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체계론을 주장하고 있는 자오팅양 교수.
천하체계론을 주장하고 있는 자오팅양 교수.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천하(天下)’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천하는 기주(冀州)·연주(兖州)·청주(靑州)·서주(徐州)·양주(扬州)·형주(荆州)·예주(豫州)·익주(益州)·옹주(雍州) 9개 지방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바깥의 동서남북 사방에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이라는 네 오랑캐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문명은 천하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확산돼 나가는 것이며, 천하의 중심에 사는 사람들은 변방에 사는 오랑캐를 잘 교화(敎化)하고 문명을 공급해주는 대신 변방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이런 천하체계론을 다른 말로는 중화(中華)사상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인들이 진(秦) 왕조에서 청(淸) 왕조에 이르기까지 2300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믿고 있던 천하체계론은 1840년부터 두 차례 벌어진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아편전쟁으로 무너졌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진행된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라는 동력을 갖게 된 영국은 증기기관을 군함에 장착하고 처음으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과 인도양을 거쳐 중국 남부의 홍콩 앞바다에 도착했다. 당시 세계 GDP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세계 최강의 청나라는 자신들의 대포와는 사정거리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함포를 발사하는 영국 해군에 완패해서 지금의 홍콩을 조차지로 넘겨주는 역사상 최초의 굴욕을 경험하게 된다.

아편전쟁 패배는 중국 사람들의 천하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중국인들은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을 기반으로 유럽에 형성된, 주권국가를 기반으로 한 국제사회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중국은 천하체계론을 버리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 사절도 파견하는 등 충실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주(周)나라 때 만들어진 고대 중국의 천하 질서는 천자와 제후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망이 형성돼 적(敵)이 없었다. 이런 ‘천하 체계’는 지구화를 통해 전 세계 모든 국가와 사물이 하나로 묶어지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갈등을 줄이는 데 모델이 될 수 있다.”

지난 2005년부터 꾸준히 중국 안팎의 철학계와 국제정치학계에서 화제가 되어온 베이징 인민대 자오팅양(趙汀陽·55)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2300년 넘게 중화사상의 근간이 되어온 천하체계론이 현재 전쟁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현대 국제사회에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껏 서구에 의해 주도되어온 전 지구적 상황은 민족과 국가를 단위로 하는 국제사회에 바탕을 둔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궁극적 해결책 역시 ‘제국주의(帝國主義)’라는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두어왔다. 국제사회가 지금과 같이 난세(亂世)에 처한 것은 ‘세계(世界)’는 있지만 ‘천하(天下)’의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며, 여기서 말하는 ‘천하’란 바로 고대중국의 철인(哲人)들이 갖고 있던 관념이다. 천하를 얻는 일은 바로 백성의 마음(民心)을 얻는 것으로, 서양적 의미에서의 패권적 개념과는 대립되는 중국 전통의 관념이다. 어떻게 보면 낡았다고 생각되는 고대중국의 관념으로 21세기 국제정치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단숨에 재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통의 문제와 21세기 중국이 처한 세계사적 문제에 대해 중국의 전통적인 천하체계 이론을 21세기의 새로운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다.”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산터우(汕頭) 출신인 자오팅양 교수는 인민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사회과학원에서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리쩌허우(李澤厚)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칭화대 등 유명 대학에서 강의하고 미국과 유네스코를 무대로 국제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트러블 워터’에 빠져 있는 국제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 천하체계론을 제시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자오팅양 교수는 민족국가에 토대를 둔 근대적 국제정치로는 대응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직면하여, 중국 고대의 역사와 사상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민족국가의 이익을 잣대로 세계를 재면 국가 간 갈등과 전쟁, 중심과 변방의 마찰이 불가피하지만 중국 고대에 실현됐던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계란 관점에서 접근하면 다른 국가와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오 박사는 ‘천하로 천하를 본다(以天下觀天下)’는 노자(老子), ‘천하의 법도로 천하를 다스린다(以天下爲天下)’는 관자(管子)의 주장을 천하체계의 사상적 기반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자오팅양 교수가 주장하는 천하체계론의 부활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격으로 동이의 하나였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이론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재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민족 구성에서 한족의 비율이 90%가 넘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천하체계론의 부활은, 다시 말해 중화사상의 부활은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 어느 미국 국제정치학자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조공체제가 부활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어느 사이 천하체계론의 부활이 거론된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중국이라는 천하는 민족국가끼리 갈등하고 전쟁하는 곳이 아니라 천하의 민족이면 누구나 다 중앙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공간이라는 자오팅양 교수의 주장은 좀 터무니없기까지 하다.

자오팅양 교수가 꺼내든 천하체계론이 150여년 만에 다시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관심과 경계의 태도로 그 행로를 주목해야 할 듯싶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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