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가덕도 신공항 유치를 희망하는 촛불문화제. ⓒphoto 연합
지난 6월 2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가덕도 신공항 유치를 희망하는 촛불문화제. ⓒphoto 연합

‘대구공항은 쓰지도 않으면서 투기욕심 부리는 대구 OUT’ ‘가덕신공항 안 되면 민란이 일어난다!’ ‘정부 입김으로 엉터리 용역 결정, 360만 이름으로 처단한다’….

지난 6월 2일 오후 7시30분쯤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 인근 이면도로. ‘가덕신공항 유치를 위한 부산시민 촛불문화제’라는 이름의 이날 집회는 ‘반정부 투쟁’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밀양을 신공항 후보지로 밀고 있는 대구경북 지역과 정부를 비난하는 현수막과 피켓이 곳곳에 있었다. 오후 6시쯤부터 모이기 시작한 참가자는 오후 8시에 이르자 5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 국회의원들도 모여 성난 민심의 앞자리에 섰다. 집회 현장에서는 “대통령이 TK(대구·경북) 출신이라서 그렇다 아이가” “TK 저그 마음대로 할려고 한다 아이가” “우리(부산)를 핫바지로 아나?” 등과 같은 정치적 발언들도 곳곳에서 서슴없이 쏟아져 나왔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PK(부산·경남)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TK 출신 대통령을 두 번 연속 배출하는 데 PK가 기여했는데도 불구하고 정권의 인사에 TK만 중용되고 대선 과정에서 약속했던 PK지역 공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는 등 정치적 소외감이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남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대통령 만들었더니 알짜는 TK가 다 챙기고, 인구도 많은 PK는 ‘들러리’만 서고 있었다는 감정이 팽배해 있다. 가덕신공항도 TK 정권이라서 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참에 “우리(PK)가 힘을 실어 대통령을 한번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누구든 PK 지지 없이는 당선 불가능”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반기문 총장의 5박6일간의 행보는 새누리당 친박계가 제기했던 ‘충청-TK 연합’의 가능성과 맥을 같이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 5월 25일 제주에서 열린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반 총장은 “내년 1월 1일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한국 시민이 된다.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 고민하고 결심하겠다”며 대선 출마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이후 5월 28일에는 충청권의 맹주 김종필 전 총리와 전격 회동했고, 5월 29일에는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북도청 신청사 등을 방문해 김관용 경북지사와 김광림 새누리당 정책위원장 등 여권 경북 인사들을 잇따라 만났다. 유종하 전 외무장관 등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풍산 류씨 종가 인사들과 오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충청권 출신인 반 총장이 향후 대권 도전에 나설 때 대구·경북(TK) 세력과 연대를 염두에 두고 이번 방한 중 TK지역을 찾았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PK 민심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반 총장의 행보에 대해서 부산지역 정치계 한 관계자는 “TK에서만 잘하면 PK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면서 “PK 출신도 아니고, PK에서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나 활동도 전혀 없는 반 총장과 PK가 전략적 연합이나 연대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반 총장에 대한 반감은 TK에 대한 반감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분위기다.

또 다른 지역 정치계 관계자는 “반 총장을 새누리당 대권 후보로 하자는 것은 누구의 생각이냐? 결국 TK 자기네들끼리 생각하는 것 아니냐?”면서 “TK가 후보를 정하면 PK는 표만 찍어주면 된다는 것이냐?”며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5월 27~28일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은 TK지역 지지율이 61.3%로 나타나 고향인 대전·충청 30.6%보다 높았다. 반기문 새누리당,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출마하는 가상 3자 대결 구도에서도 반 총장은 TK에서 61.3%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PK 민심은 내년 대선에서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PK는 전체 유권자의 15% 정도로 서울, 경기 다음이며 지금까지의 대선에서 큰 영향력을 미쳐왔다. 지역에서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나올 경우 반 총장이든 누구든 PK의 지지 없이는 당선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라며 “PK에서 직접 지지를 하든 아니면 대선 이후의 보상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아내야 한다”는 말들도 나오고 있다. 특히 동남권 신공항의 입지가 TK에서 주장하는 밀양으로 정해질 경우 TK가 대선 후보로 밀고 있는 반 총장에 대한 PK의 민심이 완전히 돌아설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도가 여전히 높은 PK에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중 반 총장 외에 대안이 없다는 판단이 설 경우 반 총장에 대한 지지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찮다. 또 반 총장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유연성이나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쌓은 국제적 경험과 감각 등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 편이다. 같은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부산·경남의 반 총장 지지율은 30.0%를 보였고, 3자 구도에서도 51.9%의 높은 지지율을 나타냈다. 반 총장에 대한 그리고 새누리당에 대한 PK의 온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지역에서는 보고 있다. 반 총장이 대선 출마를 선택한 이후 PK에 대한 행보 여부에 따라 지지도가 더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PK, 문재인으로 쏠리나?

PK 출신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에 대한 PK 정서는 다소 복잡해진 양상이다. 새누리당 일색이던 PK에서 지난 20대 총선을 통해 주목할 만한 민심의 변화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은 부산에서 5석, 경남에서 3석을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새누리당 텃밭인 PK지역에서 대단한 약진이다. 초선인 김해영 의원(부산 연제구)은 “민심이 새누리당에 회초리를 든 것으로 지역민에 소홀하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꾸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며 “이제 당만 보고 무조건 찍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PK의 많은 지역구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하던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줬다. 지난 19대 총선과 비교했을 때 새누리당의 정당 득표율은 부산 51.3%에서 41.2%, 울산 49.5%에서 36.7%, 경남 53.8%에서 44%로 줄었다.

이 같은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득표율이 30%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선거는 달랐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으로 나선 민주당의 김정길 후보는 44.5%를 얻어 새누리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10년 전 노무현 후보가 얻은 득표율보다 10%포인트 더 높아진 39.9%를 얻어냈다. 2014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민주당 김영춘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 무소속으로 출마한 오거돈 후보가 49.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선된 서병수 현 시장(50.7%)과 1%포인트 안팎까지 좁혔다.

이와 같은 지역의 정치적 여건 변화로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PK의 지지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부산진구 주민 김모(51)씨는 “문 전 대표는 부산에서 변호사로 생활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는 등 부산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면서 “문 전 대표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도 지역 민심이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사흘간 전국 20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차기 대선 지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25.3%를 기록한 반 총장에 이어 22.2%를 기록, 2위로 나타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 내였다. 이 같은 전국 지지율에 PK의 민심이 더해지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TK에 대한 PK의 반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TK와 손을 잡은 반 총장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나설 경우 PK의 선택은 다른 대안이 없는 한 문 전 대표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신공항 선정과 관련해 TK 쪽에 유리한 결론이 날 경우 문 전 대표에게 PK 민심이 쏠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부산의 한 대학교수는 “문 전 대표는 인물적 측면에서 지역의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데다 PK지역에서 더민주당 등 야당이 경쟁 정당으로서 새누리당과 맞서는 형국이 만들어져 새누리당 일색이었던 예전과는 크게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정서가 아직도 강한 상태에서 총선과 대선의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부산 동래구 주민 이모(49)씨는 “문 대표는 민주화 운동을 벼슬처럼 내세우는 주변의 노무현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분류돼 정서적으로 지지하기를 꺼리는 한계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안철수 대표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PK지역에서 따뜻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민의당은 지난 총선에서 부산 20.3%, 울산 21.1%, 경남 17.4%의 정당득표율을 보여 더민주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민의당이 호남지역을 석권하면서 ‘국민의당=호남당’이라는 인식이 PK지역에서는 널리 퍼져 있다. PK지역에서는 안 대표가 부산 출신이긴 하지만 PK지역에서 활동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다 이제는 ‘호남 후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산에서 40년째 살고 있는 최모(65)씨는 “부산에서 안 받아주니까 전라도 가서 저러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처음에는 개인적인 면에서 참신한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정치를 하는 것 보니까 기존 정치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 대표가 새누리당과의 연대나 PK와의 정치적 교감 등 새로운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할 경우 PK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정치적 상황은 언제나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안 대표가 PK지역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지금은 낮아도 올해 연말이나 내년 PK가 필요에 따라 안 대표를 선택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권경훈 조선일보 영남취재본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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