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태미 덕워스 하원의원. 이라크전서 두 다리를 잃은 태국계 여성 참전 용사다. ⓒphoto alchetron.com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태미 덕워스 하원의원. 이라크전서 두 다리를 잃은 태국계 여성 참전 용사다. ⓒphoto alchetron.com

살면서 만남만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을 몇이나 볼 수 있을까. 최근 그런 인물을 만나는 행운이 찾아왔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이번 미국 상하원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아시아계 여성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태미 덕워스(Tammy Duckworth·48) 연방 하원의원(민주·일리노이)과의 만남이다.

덕워스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이번 총선을 약 1개월 앞둔 지난 10월 6일, 그가 한인들의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찾았을 때였지만 사실 그와의 인연은 이보다 일찍 시작됐다. 20세기 한민족이 낳은 전설적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고(故) 김영옥 대령에게 미국 최고시민훈장인 대통령자유훈장을 추서해야 한다고 올해 초 미국 국회의원 약 40명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권고할 때 덕워스 의원이 동참하면서부터다. 이 권고에는 주디 추 미국 의회 아·태의원연맹의장(민주·캘리포니아), 에드워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공화·캘리포니아),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민주·캘리포니아) 등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덕워스 의원과의 만남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예정돼 있었고 의제도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내년에 새로운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출범한 다음 미국이 김영옥 대령과 관련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협의였다.

덕워스 의원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관광명소이기도 한 보나벤처호텔로 갈 때만 해도 그저 괜찮은 정치인과의 평범한 만남 정도로 예상했을 뿐이고, 머릿속은 그날 의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예상은 약속장소에 나타난 덕워스 의원의 첫 모습에 의해 깨지면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가 이라크전쟁에 참전해 두 다리를 잃은 전쟁영웅이니 휠체어를 타고 있을 것임은 예상했으나, 그는 보좌관을 두 명이나 대동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직접 두 팔을 뒤로 뻗치고 상체는 약간 앞으로 구부린 채 휠체어 바퀴를 바삐 돌리며 다가왔다.

그가 멀리 일리노이주에서 오는 손님이라 나는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출입문을 약간 등지고 앉았기 때문에 그가 들어서는 순간을 놓친 터였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대동한 보좌관 한 명이 휠체어를 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먼저 와 그의 도착을 귀띔해줄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나마 휠체어도 전동식으로 작동시키지 않고 애써 자기 두 팔로 돌리고 있었는데 오른쪽 팔도 이라크 전장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렇게 다가온 덕워스 의원은 시종일관 진솔하고 겸손하고 유쾌해 두 다리를 잃은 인간의 절망 또는 좌절이나 권력자로서 가질 수 있는 오만 따위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36세에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전환점을 맞았다.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이던 2003년 이라크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헬기조종사인 덕워스가 소속된 일리노이주 주방위군 헬기부대도 연방군으로 전환시켜 파병했다. 미국은 유사시 현역 연방군의 적정한 국내외 배치 규모를 유지하지 위해 연방예비군이나 주방위군을 선별적으로 연방군으로 전환한다.

당시 주방위군 육군 조종사였던 덕워스 의원은 노던 일리노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간호대에서 공중보건과 암을 발생시키는 환경적 요인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미군이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을 체포한 직후인 2004년 파병됐고, 이해 11월 지상에서 발사된 ‘휴대용 로켓추진식 수류탄’(RPG)이 그가 조종하던 UH-60 블랙호크 헬기를 맞히고 터지면서 두 다리를 잃고 오른팔에도 중상을 입었다.

태미 덕워스 의원과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덕워스 의원을 재향군인부 차관보로 임명했고, 이번 상하원 선거에서도 적극 지원했다. ⓒphoto AP
태미 덕워스 의원과 오바마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덕워스 의원을 재향군인부 차관보로 임명했고, 이번 상하원 선거에서도 적극 지원했다. ⓒphoto AP

일생의 나침반 밥 돌 상원의원

그는 이 부상으로 전상훈장(퍼플하트·Purple Heart)을 받았다. 이 훈장은 미국이 전장에서 피를 흘린 군인에게 주는 것으로, 미국인들은 누군가 이 훈장을 받았다면 그가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피 흘린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예우도 한다. 김영옥 대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1개, 프랑스 전선에서 1개, 후에 6·25전쟁에서 1개를 받았던 그 훈장이다.

덕워스 의원과 김영옥 대령을 연결해주는 또 다른 인연의 끈도 있다. 덕워스 의원은 하와이에서 맥킨리고등학교와 하와이주립대를 나왔는데, 2차대전 때 김영옥이 이끌어 아직까지도 미군 역사상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부대로 남아 있는 미 육군 100보병대대를 이뤘던 재미 일본계 2세 다수가 이 고교 출신이고 이 대학 출신이다. 2차대전 때 육군소위로 이탈리아에서 싸우다 오른팔을 잃은 고(故) 대니얼 이노우에 연방상원 군사위원장(민주·하와이)도 이 고교와 이 대학 출신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2차대전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됐기 때문에 하와이는 2차대전에 대해 남다른 역사적 소회를 갖고 있으며 100보병대대는 지금도 살아 있는 전설이자 자부심이다. 이로 인해 의식 있는 맥킨리고교나 하와이대 출신들은 더욱 이 부대를 자랑스러워하고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한다. 김영옥과 덕워스는 생전에 만난 적은 없으나 이들의 인연은 이미 오래전 시작됐는지 모른다. 태국 출생인 덕워스 의원이 김영옥 관련 사안에 적극적인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 다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점과 함께 그의 정치철학이 김영옥과 마찬가지로 ‘원칙적 정의 추구’에 있다고 본다.

이라크전쟁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중상을 입은 덕워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월터리드(Walter Reed) 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2006년, 일생의 나침반을 만난다. 199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밥 돌 전 연방 상원의원(공화·캔자스)이다.

밥 돌 의원 역시 육군소위로 2차대전에 참전했고, 김영옥(당시 대위)이 이탈리아를 떠난 지 약 8개월 후인 1945년 이탈리아에서 등과 오른팔에 독일군 기관총탄을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전쟁영웅이다. 한국인에게는 밥 돌 의원이나 연방 상원의원(공화·노스캐롤라이나)을 지낸 부인 엘리자베스 돌 전 미국 교통부 장관의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미국인에게 이들 부부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인물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앞차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았음을 뒤차에 알려주는 정지등도 엘리자베스 돌의 작품이다. 이 때문에 이 정지등을 엘리자베스 돌의 애칭인 ‘리디(Liddy)’를 따서 ‘리디등(Liddy Lights)’이라 부르기도 한다.

밥 돌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빌 클린턴 후보에게 패하자 대권의 꿈을 접고 깨끗이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10년 후 미국 최고의 군병원으로 꼽히는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일자 조지 부시 대통령은 밥 돌을 월터리드 육군병원 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던 덕워스는 올바른 정치의 힘을 절감했다. 입원해 있으면서 병원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꼈던 덕워스는 밥 돌을 통해 정치가 어떻게 정의를 구현하는지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덕워스는 바로 그해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민주당 후보가 되기는 했으나 경쟁자인 피터 록삼 공화당 후보에게 패했다. 이 선거에서 밥 돌 의원은 같은 공화당 소속인 록삼 후보를 지지하며 힘을 실어줬다. 덕워스는 개인적으로 섭섭할 수도 있었으나 “돌 의원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주저 없이 밝힌다. 밥 돌 역시 자서전 서문에서 책을 바치는 대상에 덕워스를 포함시켰다. 상대를 인정하고 대우함에 있어 정치적 입장, 나이, 성별, 인종 같은 것들은 이들에게 문제되지 않았다.

정계를 향한 첫 도전에 실패한 덕워스는 일리노이주 재향군인국장으로 민간인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중증 상이군인이기 때문에 명예제대를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일리노이주 주방위군에 남아 훈련에도 계속 참가했다.

재향군인국장 시절 덕워스는 퇴역군인, 특히 상이군인의 복지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퇴역군인을 고용하는 고용주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제도도 만들고, 퇴역군인의 주택난 개선이나 참전용사의 심리적 전쟁후유증 치료를 위한 의료정책 등을 폭넓게 추진했다. 일리노이주에 미국 최초로 시행한 퇴역군인 복지정책이 많은 것도 덕워스 덕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정부를 무대로 활동했던 덕워스는 이 무렵 어느 날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자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을 후원자로 얻게 되니 바로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연방 상원의원(민주·일리노이)으로 있다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2009년 취임하자마자 덕워스를 재향군인부 차관보로 임명했다. 전장에서 두 다리를 뺏으며 덕워스를 무너뜨리려 했던 불운은 그의 신념과 의지 앞에 갑자기 모습을 바꿔 대통령을 후원자로 선물하는 행운으로 변했다. 덕워스의 운도 오바마의 선구안도 좋았지만 이로써 미국은 걸출한 여성 지도자 한 명을 맞을 본격적 준비를 마쳤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의 행운이었다.

이에 따라 덕워스는 활동 무대도 연방정부 차원으로 격상되면서 전국적 인지도를 지니는 유명인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일럿 덕워스의 비상 무대도 전장의 하늘 대신 본격적인 행정적·정치적 영역으로 바뀌었다.

‘역경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는 말은 덕워스 같은 인간을 두고 하는 것 같다. 덕워스는 1968년 태국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공장근로자였던 아버지는 미국 시민권자였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덕워스는 아르바이트, 연방정부 장학금, 학자금 융자를 묶어 하와이주립대를 힘들게 마쳤다. 이후 조지워싱턴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국제관계론)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한때 로터리인터내셔널에서 아·태 지역 로터리클럽 담당 행정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최근에 카펠라대학에서 휴먼서비스(Human Service)로 박사과정도 마쳤다.

말하자면 그는 요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흙수저’의 전형이지만 모든 역경을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되는 내공을 성장기부터 쌓은 셈이다.

이번 선거를 한 달 남긴 시점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슈즈(Shoes)’ 라디오에서 그를 위한 지지연설을 할 때도 그가 ‘흙수저’이기 때문에 우리들 가정에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며 “정치인을 잘 뽑는 것이야말로 실로 중요하다. 우리 전체를 위한 싸움을 결코 멈추지 않을 탁월한 지도자 덕워스 후보를 선출해달라”고 당부했다.

오바마는 2005년부터 일리노이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있다가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원의원직을 내놨고 아직도 대통령으로서 인기가 좋다. 임기가 불과 3개월도 남지 않은 8년 차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대통령 이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오바마 사전에는 레임덕이 없다. 그러니 일리노이주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오바마의 “내가 갖고 있던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계승할 적임자는 덕워스”라는 선언적 지지가 천군만마가 됐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재향군인부 차관보로서 덕워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했고 정책화했다. 미국 재향군인부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신설한 소셜미디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부서도 그 덕택이다.

덕워스는 2012년 연방 하원의원에 재도전해 정계 진출의 꿈을 이뤘다. 하원의원이 되면서 정책적 관심 분야도 여성·가족·학생·중소기업 등으로 확대됐고 2014년 선거를 앞두고 23년 복무한 주방위군에서 육군 중령으로 전역하고 재선에 성공했다. 현재 하원에서는 군사위원회와 행정개혁위원회 소속이다.

2011년 시카고 인터내셔널 아킬레스 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하는 덕워스 의원. ⓒphoto AP
2011년 시카고 인터내셔널 아킬레스 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하는 덕워스 의원. ⓒphoto AP

그는 연방 하원의원이 되자마자 미국 정부가 채무를 줄여야 한다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세비를 8.4% 삭감해 연방 재무부에 귀속시켰다. 이뿐 아니라 의원 생활 첫 3년 동안 당연히 쓸 수 있는 의원실 유지비를 절약해 약 37만달러를 연방 재무부에 돌려줬다.

그는 미국 역사상 여성 장애인 연방 하원의원 1호, 태국 출생 연방 하원의원 1호, 일리노이주에서 선출된 아시아계 여성 연방 하원의원 1호라는 3관왕의 명예와 함께 신데렐라가 됐다. 이에 앞서 그가 갖고 있던 1호 기록이 하나 더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장에서 팔다리 가운데 2개 이상을 잃은 여군이라는 안타까운 기록이었다. 여기에 이번에 태국계 연방 상원의원 1호라는 빛나는 기록을 추가했다.

덕워스의 합류로 미국 상원은 아시아계 여성이 3명으로 늘게 됐다. 한 명은 2012년 당선된 일본계 매지 히로노(민주·하와이), 나머지 한 명은 역시 이번에 당선된 카말라 해리스(민주·캘리포니아)이다. 미국 정계 최상층부에서 보여지는 아시아계 여성 정치인의 눈부신 약진이다.

이번 승리로 덕워스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물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이전투구 속에 미국인들은 백악관·상원·하원을 몽땅 공화당에 안겨주면서도 민주당 소속인 덕워스는 뽑아 진흙탕에서도 보석을 건지는 현명함을 과시했다.

공화당이 싹쓸이한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덕워스의 경쟁자는 현역인 마크 커크 연방 상원의원(공화·일리노이)이었는데, 유권자의 선택과 관련해 이들의 대결 과정에 눈여겨볼 장면이 있다. 덕워스는 2014년 11월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2016년 선거에서 현직인 커크 연방 상원의원에게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본인도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커크 의원(예비역 해군중령)으로서는 이제 갓 재선에 성공한 애송이 하원의원이 현역 상원의원인 자신에게 도전장을 던졌다는 뉴스에 코웃음이나 쳤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덕워스는 올해 초 민주당 경선을 통과해 민주당 후보가 됐고, 총선을 2주쯤 앞두고 커크와 TV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덕워스가 토론에서 과거 자기 집안 어른들이 미군에 복무했던 사실을 언급하자 커크가 빈정거렸다. “당신 조상이 조지 워싱턴과 함께 싸우기 위해 머나먼 태국에서 미국까지 왔다는 사실을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소.” 이 발언은 명백한 인종차별이었고 미국 최대 인권·민권단체이면서 합법적 로비단체인 ‘인권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은 커크 지지를 철회하고 덕워스 지지를 천명했다. 당황한 커크가 자기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호소했으나 기차는 이미 떠난 다음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도 앞으로 덕워스 의원을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미국에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영향력은 조금 과장해 하늘과 땅 차이다. 양원제인 미국에서 상원과 하원은 무게가 같으나, 의원 각각의 영향력에서 하원의원은 상원의원의 상대가 아니다.

상원의원이 100명, 하원의원이 435명(표결권 지닌 의원 총수)이므로, 단순히 숫자적으로 보면 상원의원 1명의 영향력은 하원의원 4.35명에 해당한다. 그런데 임기는 상원의원이 6년, 하원의원은 2년이므로, 임기로 보면 상원의원 1명의 영향력이 하원의원 3명에 해당한다. 두 가지를 합산하면 상원의원 1명이 하원의원 13.05명(4.35×3=13.05)의 영향력을 지닌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상원의원에게만 필리버스터 권한이 있다. 이 때문에 예산 편성을 포함해 어떤 법안을 제정하려 하는데 상원의원이 결사반대한다면 그 법안은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이 되는 것도 연방 상원의원이나 주지사로 있다가 되는 경우는 많아도 연방 하원에서 백악관으로 직접 가기는 어렵다.

덕워스 의원의 지금까지 경력은 ‘군복무→참전(중상)→재활→일리노이주 재향군인국장→재향군인부 차관보→연방 하원의원→연방 상원의원 당선’이고, 현재도 하원 군사위원이다. 그러므로 내년 초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새 의회가 개원하면 상원 군사위원으로 활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그가 태국어와 인도네시아어에도 능하다는 사실은 그가 태생적으로 동아시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핵 문제, 전시작전권 문제 등 국가안보와 관련해 한국이 덕워스 의원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덕워스 의원은 육군소령으로 역시 이라크전쟁 참전용사인 남편과 사이에 3살 된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그는 요즘도 틈틈이 민간비행기를 조종하기도 하고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마라톤도 수차례 완주했다. 지난 10월 만났을 때도 “조만간 있을 자선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요즘 체력관리를 제대로 못해 걱정”이라며 웃었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다.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뒤로한 채 이번에도 스스로 휠체어 바퀴를 애써 돌리며 공항을 향해 서둘러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두 다리를 잃었다면 저렇게 못 했을 것이다. 미국의 전성기는 앞으로도 계속되겠구나, 적어도 당분간은. 저 정치인이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권력자의 저런 모습을 한국인들이 직접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태미 덕워스 의원이 지난 11월 9일 상원의원 당선 확정 직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

I will be the next senator from Illinois! This victory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your support - thank you.

Twelve years ago this Saturday, a rocket-propelled grenade ripped through the cockpit of the helicopter I was copiloting over Iraq. I survived only because my buddies refused to leave me behind.

Every day since I woke up at Walter Reed, I try to be worthy of my crew and of the miraculous second chance they gave me. And just as I try to be worthy of the sacrifice they made for me, I will go to work in the Senate looking to honor the sacrifice of all Americans who are facing challenges of their own.

After all, this nation didn’t give up on me when I was at my lowest moment, and I believe in an America that doesn’t give up on anyone who hasn’t given up on themselves.

제가 다음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이 승리는 당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감사합니다.

오늘로부터 12년 전, 이라크 상공을 비행하던 한 헬리콥터로 발사된 RPG 한 발이 제가 탄 조종석을 찢어놓았습니다. 제가 살아남은 것은 오직 제 동료들이 저를 남겨놓고 가지 않은 덕분입니다.

월터리드(미 육군병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후 저는 매일 제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저에게 선물한 기적 같은 시간을 위해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상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도전에 직면한 모든 미국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일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는 제가 가장 힘든 순간에 처해 있었을 때 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나라, 아메리카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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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성 재미언론인 / 김영옥 평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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