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최신예 보레이급 전략잠수함이 최근 태평양함대에 배치됐다. ⓒphoto 러시아해군사이트
러시아의 최신예 보레이급 전략잠수함이 최근 태평양함대에 배치됐다. ⓒphoto 러시아해군사이트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해 주요 도시들에서 지난 10월 4일부터 7일까지 미국의 핵 공격에 대비해 마치 냉전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민방위 훈련이 실시됐다. 20만명이나 되는 재난구조팀과 5만개의 방공 대피시설이 동시에 가동된 이번 민방위 훈련에는 민간인 4000만여명이 참여했다. 러시아 정부의 각 부처들은 민방위 훈련에 동원되는 바람에 업무를 중단해야만 했다. 이 훈련을 주관한 비상사태부는 적의 핵과 생화학무기 등의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력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대비절차와 각종 장비를 점검했다고 밝혔다. 이번 민방위 훈련에서 핵전쟁에 대비해 모스크바 전체 인구 1200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지하 방공호들이 건설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러시아 국방부가 운영하는 TV 매체인 즈베즈다는 미국의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모스크바를 향해 핵무기를 겨냥하고 있다면서 미국을 맹비난하는 선전·선동 영상물도 방영했다.

러시아가 미국에 핵카드를 꺼내들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10월 3일 대통령령을 통해 미국의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행동으로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이 생기고 있다면서 미국과 체결한 무기급 플루토늄 관리 및 폐기 협정(PMDA)을 잠정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의 명령은 미국과의 핵전력 균형 유지를 위해 무기급 플루토늄을 폐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러시아는 2000년 8월 핵무기 제작에 사용되지 않는 무기급 플루토늄 잉여 보유분 34t씩을 각각 불가역적으로 폐기하거나 원자력 발전 연료용으로 변환한다는 협정에 서명한 바 있다. 이 협정은 냉전 종식 후 군축을 약속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 협정을 깨겠다는 것은 앞으로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자국은 협정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왔지만 미국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양국이 보유한 무기급 플루토늄 68t은 핵탄두 1만7000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자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인권법을 폐지하고, 나토 회원국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을 감축해야 이 협정을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 것은 푸틴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보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러, 핵카드를 선택하다

러시아 정부는 강경한 후속 조치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지난 10월 5일 미국과의 원자력·에너지 분야 연구 및 개발 협력 협정(2013년 체결)의 효력을 중단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던 저농축 우라늄 시설(6개 원자로) 변환, 원자력·에너지 분야 신기술, 핵폐기물 처리 기술, 의료 등 원자력 응용 기술과 관련한 모든 연구가 중지됐다.

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신형 전술 탄도미사일 이스칸데르-M이 10월 8일 발트해 연안 도시인 칼리닌그라드에 실전 배치됐다. 칼리닌그라드는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있는 러시아 서부 역외(域外) 영토다. 사거리 500㎞인 이스칸데르-M 미사일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비롯해 발트 3국 전역은 물론 독일 수도인 베를린까지도 타격할 수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미국이 유럽 미사일방어(MD) 체계 구축 계획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에 요격 미사일을 배치하자 칼리닌그라드에 이스칸데르-M 미사일을 배치해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러시아의 조치는 또 나토가 지난 7월 정상회의에서 폴란드와 발트 3국 등 4개 국가에 4개 대대 병력 4000여명을 배치하기로 한 데 대한 반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스칸데르-M 미사일은 마하 6의 속도로 비행하다 종말 단계에서는 비행 궤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요격 미사일로 격추하기 어렵다.

러시아가 핵카드를 선택한 이유는 핵이, 군사력이 우세한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제력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한 데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의 강력한 제재로 상당히 약화됐다. 게다가 저유가 때문에 석유 수출로 벌어들이던 수입이 대폭 줄어들었다. 경제 악화로 당연히 국방 예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됐다. 실제로 러시아 정부는 올해 국방 예산을 전년보다 5% 줄이기로 했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2000년 권좌에 오른 이후 가장 큰 폭의 삭감이다. 푸틴 대통령의 목표는 국가 군사력 강화 계획에 따라 22조루블(약 38조원)을 투입해 2020년까지 무기들 중 70%를 현대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무부 등 경제 관련 부처들은 심각한 경제난 때문에 국방 예산을 대규모로 지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9월 열린 내각회의에서 이 문제를 놓고 재무부와 국방부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부 장관은 22조루블은 현 재정 상황에서 예산이 감당할 수 없는 과부하라며 이를 12조루블까지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방 예산의 삭감은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말까지 재무부와 국방부 간의 이견들을 조율해 내년 7월까지 최종안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푸틴 대통령으로선 미국 등 서방에 러시아의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핵전력의 강화라고 판단해 핵무기 현대화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국가 군사력 강화 프로그램을 보면 제5세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신형 전략전폭기 개발 및 신형 핵잠수함 건조 등에 모두 19조루블이 투입될 예정이다.

러시아는 이미 3개 분야의 핵전력 현대화를 상당히 진행해왔다. ICBM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미사일이 RS-24 야르스이다. 야르스 미사일은 기존에 실전 배치된 ICBM인 토폴-M에 비해 제조기간 및 원가를 낮춘 개량형이다. 야르스 미사일은 핵탄두를 4~6개 탑재할 수 있는 ICBM으로 단일 핵탄두를 탑재한 토폴-M보다 훨씬 강력한 전략무기다. 길이 23m, 폭 2m, 무게 47.2t, 사거리 1만1000㎞, 최고 비행속도는 마하 22이다. 이동식과 고정배치식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러시아는 야르스 미사일에 탑재된 핵탄두를 개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MD체계를 뚫을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러시아 전략미사일군은 지난 9월 플레츠크 국립 우주발사시험장에서 야르스 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1만㎞가 넘는 극동 캄차카반도의 가상 표적을 성공적으로 명중시켰다. 러시아는 현재 야르스 미사일 58기를 실전 배치했다. 러시아는 또 15개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미국의 MD를 무력화할 수 있는 초대형 차세대 ICBM인 RS-28 사르마트를 개발해 2018년부터 단계적으로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무게가 100t인 사르마트는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SS-18의 개량형으로 사거리는 9656㎞이다.

전략잠수함도 속속 실전배치

러시아는 또 현재 공군이 운용하고 있는 Tu-95MS, Tu-160, Tu-22M 등 세 종류의 전략폭격기에 대한 현대화 작업도 시작했다. 차세대 전략폭격기 PAK-DA도 개발하고 있다. 스텔스 기능을 갖춘 PAK-DA는 첨단 전자전 체계와 장거리 순항미사일, 재래식 정밀유도무기를 모두 탑재할 수 있다. 2020년 생산을 시작해 2025년 실전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최신예 장거리 순항미사일 KH-102도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최대 사거리가 9600㎞에 달해 전 세계 주요 타격 목표가 모두 사정권에 들어갈 수 있다.

최신예 전략잠수함들도 속속 실전 배치되고 있다. 배수량 2만4000t, 길이 170m, 폭 13.5m, 높이 10m, 시속 30노트(56㎞)인 보레이급 핵잠수함은 107명의 승조원을 태우고 450m 해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최신예 불라바 전략 핵미사일을 최대 16기까지 탑재할 수 있다.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인 불라바 미사일은 1기에 개별 조종이 가능한 핵탄두 10개 탑재가 가능하고 사거리가 8000㎞에 달한다. 러시아 해군은 현재 보레이급 잠수함 유리 돌고루키호를 북해함대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호와 알렉산드르 넵스키호를 태평양함대에 실전 배치했다. 러시아 해군은 오는 2020년까지 모두 6척의 보레이급 전략 핵잠수함을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보레이급 전략잠수함은 취역한 지 30년이 넘는 타이푼급 잠수함을 대체함으로써 앞으로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략 무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러시아는 앞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미국에 맞먹을 정도로 핵전력을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러시아의 강력한 핵전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도 러시아의 핵전력 강화에 맞서 차세대 핵무기 개발 등 핵전력 현대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시작해 오는 2023년까지 끝나는 핵무기 현대화 10개년 계획에 모두 3550억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핵잠수함·전략폭격기·전략미사일 등 핵 이동수단의 개발 비용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이 450개를 보유 중인 유일한 지상 사일로 발사식 ICBM인 미니트맨Ⅲ 미사일에 대한 현대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20년 내 미니트맨Ⅲ를 대체할 지상기반핵억제(GBSD)미사일 체계를 도입할 계획이다.

미, 새 핵잠함 SSBNX 12척 구매 계획

미국의 ICBM인 미니트맨Ⅲ의 시험 발사 모습. ⓒphoto 미국공군사이트
미국의 ICBM인 미니트맨Ⅲ의 시험 발사 모습. ⓒphoto 미국공군사이트

미국은 또 새로운 핵잠수함인 SSBNX 12척을 구매할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미 해군은 현재 태평양에 8척, 대서양에 6척 등 모두 14척의 오하이오급 전략 핵잠수함을 운용 중이다. 오하이오급 전략잠수함들에는 트라이던트Ⅱ D-5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이 탑재돼 있다. 신형 전략잠수함에는 트라이던트Ⅱ D-5LE SLBM이 장착될 예정이다. 미국은 B-52H, B-1B, B-2스텔스 전략폭격기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신형 전략폭격기인 B-3를 개발하고 있다. 스텔스 기능을 갖춘 B-3 개발 비용은 550억~800억달러로, 폭격기 1대당 목표 가격은 5억6400만달러로 책정됐다. 미 공군은 2025년까지 B-3 100대를 실전 배치할 예정이다. B-3에는 B61-12 스마트 핵폭탄과 LRSO(Long-Range Stand-off)라고 불리는 신형 크루즈 순항미사일이 탑재된다.

B61을 개량한 전술 핵폭탄인 B61-12는 첨단 레이더와 GPS를 장착해 터널과 같은 깊은 곳에 있는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고 목표물에 따라 폭발력을 4단계로 조절해 주변의 부수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무게 350㎏의 소형 핵폭탄인 B61-12를 400기 생산하는 데 110억달러(12조1770억원)가 소요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20년부터 양산에 들어가는 B61-12를 유럽의 5개국에 우선 배치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가 이스칸데르-M 미사일을 칼리닌그라드에 배치한 것도 미국의 B61-12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지난해부터 미국이 독일 등에 B61-12를 배치하려는 것은 유럽의 전략적 균형을 깨트리는 것이라면서 이에 상응하는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위협해왔다. 독일 국방부는 B61-12를 장착할 수 있는 토네이도 전폭기 개조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 1·2위 핵 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 간의 핵전력 강화와 핵무기 현대화로 신냉전 구도가 더욱 심화할 것이 분명하다. 양국은 냉전시대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냉전이 오래전에 끝났지만 국제안보 지형이 핵 위험으로 꽉 차 있다”면서 “특히 러시아는 핵무기를 앞세워 협박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현재가 냉전시대보다 더 불안정하다”면서 “미국이 러시아 혐오주의에 근거해 러시아의 이익을 침해하고 안보를 위협하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리아 내전 사태와 우크라이나 문제 등으로 양국의 갈등과 대립은 증폭되고 있다. 자칫하면 양국의 국지적 충돌이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은 크렘린궁 집무실에 거위 조각상을 놓아두었다. 1983년 조기경보 레이더가 거위 떼를 미국의 핵미사일로 오인해 대응경보를 내렸던 일촉즉발의 위기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양국의 갈등으로 전 세계의 평화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면서 화해를 촉구했다. 하지만 양국의 대결 구도를 볼 때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라는 냉전시대의 전략이 21세기에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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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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