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밀간정’ 사건을 보도한 중국 언론.
‘규밀간정’ 사건을 보도한 중국 언론.

“박근혜는 민주주의 사회의 웃음거리인가?” “사건의 근원은 한국의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라 박근혜의 개성 때문에 일어난 것. 이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에는) 권력 균형과 매체들의 자유와 감독 기능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수패금(聖手覇金)’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중국의 국제 원유(原油)시장 애널리스트는 스스로 이런 문답을 하면서 투자 자문 사이트 ‘회예재경(匯譽財經)’에 글을 올렸다.

“2016년 한 해 동안 서방식 민주제도를 시행하는 몇몇 국가들이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것, 중국에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필리핀 대통령으로 두테르테가 당선돼 중국·미국·필리핀 삼각관계에 대역전이 빚어진 것도 그중 하나다. 특히 지금 진행 중인 한국 대통령 박근혜의 ‘규밀간정(閨蜜干政·아주 가까운 여자친구의 국정 간여)’ 사건은 무술(巫術)을 배경으로 한 인물이 박근혜의 정신을 통제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는 기이하다는 느낌까지 주고 있다. 아직 결판이 나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번 사건은 지금도 발효(醱酵) 중이지만, 한국 사회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매체들은 ‘불의불요(不依不撓·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자세로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 원고를 수정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건이 폭로되자 한국 민중들은 여러 차례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생과 교수들은 박근혜의 하야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인들은 자존심이 극히 강한 민족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이 사건을 놓고 ‘치욕스럽다’느니 ‘수치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 필자로서는 한국인들과 이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세밀하게 이 사건을 분석해 보면 사건의 근원은 박근혜의 개성 때문이지, 한국의 민주주의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권력 균형, 언론 자유와 감독 기능, 시민사회의 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모두 긍정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석유시장 애널리스트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배경에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그리 낯선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신(新)민주주의론’이라는 책을 쓴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난 1840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를 둘로 나누어서, 1840년에서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기 까지를 ‘구(舊)민주주의 혁명 시기’, 1919년부터 1949년까지는 ‘신(新)민주주의 혁명 시기’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가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을 ‘구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부르고,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이 일으킨 혁명 시기를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원전 221년에 시작된 진(秦)왕조부터 마지막 왕조인 청(淸)나라까지 2300여년 동안 이어져온 봉건왕조 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출신의 혁명가 쑨원(孫文)이었다. 쑨원은 유가의 경전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천하위공(天下爲公·천하는 공공의 것이다)’이란 개념을 바탕으로 1911년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세우고 임시대총통 자리에 올랐다.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의 자금산(紫金山)에 있는 중산릉(中山陵·쑨원의 무덤)에 가보면 입구 현판에 ‘천하위공’이라는 네 글자가 각인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쑨원은 전국을 다니면서 ‘천하위공’이라는 글귀를 남겼고, 그렇게 해서 쑨원의 삼민(三民·민족, 민권, 민생)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천하위공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나중에 이 중화민국을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건립한 ‘구민주주의 체제’로 분류해 버렸다. 이후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일본군이 산둥(山東)반도 일대의 독일 조차지를 넘겨받자, 이에 항의해 시민과 대학생들이 조직해서 벌인 ‘5·4운동’(1919)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 중국의 정치체제는 “신민주주의를 이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국제사회에서 누구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이끌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굶겨 죽이거나 때려서 죽인 1949년 이후 1976년까지의 마오쩌둥 체제를 민주주의 정치제도였다거나 천하위공의 정신을 이룩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주말마다 벌어지고 있는 시위야말로 마오가 말한 신민주주의나 천하위공의 정신이 실제로 구현된 정치체제라는 점을 중국 지식인들은 귀엣말로 주고받고 있는 중이다. 중국 외교부 겅솽(耿爽) 대변인은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 내용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이 일은 한국의 내부 사무다. 한국 인민들이 관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중국의 신문과 방송들은 연일 매 시간마다 한국의 ‘규밀간정’ 사건을 톱뉴스 또는 세컨드뉴스로 삼아 사태의 진전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사태를 보는 중국의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참으로 괴이한 사건”이라고 말하면서도 “한국 정치적 사태의 원인은 아무래도 한국의 민주주의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개인적 성격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쪽으로 흐름을 정리해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처음으로 상인(商人)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고 말하면서 놀라워하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다”면서 놀라움을 표시한 게 중국이다. 현재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잘 합의하고 정리해서 풀어나간다면 한국 정치는 또다시 중국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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