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일 광주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서명운동’에 참여한 문재인 전 대표.
지난 12월 3일 광주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서명운동’에 참여한 문재인 전 대표.

지난 12월 3일 오후 6시부터 광주 금남로에서 ‘박근혜 퇴진 광주 10만 시국촛불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 참석한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자유발언을 하지 못했다. 연단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정치인들이 무대에 오르면 행사의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다”며 문 전 대표가 연단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이날 문 전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발언했다. 그는 “전원 의원직을 사퇴한다는 각오로 탄핵을 반드시 가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광주 분위기가 여전하다”며 “광주가 일어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11월 27일 광주를 찾아왔다. 조선대에서 열린 비상시국강연회에서 그는 “100만, 200만명 모인 민심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모인 마음은 대통령을 바꾸는 것을 넘어서 국가를 바꾸라는 요청”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촛불집회를 “광주학생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민혁명”이라며 “역사의 물길을 바로잡는 것이 광주정신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문 전 대표나 안 의원이 각기 ‘광주 분위기’나 ‘광주 정신’을 강조한 것은 최근 역동적인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탄핵정국 속에서 대권주자 대열에 잠룡(潛龍)이 출현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전국뿐 아니라 광주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19일 광주 촛불집회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은 자유발언을 했다. 그는 “사회적 어머니 광주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 순간을 보내는 것이 영광스럽다”며 “대통령도 죄를 지으면 예외 없이 처벌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평등한 나라임을,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이번에 증명하자”고 했다. 이 시장은 이후 목포, 곡성, 광양을 잇따라 찾아갔다.

지난 11월 27일 광주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철수 의원.
지난 11월 27일 광주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철수 의원.

안철수 지지에서 이재명 지지로

이재명 시장이 광주 민심을 파고들자 안철수 의원과 문재인 전 대표가 광주를 재공략하는 모양새이다. 기존의 대권 판세를 흔들어 놓고 있는 이 시장은 국민의당 텃밭인 광주에서 안철수 의원과 초박빙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미 문재인·안철수·이재명의 3파전 양상이다. 이 시장의 지지세는 특히 안 의원과 국민의당에 심각한 경고음을 던지고 있다.

“요새 이재명 시장이 ‘하테’죠. 논리적이면서도 쉽고 필요한 얘기를 하잖아요.” 광주의 여대생 김모(22)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 시장 얘기를 제일 많이 한다”고 말했다. ‘하테’는 요즘 가장 핫(hot)한 인물이나 물건을 뜻하는 유행어.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핫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어서 더 끌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게는 문 전 대표와 안 의원은 올드(old)한 정치인으로 비친다고 했다.

직장인 윤모(32)씨도 이러한 의견에 동조했다. 그는 “이재명 시장이 한국의 트럼프 같다”며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직설적으로 빠르게 얘기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사원 정모(35)씨는 “이 시장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준다”며 “(대권후보가 된다면)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는 새로운 정치를 한다는 안철수를 지지했는데, 새정치를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런 말에서 안철수 지지자가 이재명 지지자로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 상무지구 주부 이모(38)씨도 비슷했다. “시원시원합니다. 다른 정치인들은 눈치 보는데, 이 시장은 그러지 않잖아요.”

탄핵정국에서 ‘탄핵’ ‘퇴진’ ‘구속’을 가장 앞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이 시장에게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을 선호하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젊은 세대다. 또 다른 직장인 김모(39)씨도 그렇다. “이재명이 좋아요. 가장 급진적이죠. 뭔가 시대의 영웅 같아요. 간지러운 곳을 해결해줄 것 같은 느낌입이다. 문재인을 지지했는데, 너무 양반이에요.” 김씨는 문재인 지지에서 이재명 지지로 바뀐 경우다. 공무원 최모(40)씨는 “(이 시장이) 뭔가 해줄 것 같아서 지지하는데, 문재인도 좋아서 앞으로 더 고민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기존 지지층이 움직이고 있는 사례다.

호남에서 1위를 달리는 문 전 대표의 경우 광주 시민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상당히 엇갈리고 있다. 고정지지층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다소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신중하고 정치력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건에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 안타깝지요. 이 시장은 강력한 리더십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강력함이 반대세력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적도 많은 것 같아서 지지하지 않습니다. 안 의원은 정치감각과 줏대, 추진력이 없어서 애초부터 지지하지 않았어요.” 종교인 양모(44)씨의 얘기다.

한 행정직 공무원(39)은 “나름 고심하는데, 문 전 대표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국정 안정을 최우선으로 봅니다. 이 시장은 너무 진보적이고 강해 본선에서 새누리당한테 질 것 같아요. 이 시장이 대통령이 된다면 국정이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대학생 정모(22)씨는 “이 시장이 세게 나오는데 검증이 안 된 것 같다”며 “그래도 참여정부 때 검증이 된 문 전 대표가 더 좋다”고 말했다. 광주 송정역 앞에서 개인사업하는 최모(52)씨는 “책임정치를 상실했다”며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책임정치 상실’이라는 반대 의사는 문 전 대표가 총선 당시 ‘호남에서 패배하면 정계은퇴를 하겠다’고 말해 놓고 나중에 “지지받기 위해 전략적 판단으로 했다”고 해명한 것 등과 관련이 있다.

지난 11월 19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분향하고 있는 이재명 시장.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9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분향하고 있는 이재명 시장. ⓒphoto 뉴시스

호불호 엇갈리는 문재인

안 의원은 문 전 대표와 이 시장 사이에서 협공을 당하고 있다. 안 의원이 가졌던 강점이 ‘새정치’였다. 기존 정치판을 바꾸는 이미지도 그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안 의원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제 광주 사람들은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지지와 기대를 접고 있는 것일까. 과거 안 의원이 가졌던 ‘새롭고 기존 판을 엎는 개혁적’ 이미지를 이젠 이재명 시장이 가져가고 있다. 안 의원이 광주에서는 이 시장과 2~3위를 다투는 혼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시장이 안 의원과 국민의당의 ‘요람’을 흔들고 있는 격이다. 안 의원과 국민의당이 어떻게 호남 민심을 지켜나갈지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다. 지난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진행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호남의 경우 문 전 대표는 27.1%, 안 의원은 16.5%, 이 시장은 15.4%의 지지율을 보였다. 광주에서 활동하며 정치에 밝은 한 인사는 “이번 탄핵정국에서 안 의원이 앞장서서 발언하며 적극 나섰지만, 시민들이 반응하지 않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국민의당을 장악하지 못하고 겉도는 안 의원에 대하여 리더십 부재로 받아들이고, 도련님 같은 말투로 탄핵정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경안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 / 조홍복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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