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원(元)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탁발승 차림으로 밥을 얻어먹으며 곳곳을 유랑걸식했다. 그러다가 24세 되던 해에 홍건적의 일원이 되어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명(大明)제국의 황제가 된 주원장은 자신의 출신과 학문의 천박함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가 ‘문자의 옥(獄)’이라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유랑걸식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광(光·光頭는 대머리라는 뜻)’과 ‘독(禿·대머리)’ 두 글자는 물론 중을 가리키는 ‘승(僧)’, 중·승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 홍건적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적(賊)’, 적과 발음이 비슷한 ‘즉(則)’ 자도 자신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시에도 그런 글자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 글자들을 써야 할 곳에는 다른 글자를 대체해서 쓰도록 했다.

명 태조 주원장 즉위 26년 만인 1394년 명나라 수도 남경(南京)에서 김인보(金仁甫)라는 사신이 조선으로 왔다. 김인보는 조선이 왜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견책하는 글을 한 편 휴대하고 왔다. 그 글 속에는 조선 사신들이 가지고 오는 편지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표현들이 사용된 데 대한 불만도 있었다. 명나라 사정을 잘 모르고 있던 태조 이성계와 조선 왕실은 김인보가 남경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편지 한 통을 보내 “명 태조께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과 함께 조선이 명과 명 태조를 모욕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설명했다.

1395년 9월에는 조선에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이끄는 사신들이 조공물을 싣고 남경에 도착해 명 태조를 알현했다. 명 태조는 이방원에게 “조선 왕실에서는 앞으로 짐에게 글 같은 것은 써올리지 말라”고 했다. 이방원 일행은 명나라 황제가 왜 편지(表箋) 같은 것은 올리지 말라고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귀국해야 했다. 나중에야 조선에서 명 황제에 올리는 글귀에 대해 명 태조가 ‘호생두탑(好生兜搭·괴이하다)’이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명 태조 자신이 그런 말을 했으므로 이방원에게 “앞으로는 표전을 올리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다음 해인 1396년 10월에는 조선에서 새해 정월을 축하하는 사신단을 출발시켰다. 대학사(大學士) 유순(柳珣), 한성부윤(현 서울시장에 해당) 정신의(鄭臣義)가 이끄는 사신단은 ‘하정표문(賀正表文·새해를 축하하는 편지)’을 휴대하고 있었다. 명 태조가 한 해 전에 이방원에게 “앞으로 표전 같은 것은 올리지 말라”고 말했으나 조선 조정은 여러 차례 회의 끝에 “사대(事大)의 예를 올리는 데에는 표전 한 장이나마 올림으로써 정성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1396년 정월 축하 사신단에 표전을 들려 보내게 된 것이었다. 표전을 올리지 말라고 황제가 이방원에게 말했는데도 조선 사신들이 표전을 들고 오자 명나라 태조는 격분하여 사신단 대표 유순과 정신의를 남경에 억류시키고, 조선 왕실에 “왜 대명제국을 모욕하느냐”고 따지기에 이르렀다. 명 황제 태조의 뜻을 정확히 모르는 조선 왕실에서는 이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도대체 어떤 내용이 명 황실을 화나게 했는지를 알아보려 했으나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조선에 대한 분노는 1397년 7월 판사역 원사 이을수(李乙手)와 명에 보내는 표전문을 주로 쓰던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權近)을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비로소 파악됐다. 명 태조가 권근을 불러 “왜 조선은 표전을 올리지 말라는데도 명을 모욕하는 글귀를 담은 표전을 올리느냐”고 묻자 권근이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데 표전을 올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점을 강변하고, 표전의 작성은 황제가 알고 계신 것처럼 정도전(鄭道傳)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예문춘추관 학사인 자신 권근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설명했다. 명을 공격하라는 고려의 명령을 받은 이성계가 명을 치러 가던 길에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한 사실을 강조해서 설명한 권근의 해명을 듣고서야 기분이 풀린 명 태조는 권근에게 시를 지어보라고 하는 등 조선에 대한 불만을 풀었다.

모두 3차에 걸쳐 일어났던 명과 조선 사이의 외교분쟁인 ‘표전사건’은 1398년 주원장이 병으로 사망함으로써 종결됐다. 이후 명에서 조선에 대해 표전 문제를 거론하는 일은 없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명을 섬긴다고 섬겼는데도 명 황제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열등감으로 일으킨 표전사건으로 개국 초반 대명외교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이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명의 도움을 받는 바람에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이데올로기처럼 굳어지게 됐다.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주의는 청에 의해 명이 멸망한 뒤에도 남아 있었고, 바로 이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청 황실을 자극해서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원인이 됐다. 명 멸망 후 청 황실은 조선에 대해 “군신(君臣)의 예를 갖추라”고 요구했으나 조선이 듣지 않자 청 태종이 10만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1주일 만에 한양을 침공했다.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는 결국 항복하고 지금의 송파구 삼전(三田) 나루터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세 번 꿇고 한 번 꿇을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 두드리는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최근 베이징(北京)에서 있었던 한 ‘평화포럼’에서 우리의 전직 외교부 장관에게 중국 청중들이 “제재해야 하는 것은 조선(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냐”고 묻자 우리의 전직 장관은 “중국은 한국에 배치될 사드보다 더욱 강력한 레이더로 한반도 곳곳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국은 사드를 배치하면 왜 안 되느냐”고 되물어서 좌중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우리의 영토 내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데 중국이 반대의사를 강력하게 밝히면서 “한국에 대한 제재…” 운운하는 것은 중국 외교가 1960년대 초부터 노래처럼 불러오던 ‘평화공존 5원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만들었다는 평화공존 5원칙, 다시 말해 영토 보전과 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호혜평등을 마음속으로 잘 되새겨보기 바란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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