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 왼쪽부터 김광림, 조원진, 이정현, 이장우.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 왼쪽부터 김광림, 조원진, 이정현, 이장우. ⓒphoto 뉴시스

“종이박스로 쌓아올린 정권이었다.”

최순실(60)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정권이 초토화한 상황을 빗대 새누리당의 한 친박(親朴)계 의원이 한 말이다. 큰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조그만 외력(外力)에도 찌그러지는 종이박스로 쌓아올린 것처럼 현 정권의 친박세력이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민적 분노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적 가치나 철학을 중심으로 뭉친 게 아니라 ‘박근혜 브랜드’를 추종하며 폐쇄적인 계파 이익을 추구해온 친박계의 한계가 최순실 사태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주류 일각에서 탈당 요구를 받고,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당내 비주류 세력으로부터 사퇴를 요구받고 있지만 속수무책인 상황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2004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에 당선되면서 정치적 실체로 등장한 친박 세력이 박 대통령의 실패와 함께 소멸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퇴진 요구에 버티는 이정현

최순실씨 국정농단 의혹은 지난 7월 말 TV조선이 미르재단 모금과 관련한 의혹을 처음 보도하면서 불거졌다. 미르재단이 대기업으로부터 수백억원의 출연금을 거두는 과정에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개입했다는 보도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정치 쟁점이 되면서 미르재단 관련 의혹이 지금 같은 대형 게이트로 번질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은 정치권에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9월 국회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다시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한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지난 10월 24일 한 방송이 “최순실씨 취미는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것”이란 고영태씨 증언을 보도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후 TV조선이 최씨가 서울 강남의 한 비밀 의상실에서 대통령의 의상 제작을 지시하는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 언론의 각종 보도가 이어지면서 박 대통령은 두 차례(10월 25일, 11월 4일)나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불과 보름 사이에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지지율 최저치인 5%(11월 3일 한국갤럽 조사)까지 떨어졌다.

그 사이 친박계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새누리당 지도부를 구성한 이정현 대표를 비롯해 조원진·이장우·김광림·최연희 최고위원 등은 사실상 지도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김무성 의원을 필두로 한 당내 비주류 의원들이 이 대표 퇴진을 요구하며 구당(救黨) 모임 결성에 들어갔고, 비주류 일각에선 “강성 친박들은 당을 나가라”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전당대회에서 친박계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이 대표 등 친박 지도부가 불과 석 달 만에 퇴진 요구에 내몰린 것이다. 이정현 대표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사퇴 요구에 ‘선(先)사태 수습, 후(後)거취 결정’으로 맞서며 “시간을 좀 달라”고 하고 있다. 당 비주류들이 이 대표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고 탈당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상황에서 일단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이다.

이 대표의 이런 정치적 위기는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다. 호남(전남 곡성) 출신의 민정당 당직자로 정치권에 들어온 이 대표는 영남 출신 엘리트가 다수를 점한 현 여권에선 ‘비주류 중의 비주류’다. 그런 그는 2004년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박 대통령을 만나 그의 대변인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여권 주류 질서에 몸을 실었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거쳐 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홍보수석을 맡으면서 ‘박근혜의 복심(腹心)’으로까지 불리는 위치에 올랐다. 호남에서 지역구 재선(19·20대)을 하고 지난 8·9 전당대회에서 집권당 대표로 당선되면서 정치 이력의 절정을 맞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박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데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진박(眞朴) 마케팅’을 주도하고 참패한 최경환 의원이 핀치에 몰리면서 친박계가 이 대표를 대안(代案)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됐다. 박 대통령과 ‘영남 중심 친박 주류’ 그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가 이번 사태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 대표는 박 대통령과 친박계가 최순실 사태로 인한 위기의 바닥을 치고 나면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크다. 일종의 ‘박근혜 호위무사’이자 ‘친박의 방어막’으로 정치적 운명을 다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물밑에서 사태수습하는 최경환

이정현 대표가 무대 위에서 박 대통령과 친박계를 향해 쏟아지는 퇴진 요구의 총알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면 최경환 의원(경북 경산)은 물밑에서 사태 수습을 지휘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최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친박 핵심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이후 지난 총선에서 친박계가 내세운 ‘진박 마케팅’을 주도한 것도 최 의원이었다. 하지만 공천 파동으로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2당으로 전락하면서 최 의원도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애초 총선 승리를 발판 삼아 8·9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도전하려던 계획도 ‘최경환 책임론’ 앞에서 접어야 했다.

그런 최 의원은 최순실 사태 이후 청와대와 여권 친박계의 대응을 물밑에서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1차 대국민 사과를 한 지 사흘 뒤인 지난 10월 28일 최 의원은 청와대로 들어가 박 대통령과 독대했다. 박 대통령과 최 의원은 이 자리에서 사태 수습 방안을 논의했고 그 일환으로 총리와 3개 경제부처 장·차관 교체 등 개각(기획재정부·미래창조과학부·금융위원회), 청와대 비서실장·정무수석·민정수석 교체 등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한 친박계 관계자는 “당시 박 대통령이 사실상 확정한 입각 후보 Y·C·L씨 등은 그 주 주말인 30일(일요일)쯤 발표하려 했지만 정치권에서 거국내각 주장이 나오면서 결국 백지화됐다”고 전했다.

최 의원은 또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과 앞으로 정국 그림을 그리는 한편 친박계 와해를 막는 데도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새누리당 의원 129명 가운데 친박계는 70여명 정도로 분류된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 이후 일부 친박계 당직자들이 지도부 퇴진 요구에 뜻을 함께하며 사퇴했고 범친박 성향 의원 일부는 비주류의 구당 모임에도 가담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현 상황이 지속하면 친박계 와해는 시간 문제”라며 “최 의원이 김병준 총리 후보 카드를 사실상 접고 야당이 요구하는 국회 추천 총리를 수용하는 방안 등을 고리로 정치적 반전수를 노리면서 지지층이 재결집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전략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안 보이는 친박 실세들

친박계 출신 김재원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최순실 사태로 임명 넉 달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TK(대구·경북) 재선(17·19대) 의원 출신인 그는 최경환 의원 등 친박 핵심들과 가깝다. 공천을 받지 못한 18대 국회 때는 원외(院外)에서 박 대통령의 법률대리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땐 최순실씨 검증 관련 일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그는 새누리당 총선 참패 직후인 지난 6월 정무수석에 발탁돼 임기 말 박 대통령의 국정 기조 전환을 모색했다. 지난 10월 24일 박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改憲) 카드를 던진 것도 김 수석 작품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최순실 사태의 파장을 예상한 김 수석의 반전 카드 아니었느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결국 최씨 사태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밖에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서청원 의원 등 친박 원로 그룹도 공개적으로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김기춘 전 실장은 ‘기춘군’으로 불릴 정도로 현 정부 청와대의 실세로 꼽혀왔지만 최순실씨와의 친분설 등에 휘말린 상태다. 서청원 의원도 20대 국회 들어 유승민 의원 복당 사태나 정세균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원연설 파동 등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이번 사태에선 여파가 워낙 크다 보니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대통령을 사석에서 ‘누님’이라 부른다고 알려진 윤상현 의원도 조용하다. 친박 관계자는 “상당수 진박계 의원들이 지난 총선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정치적 상처를 입다 보니 지금 상황에서 나서는 게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 상황 아니냐”라고 했다.

반전이냐 소멸이냐

하지만 친박계 내에선 이번 사태의 여파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서서히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특히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친박 핵심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11월 10일 당 지도부 회의에서 “호들갑 떨지 말고 체계적으로 차분하게 대응을 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면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맹비난했다. 친박계 조원진 최고위원도 “트럼프 당선은 우리에게 여러 숙제를 한 번에 던져준 만큼 국회는 정쟁을 내려놓고 국정 공백을 하루빨리 수습해야 한다”고 했고, 이장우 최고위원도 “트럼프 당선으로 대한민국의 불확실성이 굉장히 커진 만큼 모든 구성원이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윤상현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트럼프 신행정부에서의 한·미 외교­-경제관계 전망 세미나’까지 열었다. 그는 이날 기자들에게 박 대통령 탈당 문제에 대해 “정당 가입과 탈퇴를 강요할 수는 없다.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고 했고, 이 대표 등 당 지도부 퇴진 요구에 대해 “이 대표가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게 순서”라고 했다. 한 친박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는 검찰 수사에 맡기고 국정을 정상화하자는 여론도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만큼 친박계도 뭔가 움직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조금씩 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년 대선 과정에서 친박계는 어떤 식으로든 와해 국면을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친박계는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 120석을 얻어 보수층의 ‘구세주’로 떠오르면서 정치적 실체로 등장했다. 이후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이명박 대통령의 친이(親李)계와 맞서면서 조직적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2008년 총선에서 친박 학살 공천에 이어 ‘친박연대’ 돌풍이 일면서 결집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박 대통령 개인을 중심으로 뭉친 데다 뚜렷한 자파(自派) 차기 대선주자를 갖지 못한 터라 박 대통령 퇴임 이후엔 분화(分化) 내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최순실 쓰나미’를 맞으면서 친박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친박계가 영입 가능성을 거론해온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번 사태로 친박계와 함께할 가능성이 작아지면서 이들은 정치 세력으로서 ‘단종(斷種)’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경운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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