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신화·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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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불허 상황이 됐다. 하지만 반기문의 정치 참여 의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12월 말 퇴임을 앞둔 반기문(72) 유엔 사무총장의 핵심 측근이 최근 국내 정치권 인사에게 한 말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내 정세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요동치면서 반 총장의 정치 참여 가능성을 놓고 일각에서 회의론이 제기되는 데 대한 답변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반 총장의 의지를 궁금하게 할 정도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전후 그의 출마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 상황이 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 총장 대선 출마의 레드카펫이 될 것으로 예상됐던 여권이 최순실 사태로 초토화됐기 때문이다. 내년 1월 귀국하는 반 총장은 과연 대선 출마를 선택할 것인가, 또 출마한다면 새누리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제3·4지대에 둥지를 틀 것인가. 반 총장이 지금 그리고 있을 정치적 그림에 국내 정치권의 눈이 쏠리는 이유다.

악재 만난 반기문

반 총장은 12월 31일 유엔 사무총장직에서 퇴임한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된 지 10년 만이다. 그런 반 총장은 일찌감치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국내 정치 참여 가능성이 예상돼왔다. 한국인 출신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이자 연임에 성공한 경력은 국내에서 높은 대중 지지를 만들어냈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정치권과 그의 고향인 충청권에서 ‘반기문 대망론(待望論)’으로 이어졌다. 그 자신의 입으로는 한 번도 대선 출마 등 정치 참여를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반 총장은 퇴임이 임박한 요즘 “내년 1월 중순 귀국해 한국 시민으로서 어떻게 한국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최선일지 의견을 청취하고 고려할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반 총장이 올해 들어 반복하고 있는 원론적 입장이지만 정치권에선 최순실 사태 와중에도 내년 1월 귀국 이후 반 총장의 선택을 둘러싼 전망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반 총장의 대선 의지가 한풀 꺾인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지만, 다른 쪽에선 “오히려 반 총장이 홀가분하게 정치 참여를 결심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엇갈린다.

반 총장의 정치적 선택을 전망하기 어렵게 하는 이유는 국내 정치 환경이 최근 급변했기 때문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가 그것이다. 현 여권 세력의 총체적 붕괴를 갖고 온 최순실 사태는 반 총장에게도 악재란 분석이 많다. 반 총장은 지난 5월 한국 방문을 계기로 각종 대선주자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올라서며 뚜렷한 차기 대선주자가 없는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로 주목받았다. 박 대통령과 각종 국제행사 때마다 마주치며 우호적 관계를 이어온 데다, 그를 지지하는 지역·계층 등 지지율 구성이 몰락 전의 박 대통령 지지층과 거의 겹쳤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린 30%에 달하는 박 대통령 지지층은 그에게 정치적 종잣돈이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난 10월 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란 초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박 대통령과 현 여권 세력은 몰락 직전의 상황에 내몰렸고 그의 지지율도 동반 하락하며 타격을 입었다. 지지율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역전돼 2위로 내려앉았다.

실제 최순실 사태가 터진 지난 10월 이후 뉴욕 유엔본부와 한국에 있는 반 총장의 주변 그룹에선 반 총장의 대선 참여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 강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여권 인사의 말이다.

“반 총장이 지난 5월 방한했을 때 일이다. 그가 첫날 일정을 마치고 머문 제주도의 한 호텔에는 밤늦도록 반 총장이나 측근 그룹을 만나려는 정치인과 전직 외교관들로 북적였다. 그날 현장 분위기로만 봐선 ‘신드롬’ 직전 상황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모두 반기문의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기대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 총장 참모들의 걱정이 커졌다. 주로 외교관 출신들이 주류인 반 총장의 측근 그룹에선 조율되거나 준비되지 않은 돌발 상황에 익숙지 않은 편이다. 이들이 최순실이라는 악재를 만나자 ‘과연 반 총장이 이 파고를 뛰어넘고 대선에 출마할 수 있을까’ 하며 흔들리는 건 분명하다.”

이 관계자는 “레드카펫 깔린 화려한 연회장에서 열리는 고급 와인을 곁들인 우아한 저녁 자리에나 어울릴 법한 외교가에 익숙한 반 총장 측근 그룹에선 지금의 한국 정치 상황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몸으로 던져 쟁취해야 하는 권력의 세계에서 대형 돌발 변수를 만나자 다소 ‘디프레스(depress)’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16일 에콰도르 키토에서 열린 세계 시장총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지난 10월 16일 에콰도르 키토에서 열린 세계 시장총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사실상 캠프 구성 들어가

하지만 반 총장 측의 한 인사는 “반 총장 주변의 이런 분위기는 이것저것 여러 변수를 고려한 뒤 결행하는 외교관 특유의 신중함 때문이지 반 총장 본인의 의지가 꺾인 건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 반 총장의 이런 의지를 방증하듯 그의 주변 인사 사이에선 지난 11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반기문 귀국 이후’에 대비한 실무 준비에 나섰다.

실제 반 총장 측근 인사들은 최근 국내 정세를 분석하며 반 총장이 귀국해 내놓을 첫 메시지, 귀국 후 첫 한 달 동안의 일정을 준비하는 등 사실상 캠프 구성 준비에 들어갔다. 반 총장의 국내 대리인 격으로 꼽히는 김숙 전 유엔대사는 서울 광화문에 사무실을 두고 일찌감치 그의 귀국에 대비한 전체적 전략 프레임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노신영·한승수 전 총리, 유종하 전 외교부 장관 등 외교관 시절 반 총장을 발탁했던 외교 원로들도 후방에서 반 총장을 직간접으로 후원하고 있다. 최근엔 반 총장과 친분이 깊은 예비역 고위 장성을 중심으로 한 그룹도 전략팀을 구성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반 총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일부 인사는 반 총장과 국제전화와 이메일 등을 통해 수시로 국내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며 “반 총장은 그동안 주로 듣는 쪽이었는데 최근엔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반 총장의 의중도 국내 지지그룹에 내려오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반 총장의 측근인 김원수 유엔 사무차장이 지난 11월 중순 한국을 다녀간 것도 주목받고 있다. 김 차장은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나선 2006년 외교부 소속으로 ‘반기문 선거운동 특별대사’를 맡은 이래 지금까지 반 총장을 10년째 곁에서 보좌하고 있다. 그런 그는 지난 11월 15~20일 한국에 머물며 국내 주요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당시 김 차장의 방한 공식 이유는 외교부가 주최하는 제15차 한·유엔 군축·비확산회의(11월 17~18일) 참석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회의를 전후해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원희룡 제주지사, 박진 전 의원 등을 만나 국내 정세와 대선 출마 문제를 상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김 차장을 만난 한 인사는 “김 차장을 통해 받은 느낌은 반 총장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단계에서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 단계로 넘어간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반 총장의 대선 출마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관료, 그것도 외교관 출신이 거친 정치판에서 끝까지 해보겠다는 권력의지가 있겠느냐’는 것”이라며 “김 차장은 ‘주변에선 걱정하지만 반 총장 자신은 오히려 출마 의지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했다. 실제 반 총장 측에선 “유엔 사무총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세계 각지의 난민촌과 분쟁지역을 다니며 세계 대중과 소통하는 일”이라며 “오히려 대중 친화력에 반 총장이 강점이 있다”고 하고 있다.

지난 9월 14일 미국을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한 3당 원내대표들과 뉴욕 유엔사무국에서 기념촬영을 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photo 뉴시스
지난 9월 14일 미국을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한 3당 원내대표들과 뉴욕 유엔사무국에서 기념촬영을 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photo 뉴시스

설 직전 귀국설 유력

반 총장 주변에선 그의 귀국 시점을 놓고 내년 1월 15일, 1월 22일, 1월 29일 등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그가 내년 설 직전인 1월 중순쯤 귀국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반 총장 측은 귀국 이후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 요인을 만나 귀국 보고를 겸한 인사를 하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를 찾아 참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9일 국회의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결과에 따라 박 대통령 면담은 불발될 가능성도 있다. 반 총장은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과 같은 충청권 출신 원로인 김종필 전 총리를 예방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도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반 총장 측 인사는 “권 여사를 만나는 길에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동선에 대해 반 총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반 총장의 대선 가능성은 귀국 후 첫 한 달 안에 결판날 것”이라며 “결국 국민통합과 국난극복을 내걸고 새로운 리더십을 국민에게 보여주겠다는 뜻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이와 관련해 반 총장 측은 “귀국 이후 일단은 특정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권과 대중의 움직임을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의 영입을 거론해온 새누리당 입당은 계획에 없다는 뜻이다. 실제 새누리당 내 반 총장 지지그룹에서도 “새누리당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까지는 그가 입당할 리도 없고 입당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반 총장을 지지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침몰이 오히려 반 총장에게 ‘박근혜와의 차별화’ 부담을 덜어준 측면이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반 총장이 귀국 이후 일단 국민 소통에 나서며 정치권 재편 흐름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정치권에 입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새누리당은 대통령 탄핵 표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년 초 리더십의 교체와 재창당 내지 분당(分黨) 과정을 거치게 될 공산이 크다. 여기에 ‘조기 대선’이 가시화할 경우 정치권의 대선 시계가 빨라지면서 ‘제3지대론’이 급부상할 수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3지대론은 친박근혜 세력과 친문재인 세력을 제외한 비박(非朴)·비문(非文) 그룹을 중심으로 연합 내지 연대 세력을 만들어 내년 대선에 도전한다는 시나리오를 말하는데, 반 총장이 3지대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제3지대가 조성되고 반 총장이 제3지대 대선후보 경쟁에 뛰어들 경우 개헌이 고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비(非) 패권 정상지대’라고도 불리는 3지대론자들은 이원정부제나 내각제 등 분권형 개헌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 그룹과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그룹, 새누리당 비박계 등이 이런 입장에 가깝다. 최근엔 새누리당 친박(親朴)계에서도 ‘영남·호남·충청’ 지역 연대를 통한 분권형 개헌에 찬성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선과 총선의 주기(週期)를 맞추기 위해 다음 대통령의 임기를 2년6개월 정도로 단축하는 방안도 거론하고 있다. 반 총장과 가까운 새누리당의 한 충청권 의원은 “반 총장도 개헌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 정치 세력 기반이 없는 데다, 외교를 강점으로 하는 반 총장으로선 대통령이 외치(外治)를 맡는 분권형 통치구조 개헌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개헌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현재 대선 지지도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측이 개헌에 부정적이다. 또 박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든 그렇지 않든 조기 대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개헌에 걸림돌이다. 개헌을 위한 정치권의 합의를 이끌어낼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비박계 핵심 관계자는 “대선 전에 개헌이 안 될 경우 개헌파들이 집권 직후 개헌 추진이란 공약을 내걸고 대선에 연대하는 그림도 그리고 있다”며 “반 총장은 어떤 경우든 제3지대론자들에게 강력한 ‘말(馬)’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1월 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대통령 출마요청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진행된 ‘반기문 팬클럽 발대식 및 330인 발기인 선포식’에서 김만기 공동대표가 축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대통령 출마요청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진행된 ‘반기문 팬클럽 발대식 및 330인 발기인 선포식’에서 김만기 공동대표가 축사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실패할 일에 도전하지 않는다

반 총장을 잘 아는 한 충청권 인사는 “반 총장이 대선에 출마한다면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반 총장이 외교관 출신인 데다 다른 사람에게 항상 젠틀한 모습만 보여주다 보니 그에 대해 부드럽다 못해 유약하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적잖다. 그런데 내가 지켜본 반기문은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그는 절대 실패할 일에 도전하지 않을 사람이다. 반 총장은 자신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온갖 분석을 다 한 뒤 대선 참여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출마를 결행한다면 당선될 가능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물론 계산 결과 당선 가능성이 작다면 불출마할 가능성도 있다.”

반 총장의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그룹에선 최순실 사태 국면에서도 문재인 전 대표의 지지율이 2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꼽는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역대 대선을 보면 연대 세력의 지지율 합(合)이 60%를 넘겨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최순실 사태로 여권이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문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 등의 지지율 합이 60%에 못 미치는 점은 반 총장의 도전 의지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반 총장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10% 중·후반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반 총장은 제3지대 연대가 성사되지 않고 다음 대선이 다자(多者)구도로 치러질 경우도 상정하고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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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운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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