거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 석패율제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자 국밥집 손님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일일이 악수들을 나눈 뒤 문으로 나서는 그를 향해 한 젊은이가 외쳤다. ‘정운천 파이팅!’

김창곤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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