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9월 5일 아침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마주 앉은 김부겸(58) 의원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전날인 일요일 충남 무창포에서 1000여명의 지지자들이 참석하는 행사를 가졌다고 하는데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이날 아침 일찍 조찬 모임에도 갔다 왔다고 했다. 지역주의의 벽을 깨고 4년 만에 다시 국회에 들어와 대권을 향한 자기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일까.

그는 지난 4월 총선에서 여권의 심장부인 대구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절대로 깨질 것 같지 않던 지역주의의 아성을 세 번의 도전 끝에 무너뜨린 것이다. 주요 방송사에서 이 드라마 같은 승리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특집 방송했다.

그는 2012년 19대 총선 때 자신을 세 번이나 당선시켜준 경기 군포 지역구를 떠나 대구 수성갑 도전을 선언했다. 당시 그는 “지역주의·기득권·과거, 세 개의 벽을 넘으려 한다” “월급쟁이 정치인은 되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첫 도전에서의 득표율은 40.4%. “40% 넘는 지지를 받고 돌아서면 도망가는 거라 생각했다”는 자신의 다짐대로 이 득표율은 그를 삼세판의 승부로 이끌었고, 결국 2014년 대구시장 도전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68.2%의 압도적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 승리로 단숨에 야권의 유력한 차기주자 반열에 올라선 그는 최근 ‘대권 도전 선언’으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 최근 페이스북에 ‘대선 경선 출마를 준비해왔다’고 밝히면서 사실상 대권 도전 선언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아직은 본격적인 대권 도전 선언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려면 적어도 ‘김부겸이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그림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직 준비 중이다.”

- 그러면 왜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의사를 밝혔나. “우리 당이 대세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는 차원에서 얘기한 것이다. 우리에게 대세론은 무난한 패배를 의미할 뿐이다. 야당이 역동성과 다양성을 잃으면 무난한 패배만이 기다린다. 거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 경선 출마 의사를 밝힌 것이다.”

- ‘문재인 대세론’에 제동을 거는 차원에서만 경선 도전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이다. 지난 총선을 치르면서 겪어 보니까 대구도 불평등과 불안이라는 문제로 가득 덮여 있었다. 누구도 나를 보호해줄 수 없다는 불신과 불안, 소득격차에 따른 불평등 등이 마치 싱크홀처럼 깔려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대구에서 ‘지역주의를 넘어서자’는 모토를 내걸고 선거를 치르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이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궁극적인 해답이 없는 가운데 정치를 계속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밥값을 하는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해왔다.”

“이인제 대세론도 2% 부족해 꺾였다”

- 고민의 결과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대권 도전을 접을 수도 있나. “그런 얘기보다는 이제는 그림의 내용을 채워 봐야 하지 않겠나.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한마디 말이라도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치열한 고민을 해서 제대로 그림을 완성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8·27전당대회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은 친문(親文)이 지지한 추미애 후보를 당대표로 선출하였다. 사실상 내년 대선 후보로 ‘문재인’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김 의원은 당내에 이렇다 할 세력도 없는 비주류이다. 정치는 결국 세력싸움으로 끝장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경선에 나서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무모한 도전 아닌가. “사람들이 자꾸 착각하는 게 이번 전당대회 룰이 내년 경선에도 계속 적용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난 두 번의 대선 경선을 보면 전부 오픈프라이머리로 치러졌다. 누구나 관심 있는 사람은 참여가 가능하다. 당내 열렬한 지지층들의 의사 표현 비율은 그만큼 줄어든다. 물론 그분들도 좋아하는 후보가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정권 교체를 이뤄내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있다. 우리 당원들이 많은 전략적 고민을 할 것이라고 본다.”

-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이인제 대세론을 ‘노풍(盧風)’이 꺾었는데 그런 장면이 재현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자꾸 옛날 경험만 반추할 건 없지만 그때의 주어진 환경과 거기에 대한 도전자들의 그림 같은 것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2002년 경선 때도 당원들이 이인제 대세론에는 뭔가 2%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가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호소를 했고, 그런 가치의 호소가 먹혀들어 갔다. 노무현이라는 강력한 비전이 승리한 셈이다. 그런 걸 감안하면 경선 승부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

- 그래도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당’이 됐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사실 우리 당이 총선 전에 우왕좌왕하고 혼란스러웠다. 그걸 김종인이라는 원로가 와서 정돈해줬다. 이번 전당대회에서도 당원들이 당이 좀 안정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들을 한 것 같다. 하지만 대선 후보를 내는 것은 다르다. 일사불란함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독이 된다. 당원들도 그런 판단을 할 것이다. 내가 더 단단하게 준비하고 담대한 비전을 보여주면 그분들도 뭔가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 문재인 전 대표와 비교해 차별화된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아직까지 각(角)을 세울 단계가 아니어서 조심스럽지만, 그분에 비해 내가 조금 더 뚝심이 있는 것 같지 않나.(웃음)”

- 세 번의 도전 끝에 지역주의의 벽을 넘은 것을 당원들이 높이 살 것이라고 보나. “일정 부분 평가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미래를 향한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더 다듬고 치열하게 고민해서 당원들에게 손에 잡힐 듯한 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 등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적 성장사가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긴 하다. “패거리와 계파를 만들어 센 사람한테 줄 서는 정치를 안 했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열정의 크기라든가 강렬함은 노 대통령에게 족탈불급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김대중 전 대통령, 제정구 전 의원과 함께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으로 꼽았다. 사실 그는 노무현과 오랜 기간 한솥밥을 먹은 사이다. 한국 정당사의 격랑을 함께 헤쳐나온 산증인들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1980년대 학생운동, 재야운동을 하던 그는 1988년 재야세력이 주축이 됐던 한겨레민주당 창당 멤버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가 노무현과 처음 조우한 것은 13대 총선 실패 후 1991년 ‘꼬마민주당’에 입당하면서였다. 꼬마민주당은 1990년 YS의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세력들이 만든 당으로, 1992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이끌던 신민주연합당(평민당의 후신, 나중에 통합민주당으로 불림)과 합당했다. 그는 “합당 후 내가 제1야당의 부대변인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변인을 맡았었는데 중앙당 당직자 중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사람이 노 전 대통령과 나, 그리고 부장급 당직자 단 세 사람이었다”며 “그래서인지 DJ가 우리를 특히 아꼈다”고 회고했다. 당시 DJ는 그를 ‘키워야 할 젊은 정치인 여섯 명 중 한 명’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DJ에 대해 “재야 출신인 내가 그런 거인을 만나 정치를 배웠다. DJ는 나한테 ‘운동권 때의 열정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 서생적 문제의식에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추고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는 게 정치의 본령이다. 정치는 책임지는 것’이라고 충고해줬다”고 했다. 하지만 DJ는 그에게 처음 겪는 정치적 시련도 안겨줬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민주당을 깨버린 것이다. 김 의원은 “내 정치인생에서 DJ가 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만든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며 “DJ를 좋아했지만 따라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부겸 블로그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김부겸 블로그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내가 문재인보다 뚝심은 앞선다”

김부겸과 노무현, 두 사람은 국민회의 창당 시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DJ를 따라 동반 탈당할 때 함께 남아 당을 지켰다. 이후 두 사람은 당권을 쥔 이기택 총재에 맞서 이른바 ‘통추(국민통합추진위원회)’ 활동도 같이 했고, 1996년 15대 총선 낙선 후에는 이철, 원혜영, 유인태, 박계동 등 통추 소속 낙선자들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서울 강남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차려 생계를 도모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갈라진 것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서였다. 조순 총재가 이끌던 당이 신한국당과 합치기로 하면서 김부겸은 자신의 오랜 정치 멘토였던 제정구 의원을 따라 신한국당으로 갔지만, 노무현은 DJ에 이끌려 국민회의로 떠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03년 다시 조우했다. 한나라당에서 정체성 갈등을 겪던 그가 이른바 ‘독수리 5형제’와 함께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 멤버로 합류하면서 대통령과 여당 의원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오랜 기간 같은 길을 걸었던 노무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나보다 10살 위였는데, 한마디로 열정 덩어리였다. 뭔가 부정하고 불의하다고 여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부딪치고 깨지고 울부짖으면서 주변을 감화시켜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는 막내인 나를 아껴주었다. 내가 열린우리당 소속일 때 한 번 대정부 질문에서 ‘대통령답게 하시라’고 좀 섭섭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소리 안 했으면 나도 출세도 하고 그랬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불의(不義)한 권력에 의해 돌아가신 게 내내 마음에 남는다.”

- 사실 정치인 김부겸이라고 하면 지역주의와 싸웠다는 이미지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아직 준비 중이라고 해도 화두로 삼는 정책적 비전이 있을 텐데. “작년에 ‘공존의 공화국’이라는 책을 내면서 강조했지만 패싸움만 하는 정치를 넘어서는 공존의 정치, 같이 살아보자는 차원의 공생의 경제,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대로 축 처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공영의 사회를 화두로 내걸었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앞으로 채워나갈 것이다.”

‘공존’은 정치인 김부겸의 오랜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투사’였던 노무현과 달리 진영 논리를 싫어하고 온건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2004년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씨가 결혼할 때 당시 여당 의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그는 작년에 펴낸 ‘공존의 공화국’이라는 책에서 당시 결혼식 참석에 대해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정신차리고 한 가정을 이룬다니 축하할 일이었다.… 박준규 의장, 박태준 회장도 계셨는데 “아이고, 이놈아, 네가 오늘 밥값을 한다. 정치를 그렇게 해야 한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정치판도 사람 사는 곳이다’라고 썼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공존의 정치’를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자신의 정치 멘토였던 제정구라고 강조했다. 빈민운동가로 유명했던 제정구는 서울대 정치학과 10년 선배로 1999년 55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제정구 선배가 죽기 직전 나를 불러놓고 유언처럼 말한 게 있다. ‘세상에 허투루 가볍게 여겨야 할 관계란 없다. 정치를 하려면 상대편을 배려하는 정치를 해라. 20세기에는 상대방을 찍어누르는 정치를 했지만 21세기에는 상생이 화두다. 서로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정치를 하라’는 충고였다. 인간의 추악한 면이 다 드러나는 빈민운동에 몸바친 선배가 죽을 날을 받아놓고 한 말이라 가슴에 새겼다. 어느 한쪽이 독식을 하면 한쪽은 굶어죽는 게 이치 아니냐. 우리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 대권 후보로서의 비전도 ‘공존의 공화국’이라는 틀에서 고민하는 중인가.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저 정도면 치열한 고민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담겨 있다고 공감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 주장만 늘어놓으면 학자지 정치가가 아니다. 내 얘기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저 사람 얘기대로 하면 뭔가 가능할 것 같다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꿈을 안겨줘야 한다. 그런 것이 갖춰지면 내가 진짜 한번 해보겠다며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 그게 언제쯤인가. “허허허. 두고 보자.”

- 2017년 대선의 시대정신이 뭐라고 보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삶의 불안과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해소하는 것 아니겠나.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산업화 초기처럼 무엇이 닥칠지 모른다는 일종의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하지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나갈 길을 아무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고 있는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존의 공화국으로 가야 한다”

- 경선 준비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나. “경제, 사회, 외교안보 등 큰 축에서 3~4팀 정도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좀더 생생한 그림을 그리려면 도움이 더 필요하다.”

- 어제 새희망포럼이라는 지지자 모임을 가졌는데, 대중조직도 만들고 있나. “새희망포럼은 15년 전 내가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 지지자들이 만든 모임이다. 전국적으로 3000명 정도가 회원으로 있다. 지금까지 대중 조직은 확대를 자제했다. 그분들이 조기 과열되면 안 되니까.”

김 의원은 “어제 모임에서는 지지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할 것 같아 평상시답지 않게 설득조를 버리고 오랜만에 강한 토로를 했다”고 말했다. 그를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들은 그를 대중 연설에 강한 정치인으로도 기억한다. 1970년대 말 이른바 ‘서울의 봄’ 때 서울대 복학생협의회를 이끌던 그의 사자후에 감명받아 거리로 나섰다는 회고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과거 일화들은 좀 과장된 것”이라며 “지금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중연설로 정치를 하는 때도 아니다”라며 겸손해 했다.

- 어제 지지자 모임에서 우리 현실을 빗대 ‘강자들의 난장판’이라는 비판을 했던데 어떤 의미인가. “우리 사회의 법치가 무너지고 있지 않느냐. 사회를 지탱하던 최소한의 합의 같은 것들이 권력자나 경제적 강자들 앞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권리가 언제든지 무시당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건 아니다. 어떤 분들은 나에게 나라를 바꾸겠다는 각오로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새로 다시 시작해보자는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 당내 비주류로서 친노 패권주의의 폐해를 겪은 적이 있나. “친노와 비노가 싸우는 지난 4년간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절박하게 느낄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 당은 전통적으로 가치를 둘러싼 논쟁을 해왔다는 점이다. 미래와 비전과 정책을 둘러싼 논쟁을 해왔는데 어느 순간 친노니 비노니 하면서 권력을 쥔 세력과 도전하는 세력 간의 싸움 비슷하게 돼버렸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자. 당장은 국민의당이 분당하면서 우리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인 호남까지 한발 비껴서 있지만 우리 당 어딘가에 역동성, 건강성이 살아있을 것이다. DJ가 총재를 할 때도 주류와 비주류가 6 대 4 정도는 유지했다.”

- 당원들을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다. “내가 정당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나. 그동안 전당대회만 수십 번을 치렀다. 나는 바닥의 힘을 믿는다. 야당 지지자는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고 세상을 바꾸자는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세상을 어떻게 하면 바꿀지 고민을 많이 할 것이다. 일방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서 대구 북구을의 홍의락 의원이 공천 탈락하자 중앙당에 올라와 항의한 적이 있는데 왜 그랬나. “내가 화가 났던 건 누구도 그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다. 홍 의원 개인에게는 엄청나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놓고 말이다. 우리 당으로서도 취약지구를 돌파해보겠다는 귀중한 전략적 자산이었는데 그런 에러를 범해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제도를 설계해 놓고 기계적 평가만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당은 정무적 판단을 해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없었다.”

- 김 의원과 가까운 홍의락 의원을 공천 탈락시킨 게 주류인 친노의 견제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는데. “에이, 그건 아니다. 친노가 주도권을 행사할 때도 아니었고.”

‘한국 정치의 경계인’이 보는 보수와 진보

김 의원에 대해서는 ‘한국 정치의 경계인’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한쪽에서는 ‘DJ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쪽에서는 ‘보수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 이런 특이한 이력이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 나의 특이한 이력은 우리 정치사의 비극이다. 이합집산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니까. 어느 날 열심히 일하던 회사가 갑자기 경쟁회사에 M&A됐다고 생각해 봐라. 하지만 경계인으로 산 게 도움도 됐다. 맹목적으로 정당의 실력자한테 줄을 서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를 상식적으로 보는 힘을 길렀다. 견강부회하고 어거지 논리에 꿰맞추는 일은 하지 않았다. 보수·진보 양쪽을 다 이해하는 자산을 쌓은 셈이다.”

- 현재 야권의 차기주자 중 보수당을 겪은 사람이 별로 없는데 보수당으로서 새누리당의 장점이 뭐라고 보나. “경륜으로 표현되는 위기 극복 능력, 일종의 지배의 노하우다. 이것은 부인할 도리가 없다. 다만 그분들이 국민들을 설득해온 애국심이라는 가치에는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 같이 살아야 한다는 공존과 상생 같은 게 빠져 있었다. 그런 게 있어야 진짜 마음으로 따라오는데 그게 부족했다.”

- 그럼 진보는. “진보 진영은 좋든 싫든 더불어 사는 가치, 공존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는 확고하다. 하지만 책임의 문제는 부족하다. 너희들이 책임질 수 있느냐는 국민들의 질문에 대해 확실한 걸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경험한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강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양쪽을 적당히 섞자는 게 아니다. 공존의 정치라는 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은 아니다. 둘이 같이 힘을 합칠 여지를 내 눈으로 봐왔기 때문에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합의와 기준을 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하면서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은 그만하자는 것이다.”

- 최근 사드(THAAD) 문제와 관련해서 경제적 협력을 통해 북한에 길을 터주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는데, 김정은 정권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수 있다고 보나. “북한이 왜 저러느냐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정권도 핵과 미사일만으로는 밥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지 않겠나. 결국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살 길을 터달라는 얘기다. 지금 우리가 국제사회와 공조해 핵과 미사일은 안 된다는 강한 압박을 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저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움직임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건 대한민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중심이 되어 미국, 중국을 설득하고 북한에 어떤 형태로든 제안을 해야 한다. 동북아 각축장에서 남북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늘 방관자 국외자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 만약 내년 대선에서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의 햇볕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나. “어떻게 똑같이 할 수 있겠나. 그때는 북이 핵 미사일 개발 능력에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막연한 북한 붕괴론도 설득력이 없긴 마찬가지다. 우리의 실력과 위치를 냉정하게 보면서 대북정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현 정부가 사드 배치 같은 전략적 카드를 너무 쉽게 써버린 게 아쉬웠다. 다행히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에 중국을 방문해 조건부 사드 배치론으로 한발 물러섰는데 문제를 풀어갈 길은 열렸다고 본다.”

김 의원은 인터뷰 도중 내년 대권 도전 여부와 관련해 “아직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해 보이겠다는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자신의 말대로 정당인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가 더불어민주당 당원들을 어떤 그림으로 파고들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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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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