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SSBN 598급 조지워싱턴함
미국 SSBN 598급 조지워싱턴함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해전이라고 한다. 이러한 해전 가운데 가장 독특한 존재가 바로 잠수함전이다. 1900년 현대적 잠수함인 ‘홀랜드 보트’가 등장하자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 해군은 “비신사적 무기”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많은 잠수함을 보유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잠수함전(戰)은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우리에게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SLBM을 탑재한 북한의 잠수함을 막지 못할 경우 우리의 안보는 큰 구멍이 뚫린다. 잠수함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무기는 잠수함이므로 잠수함전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 한반도에 비밀리에 접근해 이미 북한 잠수함을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나왔고, 우리도 핵잠수함을 가져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 시간 만에 영 해군 1459명 수장시킨 U보트

세계 최초로 잠수함정을 전쟁에 활용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1776년 독립전쟁 때 ‘터틀’이라는 1인용 잠수정을 만들어 적함에 접근하여 폭탄을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1864년 2월 17일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는 남군의 잠수정 ‘헌리’호가 북군의 군함을 폭약통으로 격침시키기도 했다. 인류 최초로 잠수함이 군함을 격침시킨 사례다. 그러나 헌리호는 완전수동식 잠수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함을 격침시키면서 자신도 같이 침몰하는 치욕을 겪었다.

잠수함이 잠수함전이라는 전쟁의 한 영역으로 등장한 것은 1차대전이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전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독일은 해상전투에서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나라로서 영국은 섬나라여서 지정학적으로 불리했다. 영국은 전쟁물자의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오고 있었는데, 만약에 이러한 상선의 흐름이 끊긴다면 영국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강한 영국 함대의 보호를 받는 상선단을 독일 해군이 해상에서 공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잠수함의 유용성이 돋보이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만 해도 잠수함은 신개념의 무기였다. 1900년 잠수함의 선진국이랄 수 있는 미군이 홀랜드 보트를 도입한 이래, 수많은 국가들이 잠수함 도입경쟁을 시작했다. 독일은 1차대전 당시 잠수함 29척을 보유했는데 이를 U보트(운터제보트·Unterseeboot)라고 불렀다.

독일의 U보트는 개전 초부터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1914년 9월 5일 259명의 승조원과 함께 영국의 순양함 ‘패스파인더’를 수장시켰다. 약 2주 후인 9월 22일에는 불과 1시간 동안 영국 순양함 3척을 연달아 격침시키면서 2200여명의 승조원 중 1459명을 수장시켰다. 이날 사건을 두고 당시 영국 해군 참모총장인 피셔 제독은 “넬슨 제독이 평생 전투로 희생시켰던 병사보다 더 많은 병사가 죽었다”면서 탄식했다. 1차대전 당시 영국은 가장 많은 잠수함을 갖고 있긴 했지만 독일처럼 잠수함을 공격용으로 사용하진 못했다. 잠수함 단독 공격 작전을 감행한 독일과 달리 잠수함을 정찰이나 호위 목적으로만 사용하던 영국은 U보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잠수함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잠수함 공격이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독일 해군은 이제 더욱 무자비하게 잠수함을 활용했다. 소위 무제한 잠수함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을 선언하면서 영국 근해를 전쟁지대로 선포했다. 이곳을 지나는 배라면 영국 국적뿐만 아니라 제3국 선박도 영국으로 전쟁물자를 수송한다고 간주하고 격침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하여 1915년 한 해에 독일은 U보트 35척으로 총 톤수 74만8000여t의 선박을 격침시켰다. 한창 공격이 심한 달에는 하루 평균 2척이 U보트에 격침당했다. 독일은 자국인 희생자가 발생한 미국이 강력한 항의를 하고 나서야 미국의 참전을 우려해 무제한 잠수함전을 중지했다.

하지만 독일은 1917년 서부전선 공세를 앞두고 영국과 프랑스를 최대한 압박하고자 다시 무제한 잠수함전을 시작했다. 치열한 공격으로 영국을 오가는 선박은 4척 중 1척꼴로 침몰당했다. 이로 인하여 보급이 모두 끊긴 영국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1917년 4월까지 영국 전체의 식량 비축량은 6주분, 연료 비축량은 8주분에 불과했다. U보트로 인하여 영국의 경제와 무역은 몰락 직전까지 이르렀다. 잠수함은 그야말로 바다의 공포였다. 영국 선박의 90%가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영국은 잠수함을 잡기 위해 모든 과학적 수단을 다 동원했다. 이렇게 영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개발된 것이 바로 수중음파 측정 장비인 소나(SONAR)의 전신 애즈딕(ASDIC)이었다. 애즈딕은 수중으로 음파를 발사해서 돌아오는 신호를 분석하여 U보트의 거리와 방향을 탐지하여 잠수함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U보트는 미국이 참전하면서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붓고 나서야 겨우 압박될 수 있었다.

1차대전에서 독일은 178척의 U보트가 격침당했고, 패전 시까지 179척을 보유하다가 연합국에 넘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U보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U보트.

대서양의 이리떼

2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또다시 U보트 카드를 꺼내들었다. 히틀러는 1940년 8월 연합국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전을 허락하였다. 이른바 울프팩(wolfpack·이리떼) 작전의 시작이다. 영국의 상선단은 또다시 U보트의 먹잇감이 되었다. 특히 울프팩 작전은 잠수함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다가 선단이 나타나면 동시에 공격하는 방식으로 더욱 피해가 컸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참전하고서도 U보트에 의한 피해는 크게 줄지 않았다. 오히려 1940년과 1941년 연평균 400만t을 격침하던 것이 미국이 참전한 1942년부터는 800만t으로 두 배나 늘었다. 특히 U보트의 활약이 정점을 찍었던 1943년 미국은 잠수함을 잡기 위해 1000척의 호위구축함을 발주하기도 했다. 특히 U보트 간의 무선감청이나 장거리 레이더로 잠수함들의 위치를 찾아내어 항공기로 공격했고, 나중에는 U보트 사냥을 위해 항모까지 투입되었다.

그러나 U보트 사냥에 가장 큰 역할은 한 것은 바로 에니그마였다. 에니그마란 독일군의 암호장치인데, 연합군이 그 해독에 성공하면서 U보트의 진로와 목적지 등을 전부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독일군은 에니그마의 성능을 강화하면서 연합군의 감청을 피하고자 했다. 이에 연합군은 아예 U보트를 나포해서 신형 에니그마를 입수하면서 암호를 해독해냈다. 엄청난 물량공세에 정보우위까지 더해지자 1943년 9월을 기점으로 독일의 U보트는 더 이상 기세를 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일은 2차대전 기간 782척의 U보트를 희생시킨 대가로 2330만t의 상선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영국의 경제를 몰락시킬 정도의 엄청난 성과였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은 U보트로 다양한 공격을 시도했다. 독일은 장거리 폭격기나 수상함 전력이 약해 미국 본토를 공략하지는 못했지만 유일하게 잠수함 전력에서는 미국을 앞섰다. 때문에 이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연구되었다. 처음에는 잠수함에 로켓발사기를 장착하고 지상을 공격하는 구상을 하다가, 이후에는 V-2 로켓을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계획까지 나왔다. 즉 현대적 SLBM의 원조는 바로 독일의 U보트였던 것이다.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이 승부를 벌인 태평양 전선에서도 잠수함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은 개전 당시 잠수함 62척을 보유하고 전쟁 중에 125척을 건조했다. 일본은 애초부터 잠수함을 독자적으로 운용하기보다는 수상함대의 보조역할로 한정시켰다. 이에 따라 잠수함 전력이 전세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잠수함 전력은 미 해군의 항모 2척, 호위항모 1척, 순양함 2척, 10여척의 구축함과 잠수함을 격침시켰고 상선은 179척, 총 90만t을 격침시켰다. 그러나 피해도 막심하여 무려 129척이 격침당해 3분의 2의 전력을 상실했다.

당시 일본은 센토쿠급이라는 잠수항모를 건조하기도 했다. 즉 잠수함에 항공기 3대를 수납하여 미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발상을 했다. 센토쿠급 잠수항모를 총 18척 건조하여 54기의 항공기로 미국 본토를 타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 2척이 건조되는 데 그쳤다. 또한 일본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잠수함 전력이 급격히 줄어들자 가이텐과 같은 자살공격용 잠수정을 만들어 가미카제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반해 미국의 잠수함전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개전 시 111척, 전쟁 중 177척을 건조하여 총 288척이 활약했는데, 피해는 52척에 그쳤다. 반면에 일본 선박을 무려 1750척이나 격침시켰다. 미국이 격침시킨 일본 선박의 62%가 잠수함으로 격침된 것이다. 미국은 잠수함의 용도를 단순히 선단공격이나 수상함 격침에 한정하지 않고 정찰 및 조기경보, 특수부대 침투, 상륙작전 지원, 인명구조 등 다양한 임무에 투입하면서 잠수함작전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잠수함 전력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55년 미 해군이 세계 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하 원잠) ‘노틸러스’함을 취역시키면서 잠수함의 전략적 가치는 급격히 높아졌다. 미국의 원잠 건조에 화들짝 놀란 소련도 곧바로 원잠 제작에 들어갔다. 1958년 소련의 첫 원잠인 프로젝트627 ‘키트(кит·고래)’ K-3가 취역했다. NATO에서는 노벰버급으로 분류한 이 잠수함은 조급한 개발 탓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1962년 이후에야 제대로 가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55년 줄루급 B-67 잠수함에서 R-11FM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세계 최초로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발사에도 성공하였다. 이후 줄루급과 골프급 잠수함에는 더욱 개량된 R-13 미사일까지 장착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SLBM들은 잠수함이 물 위로 부상해서 발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또 구형의 디젤잠수함이라 오랜 순찰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미국은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앞선 잠수함 기술을 활용했다. 물속에서도 발사되는 SLBM인 폴라리스를 개발하는 한편, 이를 발사하는 잠수함으로 원잠을 채택했다.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본격적인 양산형 잠수함인 스킵잭급을 만들고 있던 미 해군은 건조 중이던 한 척의 스킵잭급 잠수함의 길이를 당초 계획보다 40m나 늘려서 16발의 폴라리스 SLBM을 장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계 최초의 전략원잠(SSBN)인 ‘조지워싱턴’함이 등장했다. SSBN이란 SLBM을 발사할 수 있는 원자력추진 잠수함을 가리킨다.

수중 속의 냉전

원잠은 기존의 디젤잠수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존의 디젤-전기식 잠수함은 잠항 기간이 2~3일에 불과하여, 배터리 재충전을 위하여 수면으로 접근하여 스노켈을 올리고 디젤발전기를 돌려야만 한다. 그러나 원자력추진 잠수함은 소형 가압경수로형 원자로가 장착되어 증기 터빈으로 추진을 얻는 동시에 증기 발전기로 전원을 공급받는다. 이론상으론 핵연료 소진 시까지 무한정으로 작전이 가능하다. 속도 차이도 현격하여 디젤잠수함이 보통 6~8노트로 이동하는 데 반해 원잠은 20~25노트의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이런 장점으로 인하여 미국과 러시아 이외에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전부 자국산 원잠을 만들어냈다.

미국은 1958년부터 1965년까지 7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41척의 SSBN을 건조했다. 당시 미국은 ‘41 for Freedom(자유를 위한 41척)’이라는 구호를 통해 핵 억제력의 자신감을 표현했다. 소련도 질세라 미국처럼 16발의 SLBM을 장착한 양키급 잠수함을 실전 배치했다. 이렇게 미·소가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SSBN을 실전 배치하자, 이러한 SSBN을 어떻게 견제할까 양측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SSN(공격원잠)이다. SSN은 장기간 적 SSBN의 발진기지나 활동지역에서 순찰임무를 수행하면서 감시와 추적의 임무를 수행했다. 통상 SSN은 적 SSBN의 기지 앞에서 대기하면서 음문을 수집하고, 적 SSBN이 이동하면 그 뒤를 따라가면서 미사일 발사 징후는 없는지 감시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렇게 고양이와 쥐의 추격전과도 같은 총성 없는 싸움에서 피해는 늘상 발생했다. 소련의 SSBN은 미국이나 영국의 SSN들이 자신을 추적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갑자기 선회기동을 하면서 적을 위협했다. 이런 과정에서 잠수함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충돌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1968년 일본 북방해역에서 침몰한 소련의 공격원잠 K-129, 1986년 대서양 버뮤다 해역에서 침몰한 소련의 양키급 전략원잠 K-219, 그리고 2000년 노르웨이 북쪽 바렌츠해에서 침몰한 오스카급 순항미사일원잠 K-141 등은 모두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로 인해 침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 현대전에서도 잠수함의 활약이 눈부셨던 전쟁이 있다. 바로 포클랜드전쟁이다. 아르헨티나는 모두 4척의 잠수함을 보유했으나 실제 운용이 가능했던 것은 ‘산 루이스’ 한 척뿐이었다. 산 루이스는 영국 항모와 구축함을 향하여 7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 잠수함 한 척을 잡기 위해 영국 해군은 200발이 넘는 폭뢰와 경어뢰를 발사하면서 엄청난 대잠전력을 투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산 루이스는 잡히지 않았다.

반대로 영국도 포클랜드 해역으로 원잠 5척과 디젤잠수함 1척을 파견했다. 원잠은 겨우 2주 만에 작전해역에 도착했지만, 디젤잠수함은 5주 만에 도착하여 전쟁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먼저 도착한 원잠은 감시정찰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개전 한 달 만인 5월 2일에는 영국의 원잠 ‘컨쿼러’함이 아르헨티나 순양함 제너럴 벨그라노를 격침시켰다. 이렇게 주력함이 격침당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은 모든 군함의 출항을 금지했고 자연스럽게 영국은 해양 통제에 성공했다. 냉전과 핵대결이 끝나자 더 이상 SSBN과 SSN의 숨바꼭질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원잠들은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미국은 걸프전에서 토마호크와 같은 순항미사일을 LA급 공격원잠에서 발사하면서 지상의 목표를 정밀타격했다. 아프간전이나 이라크전 등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SLBM보다는 순항미사일을 쏠 일이 많다지다 보니, 오하이오급 SSBN 가운데 4척을 순항미사일 발사 전용으로 개조했다. 그 결과 한 척에서 최대 154발의 순항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수중 미사일 기지가 탄생하기도 했다.

北, 연어급 잠수정으로 천안함 격침시켜

한국은 잠수함에 관해서는 쓰라린 경험이 있다. 북한은 이미 1960년대부터 잠수함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1970년에는 로미오급 잠수함을 모방생산하면서 잠수함 생산국이 되었다. 좀 더 작은 유고급 잠수정을 시작으로 상어급은 자체 설계로 건조했다. 1995년에는 상어급이 강릉에, 이듬해인 1996년에는 유고급이 속초에 등장하면서 한국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2010년에는 급기야 연어급이라는 최신형 잠수정으로 천안함을 기습공격하여 격침시켰다.

북한이 보유한 잠수함정은 최대 80여척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이에 반해 해군은 현재 1200t 규모의 장보고급 잠수함 9척에 1800t 규모의 손원일급 잠수함 5척을 실전 배치 중이며, 손원일급은 2018년까지 나머지 4대가 더 완성될 예정이다. 잠대지미사일 공격 능력을 향상시킨 3000t급 규모의 한국형 잠수함 3차사업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북한이 SLBM을 거의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이를 발사하는 고래급(신포급) 잠수함은 SLBM을 1발 장착하는 게 고작인 수준이다. 게다가 해군 최신형 잠수함 손원일급은 거의 2주 가깝게 잠항이 가능하지만, 고래급은 불과 2~3일의 잠항이 전부이다. 손원일급 잠수함은 고래급보다 훨씬 더 조용하며 순항미사일 발사능력도 갖추어 정밀타격능력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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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합참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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