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8일 독일 뒤셀도르프 카니발 퍼레이드에 등장한 트럼프를 풍자한 인형. ⓒphoto 위키피디아
지난 2월 8일 독일 뒤셀도르프 카니발 퍼레이드에 등장한 트럼프를 풍자한 인형. ⓒphoto 위키피디아

“나토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중요하다. 미국이나 유럽이 독자 노선을 걷는 것은 절대 답이 될 수 없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이 지난 11월 12일 영국의 일간지 옵서버에 게재한 기고문의 일부 내용이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나토 무용론’을 제기하자 이에 반박하는 기고문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안보 협력을 강조했다. 도널드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오늘날 어떤 나라도 고립으로 강해질 수는 없다”면서 “유럽과 미국은 가능한 한 긴밀히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미국은 더는 유럽 국가들을 공짜로 보호할 수 없다”면서 “유럽 국가들이 안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유럽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주장하며 나토 동맹 무용론까지 거론했다. 심지어 트럼프는 나토의 한 회원국이 공격받을 경우 다른 회원국들이 자동으로 군사 개입하는 나토 협약 제5항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트럼프는 “발트3국 등 유럽에서 나토군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이들이 미국에 자신들의 할 바를 다했는지 따져본 뒤에 도움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나토 협약 제5항은 2001년 국제테러조직인 알 카에다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빌딩을 공격한 ‘9·11테러’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당시 나토군도 함께 참전하면서 단 한 번 발동된 적이 있다. 나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주도해 1949년 창설한 집단 군사동맹체제이다. 현재 미국과 캐나다 및 유럽 26개국 등 모두 28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트럼프가 나토 무용론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보다 방위비 분담금 때문이다. 트럼프의 주장은 나토 회원국들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최소 2%를 국방예산으로 투입해야 한다는 나토 협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오랜 불만을 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의 국방예산은 2530억달러(GDP 1.43%)였지만 미국은 6180억달러였다. 실제로 현재 나토 협약을 이행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 영국, 폴란드, 에스토니아, 그리스 등 5개국밖에 없다.

미, 안보 무임승차 유럽에 불만

유럽연합(EU)의 28개 회원국 가운데 영국을 포함해 22개국이 나토 회원국이기도 하다. EU의 양대 축인 독일과 프랑스는 GDP의 1.2%와 1.8%만 국방예산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나토 국방비의 75%를 부담하고 있다. 이 때문에 트럼트의 주장은 표현의 방식과 정도만 다를 뿐 2000년대 이후 미국 정치권에서 계속 제기되던 문제였다.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은 국방예산을 삭감하면서 미국의 분쟁 개입에 휘말리는 것을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유럽의 국방예산 감축은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다. 대표적 사례가 2011년 유럽 주도의 리비아 공습을 들 수 있다. 당시 공습에 참가했던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며칠 만에 비축했던 폭탄이 바닥나 미국으로부터 정밀유도폭탄을 지원받아야 했다. 공습 계획을 수립해 리비아 방공망을 제거하고 리비아 영토에 침투해 공습 표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미군이 대신 나서야만 했다.

EU 회원국들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합병하고 동유럽으로 군사력을 확대하자 상당한 안보 위협을 느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경기침체 등을 이유로 군사비 증액을 꺼려왔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 국가들이 안보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셈이다.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며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을 압박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7월 나토 정상회의에서 “나토 회원국들이 GDP의 2% 국방비 지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서 “나토 회원국들이 미국의 핵우산에만 기대려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트럼프가 이런 유럽 국가들에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선언하며 “더 이상 공짜 점심은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발언이 그대로 이행된다면 2차 대전 종전 이후 유지돼온 미국과 유럽 간의 대서양동맹 체제가 깨질 수도 있다. 대서양동맹 체제로 구축된 이른바 ‘서방(The West)’의 분열은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와 안전에도 이롭지 못하다.

미국과 유럽은 그동안 안보 문제를 놓고 상당한 갈등을 표출해왔다. 이 때문에 오죽하면 미국은 화성에서 온 사람처럼, 유럽은 금성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실제로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이라크 침공 문제를 놓고 미국과 유럽은 격렬하게 대립했었다. 2003년 1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 당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독일과 프랑스를 가리켜 “두 나라는 더 이상 유럽을 대표하지 않는다”면서 “그들은 늙은 유럽”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맞서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최강대국이 자국 이익을 군사력 사용의 결정 기준으로 삼을 경우 국제질서가 기능할 수 없다”면서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다.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외무장관도 “평화적으로 이라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의 이런 반대를 무시한 채 ‘일방주의’로 치달았다. 당시 양측의 갈등에 대해 로버트 케이건 카네기 국제평화기금 수석연구원은 저서 ‘낙원과 권력에 관하여(Of Paradise and Power)’에서 “금성 출신인 유럽인은 영구평화의 몽상에 매달려 있는 반면 화성 출신인 미국인은 세계 정치의 엄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의 핵심 이론가인 케이건은 “미국과 유럽은 세계 문제에 공통의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결국 미국이 세계질서 유지의 책무를 혼자 떠맡을 수밖에 없다”면서 “유럽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라”고 주장했다.

나토 28개 회원국들이 지난 7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나토 28개 회원국들이 지난 7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유럽, 트럼프에 대한 반감 노골적 표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면 앞으로 미국과 유럽이 또다시 화성과 금성처럼 불협화음이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부시 전 대통령 때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임했지만, 트럼프의 경우 미국은 이제는 보안관을 못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유럽 안보 상황을 볼 때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라는 방패가 절실한 입장이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적극 나서서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방위비를 더 많이 부담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혼자서 피를 흘릴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또 유럽 안보를 지원하는 대가로 글로벌 현안 대응에서도 유럽 국가들에 더 많은 참여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 국가들은 그동안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해왔다. 이슬람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도 참가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재건사업에도 팔을 걷고 나서고 있지만 앞으로 미국이 제시할 요구는 지금보다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유럽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근본적 수준에서 차이는 있지만 지구상에서 미국과 유럽처럼 다른 지역에서 같은 가치 체계를 공유하는 대륙은 없다. 그런데도 미국과 유럽 간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유럽 주류 정치권과 지도자들은 트럼프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트럼프에게 보낸 당선 축하 메시지에서 “독일은 출신, 피부색, 종교, 성별, 성적 취향,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민주주의, 자유, 법 존중,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미국의 새 정부와 긴밀히 협력 관계를 맺길 바란다”고 밝혔다. 선거 기간 내내 막말을 일삼으며 인종차별주의와 혐오정서를 자극했던 트럼프에게 일침을 날린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이어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거대국가(미국)를 통치하는 지도자는 전 세계에 대한 책임도 따른다”면서 미국의 국제사회 역할론을 강조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미국 대선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열었다”면서 “미국의 대선 결과는 프랑스가 더 강해지고 유럽은 더 단합해야 한다는 걸 보여줬다”고 밝혔다.

경제·난민·기후변화 등 입장 차 커

미국과 유럽은 안보 이외에 경제, 난민, 기후변화 등 다른 부문에서도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경제 분야의 최대 현안은 세계 1, 2위 경제권인 미국과 EU를 하나의 자유무역지대로 묶는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의 체결 여부이다. TTIP가 체결되면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대가 탄생한다. 양측은 2013년부터 협상을 진행해왔지만 현재는 교착 상태이다. 양측이 협상을 재개하더라도 트럼프가 TTIP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기 때문에 난항이 예상된다. 또 미국이 자국의 입장을 더욱 강력하게 내세울 것이 분명해 타결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독일과 프랑스가 EU를 내세워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이라크 등 중동 지역의 무슬림 난민들을 수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트럼프는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에 대해 “완전히 엉망진창”이라면서 “좀 똑똑해져야 한다”고 지적했고, IS의 테러 공격을 잇달아 겪은 프랑스에 대해선 “난민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무슬림 난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다. 트럼프는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규정하면서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혀왔다. 반면 EU는 기후변화협약 체결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해왔다. 지난해 말 파리에서 195개국이 서명했던 기후변화협약은 이미 지난 11월 4일 발효됐다. 협약 당사국은 3년간 파리 협약에서 탈퇴할 수 없고, 그 이후 탈퇴 의사를 밝혀도 1년간 공지 기간을 둬야 하기 때문에 트럼프가 임기 중 파리 협약에서 탈퇴하기는 어렵다. 대신 트럼프는 파리 협약에 규정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무시할 수 있다. 이 경우 EU는 기후변화와 연계한 보복관세 도입을 확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EU는 정면충돌할 수도 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미국은 EU와 협력을 통해서만 IS, 난민, 기후변화 등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갈등과 대립을 우려해서 나온 말이다.

트럼프는 또 유럽 주류 정치권에 도전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유럽의 분열을 촉발시키고 있다. 유럽 극우 정당들은 트럼프의 승리를 “극우의 전 세계적 열풍을 예고한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럽 극우 정당들은 기성 정치권에 타격을 준 미국 대선 결과에 고무된 표정이다. 카스 뮈더 미국 조지아대 교수는 “트럼프의 승리는 유럽 극우 정당들에 성공담을 선물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과 독일의 반난민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대안당)은 이민·안보·세계화 문제에서 트럼프와 같은 입장을 보여왔다. 마리 르펜 FN 대표는 “무슬림 이민자와 난민, 테러, 경기침체 등에 분노한 민심을 타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르펜 대표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내년 4월 실시될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나치 독일의 어두운 역사 때문에 극우 정당이 발붙이기 어려웠던 독일의 정치판도 변하고 있다. 대안당은 지난 9월 두 자릿수 득표율로 처음으로 베를린 주의회에 입성하는 등 지방 선거에서 약진하고 있다. 오는 12월 4일 대통령 선거 재투표를 앞둔 오스트리아에선 반이민·반난민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극우 정당인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가 뽑힐 가능성이 높다. 호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극우 정치인이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지난 6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로 한 차례 분열된 유럽은 트럼프의 집권에 따른 극우 정당의 득세로 또다시 쪼개질 수 있다.

아무튼 트럼프의 집권으로 화성인 미국과 금성인 유럽 간의 갈등과 대립이 증폭된다면 서방세계가 몰락하면서 국제질서가 엄청난 지각변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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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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