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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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불쌍하다고요?”

원희룡(52)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김재원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자리를 물러나면서 “외롭고 슬픈 대통령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고 하자, 갑자기 말을 멈췄다.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이 불쌍하다. 국민이 불쌍한 게 먼저다.” 원희룡 지사는 말을 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서 경쟁을 뚫고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은 책임이 막중한 자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통령의 입장이 아니라, 불쌍한 개인으로 여겨달라는 얘기를 하다니,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실망, 충격, 경악

원희룡 지사는 지난 11월 1일 ‘최순실 사태’와 관련 여권 잠룡 5인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그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 남경필 경기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회동을 갖고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새누리당은 재창당의 길로 가야 하고 현 지도부는 사퇴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인 11월 2일 오전 9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있는 제주도청 서울사무소에서 원 지사를 만났다.

- 10월 25일 박 대통령의 사과 기자회견을 보고 무얼 느꼈나. “90초짜리 회견 말입니까? 실망, 충격, 경악이었다.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자격도, 정보도 없는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깊이 관여되었다는 말에 국민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 나는 이 사건 초기만 해도 과거에 있었던 수준의 비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의혹이 쏟아졌다. 국민의 화(禍)를 키운 건 이런 사안에 대해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자기합리화를 했다는 대목이다.”

- 박 대통령은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대통령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대통령은 법적으로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하지 않는 한 형사소추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을 밝힐 의무까지 면책받은 것은 아니다. 정치를 하면서 크고 작은 배신을 경험한 적이 있다. 어떤 참모를 기용하느냐가 중요한데, 지금 청와대는 대통령과의 신뢰가 구축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박 대통령이 정신적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막상 진실을 밝히고 나면 하야하라는 요구가 더 커질 것 같다. “국민 절대다수가 박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하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나. 국가원수로서 권위와 신뢰는 이미 붕괴됐다.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 대통령이라면 진실을 밝히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국민께 사죄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버티겠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원 지사는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입장을 밝힐 때 여러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 하야와 탄핵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거론되는 현 상황을 통탄했다. 그는 “대통령이 하야한다고 해서 나라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국정은 멈춰서도 안 되고 멈출 수도 없다”면서 “지금은 집권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 당내 잠룡들이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당도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 누구도 현재의 국정농단을 견제하지 않았다. 누군가 경고등을 켜도 친박들은 대통령을 엄호하기 바빴다. 지금 친박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이 대통령 주변에 있을 때 최순실은 온갖 캠페인과 국정에 관여했다. 이제 와서 ‘나는 몰랐다’고 해봤자, 국민이 수긍하지 않는다. 친박 세력이 책임을 져야 한다. 새누리당은 국민의 불신 속에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 이정현 대표는 아직 물러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사퇴할 수밖에 없다. 친박은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정치적 책임마저 피해갈 수는 없다. 친박이 버티니까 계파를 초월한 당내 의견 수렴도 안 되고 여야 간 진지한 대화도 막혀 있다. 지도부 사퇴 이후에는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당 해체에 준하는 쇄신을 해야 한다.”

새누리당 내 친박과 비박, 양 진영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골이 깊다. 이정현 당 대표 체제는 강석호 최고위원, 1인을 제외하면 친박 일색이다. 김무성·정병국·나경원·김용태 의원 등 비박들이 지도부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친박의 퇴진을 의미한다. 친박 세력이 불과 1주일 만에 ‘폐족’으로 내몰릴 처지가 됐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이 간판으로는 어차피 대선을 치를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 지사는 “친박과 결별해야 한다”는 당 일각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했지만 “조금 이른감이 있다”고 말했다.

- 당내 비주류가 친박과 갈라설 수 있다는 ‘분당설’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눈치만 보며 권력에 편승한 측근들이 청산되지 않고는 대선을 치르기 어렵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감염된 세력이 정리되지 않는 한 국민은 현재의 새누리당에 국정을 맡기지 않을 거다.”

- 친박을 정리하고 가자는 얘기로 들린다. “개과천선하지 않는 친박은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 박 대통령 주변에서 호위무사를 자청하고 친위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동반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권력이, 민주주의가 무서운 거다.”

지난 11월 1일 최순실 사태의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에 모인 여권 대권주자 5인. 왼쪽부터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지사, 김무성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일 최순실 사태의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에 모인 여권 대권주자 5인. 왼쪽부터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지사, 김무성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photo 뉴시스

개헌은 필요… 내각책임제로 가야

오전 9시30분. 인터뷰가 30분째 이어지고 있던 중 박근혜 대통령이 신임 국무총리에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임명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대표적 친노(親盧)인사다. 원 지사는 국무총리 지명에 관한 쪽지를 비서로부터 전달받고 “내가 예상한 대로 결정이 났군”이라고 말했다.

-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국무총리에 임명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어제 직원들과 회의에서 ‘현재 청와대라면 김병준이 1순위’라고 예상했다. 박 대통령은 김 교수가 대권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손학규나 김종인보다 낫다고 봤을 거다. 참여정부 정책실장을 지낸 인사라는 점에서 야당에서 그를 무작정 비토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과 한때 청와대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거리감이 있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 김 교수가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적임자인가. “김병준 교수가 박근혜 대통령과 권력을 어떻게 분담하기로 했느냐가 중요하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 교수는 국정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름 책임감을 갖고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사라고 생각한다. 다만, 대통령의 고백과 참회가 없는 상태에서 김 교수가 총리로서 이 부분을 덮고 간다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거다. 야당이 그에 대한 임명동의를 해주냐도 관건이다. 국무총리는 장관과 달리 국회 표결을 거쳐야 한다.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야당이 반대하면 임명되기 어렵다.”

- 야당이 최순실 사태를 지나치게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있다. “박 대통령이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진정성을 담은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당이 반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야당이 지금처럼 무책임하게 굴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야당은 내부적으로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대선 일정이 엉클어질 수 있고 거국내각을 수용하면 국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야당도 국가운영의 한 축이다. 이대로 식물정권을 방치하지 말고 진지하게 협치에 나서야 한다.”

국무총리에 김병준 교수가 임명된 것과 관련, 개헌론이 사그라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개헌을 외쳤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김종인 의원을 선택하지 않고 지방자치 전문가인 김 교수를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원 지사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 어떤 형태의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의원내각제 형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길 원한다. 대통령은 직선제로 하되 권한을 외교, 국방 등으로 한정하고 내치는 다수당에서 선출된 총리가 맡는 게 좋다. 정치적 쟁점이 상존하고 여야가 자주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책임을 지우는 정치시스템이 우리 현실에 맞다.”

- 제3지대 등을 통해 정계개편을 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국민의 지지나 열망을 제대로 담고 있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제3지대론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 특히, 기존 정당에서 들러리를 섰던 세력 또는 주류가 안 되니까 한번 나가 보자는 이들이 모인다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새누리당이 현 상태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정치권의 큰 변화요인이 될 수 있다. 제3당에서 논의하던 정계 개편의 시나리오보다는 앞으로 새누리당의 변화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변화요인의 상수가 바뀐 것 같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상은 무엇인가. “옛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내려온 권위주의와 이에 맞섰던 이들이 가진 저항 권위주의 모두가 막을 내려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진정성을 갖고 여야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 국민의 의견을 모으고 에너지로 분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수평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걸 위해서는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 국민이 그걸 원하고 있다.”

- 내년 대선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이 있을까요. “그분은 대선판에 뛰어들지 않을 수 있다. 반 총장은 국내 정치에 대한 의지와 관심이 있겠으나, 친박 대권주자가 되는 건 물 건너갔다. 국내 상황이 1주일 만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급변하는 정치지형에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희룡 지사는 당내에서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자제했다. 원 지사는 “도정을 책임지고 이끌어달라는 제주도민의 바람을 알기 때문에 정치적 행보를 밝히는 게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원 지사에 대한 도민들의 기대는 남다르다. 검사를 거쳐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 3선 의원을 지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득표율 60.3% 지지를 받고 제주지사에 당선됐다.

당분간은 도정에 충실

- 도정을 챙기느라 서울에 자주 올라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행기로 이동하면 출퇴근도 가능한 거리지만, 제 고향 제주는 연고를 중시한다. 주민들이 도지사는 지역 현안에 몰입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서울에 올라와 정치를 하기보다, 도정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오늘도 인터뷰를 마치고 곧장 전라남도로 향한다. 전남도와 함께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투자협력안을 만들기로 했다. 제주는 2030년까지 원자력발전소 4기가 생산하는 양의 풍력에너지를 만들어 육지로 제공하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 해군이 강정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구상권을 청구했는데. “전례가 없는 해군의 구상권 청구는 철회되어야 한다. 사실 제주도민 절반 이상이 해군기지 건설에 동의했다. 과거 부안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립이나 천성산 터널 건설 때도 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았지만 주민을 상대로 한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았다. 강정마을에 시위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고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주민들에게 책임을 묻는 건 옳지 않다. 이미 해군기지는 다 완공되어 정상 가동되고 있다. 민군 화합 차원에서 이제 갈등을 봉합할 때다.”

- 제주로 유입된 중국인이 많아지면서 사건사고가 늘었다. “과거 관광객, 투자 등에 있어서 우선 유치하고 보자는 식으로 일을 해 부작용이 생겼다. 제가 취임한 이후 중국 투자는 선별적 투자로 관리하고 있다. 환경 파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개발사업의 기준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저가 관광도 퇴출하려고 한다. 제주에 오는 관광객들이 현지 법질서를 지키도록 강력하게 관리하고 있다.”

지난 9월 제주의 한 성당에서 중국인 첸모씨가 흉기를 휘둘러 기도 중이던 60대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관광객으로 제주에 들어온 첸모씨는 구속됐지만, 이후 중국인 범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제주에서 저탄소 녹색도시의 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제주는 앞으로 전체 탄소량의 37%를 줄이기로 유엔과 약속했다. 제주를 기후변화에 대비한 롤모델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제주는 2030년까지 100% 신재생에너지로 전력을 공급할 예정이다. 자동차도 100% 전기차로 바꿀 것이다. 이를 위해 도시 기반시설을 스마트하게 재구축하고 있다. 스마트 아일랜드의 꿈을 조금 더 확장하면 스마트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인터뷰 말미에 원 지사는 다시 최순실 사태를 거론했다. 그는 “의혹과 폭로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면,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며 국정 중단을 우려했다. 원 지사는 “국가가 바뀌었다”고도 했다. “1주일 전에 내가 살던 그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지난 40년의 시대와 결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순식간에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길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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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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