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0일 미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트럼프내셔널골프클럽에서 취재진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 ⓒphoto AFP
지난 11월 20일 미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트럼프내셔널골프클럽에서 취재진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 ⓒphoto AFP

‘뉴질랜드에서 만날 필요가 없어진 게 천만다행이다. 사냥할 나이도 아니고, 거기 맛있는 집도 드물 텐데 참 잘됐다. 축하한다.’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이 시야에 들어오던 지난 11월 9일 오후 1시 내가 딕 모리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딕 모리스는 빌 클린턴 대통령 당시 정치참모로 활약한 인물이다.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선거 컨설턴트이기도 하다. 나는 과거 딕 모리스를 상사로 모시고 같은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도 있다.

내가 보낸 이날 이메일은 한 달 전 딕 모리스와의 만찬이 계기가 됐다. 지난 10월 초 나는 코네티컷주에 있는 딕 모리스 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와인 몇 잔에 기분이 좋아지자 딕 모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 봐라,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결코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남에 대한 의심이 많기에 비밀주의에 빠져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스타일이다. 미국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나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갈 생각이다.”

그에게 “왜 하필 뉴질랜드냐”고 물으니까 “공기도 좋고 인터넷 속도도 빠르다”는 답이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딕 모리스에게 보낸 이메일은 그때가 기억나서 띄운 것인데, 이메일을 보낸 지 1시간 정도 지나자 답장이 날아왔다.

“미국인의 선택은 정직하고 정확하다. 트럼프는 역사에 남는 강력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은 트럼프 당선을 비이성적인 미국인들이 일으킨 사건 정도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트럼프 당선에 깜짝 놀라는 한국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트럼프 당선을 족집게처럼 예언한 사람은 아니다. 굳이 부연하자면, 대선 전 ‘힐러리가 전부가 아니고 트럼프가 전무가 아니다’란 입장을 견지했다. 솔직히 말하면 개표 당일 CNN이 발표한 ‘힐러리 당선 90% 이상’과 같은 거짓말에 놀아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봤다면 이미 선거 전 트럼프 현상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듯하다. 민주당이 대세인 대도시가 아니라 도시 밖에 사는 미국인들과 5분만 얘기해도 트럼프 현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만,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언이 있다. “두 눈이 있다고 모든 것을 전부 보는 것이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인간이다.” 추측건대 한국은 미국 언론의 80% 이상을 점하는 리버럴 미디어의 프로파간다에 가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선거 이후 미국과 한국의 대다수 언론들은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을 ‘시골 거주, 저학력, 노년층, 백인’이란 말로 상투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리버럴 미디어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종차별적 규정이다. 우습게도 힐러리 지지 저학력 백인의 경우 ‘열심히 일하는 블루칼라 화이트’로 표현된다. 트럼프 지지 백인은 무식한 촌놈이나 꼰대 정도로 취급된다. ‘자유경제(Free Trade)’라는 단어는 힐러리가 주장하는 경제정책의 핵심 슬로건이었다. 미국 미디어는 트럼프를 자유경제에 반대하는 쇄국주의자라 비난한다.

트럼프 경제정책의 핵심은 무엇일까. ‘공정무역(Fair Trade)’이다. 올 한 해만도 2576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낸 중국에 대한 공격 명분으로 등장한 슬로건이다. 정부보조금, 외환, 관세 등과 관련된 공정성이다. 중국과 비슷한 처지의 한국으로서는 힐러리 편을 들겠지만, 투표권을 가진 미국인은 다르다. 힐러리가 자기 편이라 생각한 블루칼라는 자유무역과 공정무역 중 어디를 지지할까. 2016년 새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그 같은 질문과 분위기에 대한 결론이다.

한국에서는 트럼프가 어떤 인물이며,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펴고,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이는 ‘로또 뽑기’ 같은 느낌이다. 서울의 시각에 의해 일방적으로 단정하기 때문이다. 미국발 반(反)트럼프 시위나 트럼프의 미인 딸까지 끌어들인 ‘가십성 악담’은 선거 후에도 연일 등장하는 뉴스다. 싫든 좋든 주인공이 바뀌었는데도 어제의 논리로 내일을 보려 한다는 느낌이다. 트럼프는 단순히 막말을 일삼는 성추행범이나 인종차별주의자로서 설명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선거 기간 동안 언론을 통해 알려진 캐릭터가 아니라 트럼프란 인간 자체의 궤적을 자세히 살펴볼 때 비로소 그의 ‘내일’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지난 7월 발간된 딕 모리스의 저서 ‘아마겟돈’.
지난 7월 발간된 딕 모리스의 저서 ‘아마겟돈’.

힐러리의 절반 선거비용으로 당선

트럼프는 독일계 이민자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에서 독일계는 정치 무대의 이단아로 추락한다. 미국과 유럽의 적이었던 관계로 미국 내 독일계 이민자들은 정치가 아닌 경제 쪽으로 몰려갔다. 이름도 영어식으로 바꿨다. 트럼프는 그 같은 독일계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해낸 인물이다. 뉴욕 출신 비즈니스맨으로 정치까지 석권한 인물이다. 세계적 재벌로 백악관행(行)을 노린 사람은 많았지만, 트럼프는 이례적 성공 사례다. 더불어 힐러리가 이번 선거 기간 중 쓴 선거비용 13억달러의 절반 정도인 7억9500만달러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트럼프다. ‘돈=당선’이 아닌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낸 주역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가 힐러리를 누른 저력을 제대로 이해해야 미래에 대한 조망이 가능해진다.

우스워 보이지만, 필자는 과거 단 5분간 트럼프를 만난 적이 있다. 주간조선 7월 4일자 기고문 ‘내가 만난 트럼프는 달랐다’에서 썼듯이, 단 한 번의 기억에 의존한 주관적 판단이었지만, 트럼프는 감정에 의해 이성을 잃는 캐릭터가 아니었다고 썼다. 고집쟁이 독불장군이 아니라 주변의 공기와 상황을 살피면서 절대로 손해를 안 보는 쪽으로 베팅하는 노련한 비즈니스맨 같았다.

이와 관련 지난 10월 초 자택에서 딕 모리스가 필자에게 해준 얘기를 소개한다. “트럼프는 어릴 때부터 친구다. 트럼프 아버지가 변호사인 나의 아버지에게 세법에 관한 자문을 구했기 때문이다. 우린 나이(70세)도 같다. 플로리다에 있는 나의 별장에 트럼프 호텔이 있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거기서 함께 가족들과 식사도 자주 했다.”

딕 모리스는 트럼프의 대인관계나 사교술이 남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번이라도 만나면 ‘트럼프의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많은 정치가를 봤지만, 대부분 표를 의식해 사람들과 만날 뿐이다. 비즈니스맨 트럼프는 정치가와 다른 스타일로 사람들을 대한다. 소탈하다. 돈 자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이 즐기는 햄버거를 먹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 호텔에서 식사를 함께할 때는 스스로 일어나서 주변에 인사를 한다.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라 진짜 성격이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능숙하다는 것은 여론이나 시류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는 의미다.”

딕 모리스는 트럼프의 배경이나 캐릭터를 미국의 청교도 전통인 동시에 맨해튼 미드타운의 정수(精髓)로 풀이한다.

“맨해튼은 미국의 미래인 동시에 어제이자 오늘이다. 맨해튼을 대략 3등분 할 때 다운타운, 미드타운, 업타운으로 나눌 수 있다. 미드타운은 고전적 의미의 맨해튼인 30번지에서 60번지 정도에 걸쳐진 곳이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다운타운은 그 아래이고, 할렘이 있는 업타운은 그 위다. 경제적으로 볼 때 힐러리의 경우 다운타운을, 트럼프는 미드타운을 기반으로 한 정치가다. 다운타운은 월스트리트를 의미한다. 금융 외환으로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총아다. 활동의 주역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인도·중국·중동 지역 출신의 마이너리티다. 월스트리트에서 사고를 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마이너리티다. 순수 백인은 거의 없다.

이에 비해 미드타운은 트럼프 사업 영역인 부동산에서부터 식품·유통·제약·자동차·석유 같은 기업의 총본부에 해당한다. 육체적으로 땀을 흘리면서 뭔가를 창조해내는 백인 중심의 사업 공간이 미드타운인 데 반해, 월스트리트는 배경이 없어도 머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이너리티 무대다. 자본의 흐름에 의해 부를 축적해가는 글로벌리즘은 월스트리트 스탠더드를 상식화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다면, 월스트리트는 청교도 미국에는 맞지 않는 이단이다. 트럼프는 본래의 청교도 미국 정신에 입각한 인물이다.”

대화 도중 필자는 딕 모리스의 ‘고백’을 통해 트럼프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실 하나도 알게 됐다. 필자가 트럼프와 만났던 5분간에 얽힌 얘기다. “10여년 전 뉴욕 포시즌스호텔 레스토랑에 대만(臺灣·타이완) 손님들이 왔을 때 트럼프와 만났던 것 기억나느냐?” 딕 모리스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는 부인과 식사를 하던 중 딕 모리스와 필자가 식사하던 테이블로 걸어와 따뜻한 인사를 했다. ‘선생님(Sir)’이라는 경칭과 함께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뉴욕 여행을 잘하기 바란다”는 덕담도 했다.

“그때 사실 화장실에서 트럼프와 우연히 만났다. 인사를 나누던 중 내가 트럼프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했다. ‘내 테이블에 중요한 손님들이 왔는데 자네가 와서 분위기를 좀 띄워줄 수 있겠는가? 자네는 대만에서도 유명할 테니까.’ 지금이야 말하지만, 트럼프가 우리 테이블에 온 것은 내 부탁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 친구 나중에 대만으로 진출할 때 당시 손님들과 미리 만났을지 모르겠다. 나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이익이 될 만한 일이라면 체면, 자존심 전부 버리는 것이 트럼프다.”

지난 10월 초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딕 모리스. ⓒphoto 유민호
지난 10월 초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딕 모리스. ⓒphoto 유민호

월가와는 다른 청교도적 인물

딕 모리스의 이런 고백을 들으면서 필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뉴욕 비즈니스맨의 융통성에 감탄했다. 판을 깨지 않고 뭔가를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적극적인 자세다. 죽마고우 딕 모리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의 이익증진을 위해서라면 1인 연극(모놀로그)도 마다하지 않을 인물이 트럼프라 볼 수 있다. 콧대 높은 뉴요커 백만장자의 자존심만 갖고 아시아인에 대한 립서비스를 단칼에 거절하는 식의 캐릭터는 아닌 것이다.

막장 정치인의 이미지와도 어긋나지만, 트럼프는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되고 규칙적인 생활로 단련된 사람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달리 약속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골프를 즐기지만, 오바마처럼 만사 제쳐놓고 골프에 빠지는 성격도 아니다. 비즈니스를 위해 골프를 이용할 뿐이다. 리버럴 미디어가 창조해낸 고집불통 흥청망청 재벌2세가 아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비즈니스 종잣돈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부동산왕 트럼프는 스스로가 개척해 창조해낸 것이다.

세계 역사를 통해 증명됐지만,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하나 있다. 융통성이 있는 한, 판을 깨지 않고 극단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선 이후 트럼프가 주도하는 인사를 보면, 앞으로 펼쳐질 트럼프 정치의 융통성을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라인스 프리버스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위원장을 선임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공화당과 척을 지면서 서로 비난했던 관계지만, 공화당과의 관계증진을 위해 프리버스 위원장을 백악관 참모진의 수장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대선 기간 자신의 정적이었던 미트 롬니를 중용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트럼프의 융통성을 잘 보여준다. 선거 전 우려했던 오바마 케어의 전면 백지화도 예산이 엄청 필요한 부분에 대한 개정 수준에 머물 전망이다. ‘오바마 레거시(Legacy)’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틀은 유지하면서 문제점을 고치는 식이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주한 미군 분담금 문제나 한국의 핵 개발 문제도 선거 운동 당시의 발언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리버럴 미디어는 트럼프가 예측불가능하다고 표현하지만 나는 ‘융통성이 있는 정치가’로 칭하고 싶다. 판을 깨지 않는 한, 설령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전략전술의 일환이다. 이런 트럼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결국 협상 능력 강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상대의 수를 예측불가능하다고 비난하거나 체념하기보다 앞으로 어떤 수가 펼쳐질지를 연구하는 것이 급선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미 대선이 끝난 지 8일 만에 트럼프와 만나는 것도 예측불가능을 예측가능으로 만들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해당한다. 트럼프와 아베 두 사람의 만남을 한국에서는 상견례 정도로 본 듯하지만 한반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한층 더 가속화한 역사적 모멘텀으로 훗날 평가받을지 모른다.

11월 18일, 회동 직전 두 사람의 만남은 일대일 비밀회의 형식으로 결정됐다. 이러한 비밀 회동 테이블에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미래가 중요 의제로 올라갔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시대 동북아 외교의 첫 장을 일본이 열어젖히고 우리는 방관자 비슷하게 되면서 한국이 모르는 사이 한반도의 운명이 남의 손에 결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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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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